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작가들이 말하는 '캐릭터', '세계관', 그리고 '서사'

2025년 11월 13일, 지스타 2025와 함께 진행된 GCON 2025에서 만화계의 네임드들이 모였다. 무대에는 '죽음에 관하여'의 스토리 작가인 '시니', '무사만리행'의 서사를 담당하는 '운(이세운)' 작가, 그리고 '이노센트'를 필두로 압도적인 작화를 보여주는 일본의 '사카모토 신이치'가 자리했으며, 대화의 진행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전혜정 조교수가 진행을 맡았다.

게임 관련 주제를 주로 다루는 GCON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 처럼 느껴지는 구성이었지만, 의외로 통하는 바는 많았다. 게임과 만화 모두 중심이 되는 '서사'가 존재하는 만큼 캐릭터의 구성부터 세계관, 서사 줄기 구축까지 공통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으며, 실제로 현장에 모인 게임 관계자들도 충분히 가치있는 대화가 오갔음을 인정했다.

한편, 근본적으로 만화 산업에서 일하는 만큼 양국의 만화 산업과 관련된 이야기도 조금이나마 다뤘으며, '사카모토 신이치' 작가의 경우 입국 관련 이슈로 세션 중간 즈음 합류해 토론을 진행했다. 워낙 많은 대화가 오고 간 세션인 만큼 일부 내용은 생략했으나, 현장에서 진행된 대화를 간결하게 정리해 보았다.

▲ 좌측부터 시니 작가, 운 작가, 사카모토 신이치 작가, 전혜정 교수
1. 한·일 웹툰·만화 창작 환경과 독자 성향

● 운 작가 – 플랫폼 구조와 회차 단위 소비가 만드는 긴장

운 작가는 한국 웹툰 환경을 설명하면서, 주간 연재가 시작되면 피드백을 반영할 시간 자체가 거의 사라진다고 짚는다. 신인 시절에는 PD나 제작사로부터 피드백을 자주 받지만, 본격 연재에 들어가면 “일단 올리고 본다”는 쪽으로 구조가 고정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간섭은 줄고, 대신 작가의 자율성이 커지는 환경이 형성된다고 봤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창작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면 웹툰 작가가 돼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도 이런 시스템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특히 회차별 결제 구조를 한국 독자 성향과 연결해 해석했다. 일본처럼 잡지 한 권을 사면 20편 중 19편이 재밌으면 “돈이 아깝지 않다”고 느끼지만, 한국 웹툰은 “특정 작품의 특정 회차”만 콕 집어 결제한다. 소액이라 해도 그 한 화가 재미없으면 “쿠키를 날렸다”는 감각이 강해지고, 독자가 개별 회차를 하나의 완결 상품처럼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창작자로서는 회차 전체가 빌드업 과정이지만, 독자는 당장 구매한 회차가 재미있지 않으면 거세게 불만을 표출하는 구조라는 점을 강조했다.

● 시니 – 실시간 댓글과 ‘결과 집착’ 독자의 심리

시니는 한국과 일본 독자의 차이를 “취미를 대하는 태도”에서 찾았다. 일본 독자는 작가와 함께 서사를 쌓아 가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을 비교적 아까워하지 않지만, 한국 독자는 “내가 선택한 작품의 결말이 망가지진 않을까”를 먼저 걱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정을 함께 쌓아간다는 감각보다는, “결말이 망가질 리스크를 회피하려는 태도”가 더 강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그는 이 성향 뒤에는 한국식 교육 시스템이 있다고 추측한다. 모의고사, 내신 등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수능 한 번 망치면 끝”이라는 인식이 내면화되면서, 작품도 “결말이 엉망이면 볼 필요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해석이다. 결국 한국 독자들이 스포일러나 완결 보장형 작품, 즉 ‘회귀물'에 끌리는 것도, “결과가 안전하다”는 확신을 먼저 확보하려는 심리와 연결된다고 분석했다.

● 사카모토 신이치 – 편집자 중심 잡지 시스템

뒤늦게 합류한 사카모토 신이치는 전통적인 일본 만화 제작 시스템을 짧게 정리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편집자와 주간 미팅을 통해 잡지에 실릴 내용을 결정하고, 네임(콘티)을 보내 1차 독자인 담당 편집자의 체크를 받은 뒤에야 본 원고 작업에 들어가는 구조”가 지금도 기본이라는 것이다.

즉, 일본식 시스템은 플랫폼을 통한 불특정 다수의 실시간 피드백보다, 담당 편집자와의 밀도 높은 1:1 조율이 중심에 놓여 있다. 한국의 웹툰처럼 회차별 결제와 댓글에 의해 즉각 평가받는 구조와 대비되는 지점이다.

▲ 죽음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보여준 시니 작가의 '죽음에 관하여'
2. 캐릭터 설계, 주인공과 조연, 그리고 ‘명대사’

● 운 작가 – 캐릭터의 출발점은 ‘욕망’

캐릭터 설계에 대해 운 작가는 “이 인물이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고 말했다. 작법서에서 말하는 ‘초목표(슈퍼 오브젝티브)’도 결국 그 인물이 가진 원초적 욕망에서 출발한다고 보고, 그 욕망을 명확히 정의하는 순간이 캐릭터 구축의 첫 단추라고 강조했다. 독자가 그 욕망을 직접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창작자는 최소한 그 욕망을 끝까지 일관되게 쥐고 있어야 캐릭터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본다.

