
햇살이 수면 위로 내려앉는 순간, 바람에 흔들리는 물억새가 황금빛 물결을 만든다. 고요함 속에서 더욱 또렷해지는 공간이 있다. 한때 사람들의 삶터였지만 오랜 시간 닫혀 있던 땅, 지금은 830여 종의 생명이 깃든 습지로 되살아난 곳이다.
총 53만 평 규모로 복원된 이 공간은 입장료 없이 누구나 걸을 수 있는 9.6km 둘레길을 품고 있다. 특히 겨울철에는 투명하게 부서지는 저수지 수면과 고즈넉한 풍경이 어우러지며 색다른 정취를 완성한다.
이곳은 바로 전북 고창에 자리한 고창 운곡람사르습지다. 인간의 개입으로 시작됐지만, 결국 자연의 힘으로 완성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수몰된 마을 위에 피어난 생명의 시간


이 습지의 시작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광원자력발전소 냉각수 공급을 위해 운곡저수지가 기공되면서 9개 마을 158세대, 약 360여 명이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운곡리 4개 마을 83세대와 용계리 5개 마을 75세대가 고향을 등졌고,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안덕 마을 역시 물에 잠겼다.
저수지는 면적 175만㎡, 총저수량 600만t 규모로 조성됐으며 둘레만 약 10km에 이른다. 그러나 완공 이후 출입이 통제되면서 주변 폐경지는 약 30년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그 시간은 역설적으로 자연 복원의 토대가 됐다. 2009년 이 땅의 생태적 가치가 확인됐고, 조사 결과 식물 315종, 육상곤충 328종 등 총 830여 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달과 삵이 몸을 숨기는 야생의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9.6km 둘레길과 3.3km 탐방 구간

이곳 탐방은 친환경주차장에 마련된 탐방안내소에서 시작된다. 운곡습지생태공원까지는 3.3km 거리로 도보 약 1시간이 소요된다. 반면 탐방열차를 이용하면 편도 15분이면 도착하며, 동절기에는 10:00부터 17:00까지 운행한다. 첫 출발은 10:00이다.
전체 코스는 탐방안내소에서 생태공원을 지나 용계마을까지 왕복하는 9.6km 구간으로 구성된다. 2코스는 저수지 변을 따라 이어지는 둘레길이고, 1코스는 습지 데크길을 따라 오베이골 습지까지 다녀오는 왕복 코스다.
데크길을 걷다 보면 가시연꽃 시험복원지와 늦반딧불이 서식처를 관찰할 수 있다. 특히 이 습지는 선운산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유문암 지층 위에 자리해 입자가 작고 균질해 물이 잘 빠지지 않는 특성을 보인다.
국가가 인정한 생태 가치

운곡습지는 2014년 환경부가 지정한 국가생태관광지이며, 2017년에는 전북서해안권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또한 람사르협약의 취지에 부합하는 습지로 보호받고 있다.
한국은 2024년 5월 기준 26개소, 총 203.189㎢의 람사르습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 이곳은 산지형 저층습지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생태공원에는 습지홍보관과 생태놀이터, 그리고 세계 최대 300톤 고인돌이 자리한다. 무엇보다 자연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조성된 탐방로는 습지의 숨결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노르딕워킹부터 생태체험까지

단순히 걷는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노르딕워킹과 만들기 체험, 운곡습지 생태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특히 교과연계팸투어는 10인 이상 단체를 대상으로 6,000원에서 8,000원 사이 비용으로 진행된다.
탐방열차 문의는 화요일부터 일요일 운행 기간 중 063-560-2720번으로 가능하며, 탐방안내소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063-564-7076번으로 연락할 수 있다. 상세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료로 개방된 9.6km 길 위에서 걷는 시간은 단순한 산책을 넘어선다. 수몰된 마을의 기억과 복원된 생태계가 공존하는 이 공간은 30년이라는 시간이 만든 변화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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