주인공 vs 조연 문제에 대해서는, 본인 작품 《무사만리행》의 황제 캐릭터(코모두스)를 예로 들며 “조연이 주인공을 잡아먹는 현상”을 스스로도 겪었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 가지 목표 조건’에서 찾는다. ① 너무 간절한 목표, ② 도저히 이룰 수 없어 보이는 목표, ③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왠지 가능할 것 같은’ 근거 없는 기대를 줄 수 있는 인물.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인물이야말로, 독자가 끝까지 따라가게 되는 주인공이라고 정의했다.

● 시니 – 장점과 단점은 하나, '이면'에 주목할 것

시니는 몰입감 있는 캐릭터의 핵심을 “장점과 단점이 한 덩어리에서 나온 모순”으로 설명한다. 단순히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 예를 들어 “무던해서 친절해 보이지만 그 때문에 무심한 상처를 주기도 하는 사람”, 혹은 “예민해서 디테일에 강하지만 그 때문에 주변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처럼, 하나의 성격에서 파생된 장·단점이 연결되어 있을 때 진짜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명대사에 대해서도 그는 같은 맥락에서 설명했다. 캐릭터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그 이면을 드러내는 순간에 튀어나오는 한 줄이 명대사가 된다고 본다. '원피스'에서 니코 로빈이 “살고 싶어”라고 말하는 장면처럼, 캐릭터의 껍데기 안에 있던 진짜 욕망이 튀어나오는 순간, 독자는 그 인물이 가진 모순과 이면을 한 번에 받아들이게 되고, 그 한 줄이 오래 남는 대사가 된다는 설명이다.

● 운 작가 – “명대사는 멋진 말이 아니라 서사를 완성하는 말”

운 작가는 신인들이 흔히 ‘명대사 = 평소 안 쓰는 어려운 말, 과장된 표현’이라고 오해한다고 지적했다. 요즘 독자들은 그런 인위적인 말투를 보면 “중2병 같다”고 느끼며 오히려 거부감을 가지기 쉽고, 멋있어 보일수록 작위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명대사는 “캐릭터의 서사, 혹은 작품의 서사를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다. 말 자체가 복잡하거나 시적일 필요는 없고, 오히려 스타워즈의 “아임 유어 파더”처럼 문장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 인물이 걸어온 길 전체가 응축돼 있을 때 비로소 명대사가 된다고 정리했다.

● 사카모토 신이치 – 말할 수 없다면 ‘침묵’도 하나의 대사

명대사에 대한 질문에 사카모토는, 캐릭터를 만들 때 “자신의 말을 대신해 줄 존재”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의도적으로 멋진 대사를 짜 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을 캐릭터에게 맡기는 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무리 고민해도 대사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침묵 자체를 그대로 두는 선택도 한다고 했다.

전혜정 조교수는 이를 두고 “침묵조차 명대사가 될 수 있다”고 받아쳤다. 사카모토에게 캐릭터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분신이며,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그 침묵과 말 모두가 작가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선택이라는 점이 강조된 파트다.

▲ 로마에 닿은 한반도 무사의 이야기를 그린 운 작가의 '무사만리행'
3. 세계관 구축과 연출 – 로마, 저승, 프랑스 혁명

● 운 작가 – 많은 사전 조사와 ‘암기시키지 않는 세계관’

세계관 이야기가 나오자, 운 작가는 화려한 비법 대신 “철저한 자료 조사”를 첫 번째 조건으로 꼽았다. 《무사만리행》을 준비할 때는 고대 로마 관련 서적을 거의 “코끝까지 쌓을 정도로” 읽었다고 표현할 만큼, 방대한 사전 조사를 기반으로 자신감을 쌓고 일관성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하나 중요한 원칙으로 “독자에게 세계관을 암기시키지 말 것” 을 들었다. 힘들게 일과 공부를 마치고 와서 만화를 보는데, 설정 도표와 나레이션으로 “이걸 외워야 재밌습니다”라고 강요하는 순간, 독자는 피로해진다고 지적한다. 대신 게임의 튜토리얼처럼,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사 속에 자연스럽게 규칙을 녹여 독자가 플레이하듯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은 세계관 설명 방식이라고 말했다.

● 시니 – 종교를 걷어낸 저승 세계, ‘보편’을 향한 설계

《죽음에 관하여》의 세계관에 대해 시니는, 처음부터 모든 종교와의 거리두기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죽음과 속죄를 다루는 이야기에서 어느 한 종교의 관점을 그대로 따르거나, 반대로 강하게 부정하면, 다른 배경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메시지가 도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종교적 상징과 교리를 벗겨내고, “옳고 그름이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을 목표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작중에 등장하는 신들은 특정 전통과 닮지 않은, 현대적인 패션을 한 존재들로 나타난다. 시니는 “언제나 내 주변에도 신이 있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기 위해 모습과 역할을 다채롭게 설계했다고 덧붙였다. 이 역시 “죽음을 알면 삶을 안다”는 자신의 세계관과 이어지는 선택이다.

● 사카모토 신이치 – 프랑스 혁명과 디지털, 그리고 ‘소리 없는 만화’

사카모토는 《이노센트》의 프랑스 혁명 세계관을 설계하면서, “베르사유의 장미 이후, 지금 시대의 기술로 어디까지 재현할 수 있는가”를 하나의 도전 과제로 삼았다고 말했다. 베르사유 궁, 거리, 의복과 장식품 등 18세기 프랑스를 디지털 기술로 얼마나 세밀하게 구현할 수 있는지, 그것을 위해 스태프 전체가 하나의 목표로 움직였다고 설명한다.

동시에 그는 시대극의 제약을 그대로 복원하는 대신, 독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현대적 코드를 일부러 집어넣는 선택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설정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가벼움이 오히려 당시 귀족 사회의 허영과 가벼움을 더 잘 표현해 줄 수 있다면, 현대의 표현 수단을 과감히 끌어와도 좋다고 본 것이다.

또한 작품에서 효과음·의성어·효과선 없이, 그림과 말풍선만으로 소리와 움직임을 표현한 이유에 대해서는, “독자 머릿속에 이미 ‘진짜 소리’가 있기 때문에, 만화는 그 상상을 끌어내는 리듬과 장면만 설계하면 된다”고 답했다. 독자의 해석 능력을 신뢰하는 쪽으로 만화를 설계하고 있다는 고백이기도 했다.

▲ 만화 전체에 대사를 제외한 의성어가 존재하지 않는 사카모토 신이치 작가의 '이노센트'
4. 협업 방식, 개인적 경험, 그리고 ‘좋은 이야기’의 정의

● 운 작가 – 철저한 분업과 ‘인간 찬가’

운 작가는 영화·드라마 현장 경험과 웹툰 작업을 비교하며, 만화 쪽 협업의 특징을 “역할이 명확히 나뉜 분업 시스템”이라고 정리했다. 본인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전부 떠안고, 연출·그림은 전적으로 파트너 작가에게 맡기는 방식을 선호한다. 서로의 전문성을 믿고, 괜한 욕심으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다 보면 작품이 산으로 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작품의 공통된 메시지로는 ‘인간 찬가’를 꼽았다. 지금 상황이 지독하게 힘들고, 압도적인 상위 전력이 존재하더라도, 그 앞에서 버티고 나아가려는 인간의 힘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가장 강한 1인자”가 아니라, 늘 더 강한 상대와 구조 속에 놓여 있는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도전하고 버티는 모습이, 독자에게 작은 응원과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 독자로부터 자신의 격투기 만화를 보고 실제 격투가가 되었다는 DM을 받은 일화를 들려주며, “좋은 이야기는 읽는 이의 삶에 작게라도 선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정의를 덧붙였다.

● 시니 – ‘이면’을 중시하는 세계관과 무거운 책임감

시니는 협업에서 자신을 “감독+각본+배우를 다 하려는 타입”이라고 소개했다. 원래 만화가를 꿈꾸다 그림 실력에 한계를 느끼고 스토리 작가로 방향을 튼 만큼, 콘티·연출·감정선까지 폭넓게 개입하는 스타일을 택한다. BGM 도입 등을 플랫폼에 제안했던 경험도, 스토리뿐 아니라 전체 연출을 통합적으로 설계하려는 성향에서 나온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 세계에는 항상 ‘이면’이 공통어처럼 숨어 있다. 소방서 사회복무요원 시절, 돌아가신 할아버지 곁에서 의사에게 화를 내며 “어떻게든 해보라”고 소리치던 할머니를 보며, 자신이 떠올렸던 ‘교과서 같은 반응’이 전부 매체에서 배운 가짜였다는 걸 깨달았다는 경험을 들려준다. 그때부터 그는 “죽음이라는 극단을 알면, 삶이 더 선명해진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고, 보기 불편한 장면·죽음·불쾌한 감정도 결국 삶을 더 강하게 끌어안게 만드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는, 독자의 무의식에 스며들어 삶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이라도 바꾸게 만드는 이야기라고 정리했다.

● 사카모토 신이치 –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가 보이는 작품

사카모토는 혼자 스토리와 작화를 모두 맡아 주간 연재를 해온 경험에 대해 “본인도 왜 가능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리듬을 만들고 나면 주간 연재는 오히려 “매주 완결을 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이야기를 계속 끌고 갈 수 있는 구조”라 장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반대로 한 달에 30~40페이지를 한 번에 완결 구조로 내야 하는 월간 연재 쪽이 더 힘들다고 느낀다고 덧붙였다.

좋은 이야기의 정의를 묻는 질문에 그는, “그 작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화가 나 있고, 무엇을 전하고 싶어 하는지가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답했다. 독자가 작품을 통해 작가의 기쁨·분노·신념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좋은 만화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앞서 한국 작가 둘의 발언을 들으며 “나도 더 책임감을 가져야겠다고 느꼈다”고 말한 대목에서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작업하는 세 사람이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공통된 인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