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메모리 위기론]③다운사이클 우려 과도...삼성전자·SK하이닉스 '자신감' 이유는

HBM 공급 과잉, 메모리 피크아웃 등 한국 메모리 산업이 직면한 다양한 도전과 변수들을 분석합니다.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에서 웨이퍼가 가공되고 있다. /사진 제공=SK하이닉스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과잉과 메모리반도체 피크아웃(하락전환)을 비롯한 일각의 우려와 달리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힘을 실어주는 긍정적 전망이 제기됐다. 메모리 제조사들이 수익성 우선 전략을 위해 보수적인 생산기조를 지키는 상황에서 HBM과 범용메모리 모두 공급과잉을 걱정하기에는 이른 시점이라는 분석이다.

지난 2022년 하반기에 시작된 다운사이클(하강국면) 이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생산량을 인위적으로 낮추고 설비투자 속도를 조절한 바 있다. 지난해 대규모 적자를 겪은 만큼 올해는 설비투자가 늘더라도 무리한 수준을 넘어서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신중한 투자로 시장이 급격한 하락세에 접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HBM 위주' 공급전략, D램 출하 제약

HBM과 일반 D램의 생산능력 소요량 비교 /자료 제공=한국투자증권

통상 공급 업체들의 설비투자 확대는 메모리 시장이 불황으로 접어드는 신호로 인식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기업들은 D램 가격이 오르는 시점에 수익성을 극대화하고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설비투자를 공격적으로 확장하며, 이는 과잉공급을 유발해 시장이 침체되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메모리 업사이클(상승국면)은 AI 메모리라는 새로운 응용 분야를 바탕으로 촉발됐다. 서버와 스마트폰, 개인용컴퓨터(PC) 등 기존 범용 제품과 비교해 공급 측면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생산을 제약하는 요인이 크다는 것이다. HBM은 제작에 필요한 공정 기술의 난도가 높고 한 번에 생산할 수 있는 물량도 범용 D램에 비해 크게 적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에 생산능력을 집중할수록 범용 D램의 공급은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한다.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300㎜ 반도체원판(웨이퍼) 하나에서 생산할 수 있는 칩 수는 최신 더블데이터레이트(DDR)5가 950개에서 1000개 정도다. 반면 HBM은 560개에서 580개로 절반 수준이다. AI 연산에 특화된 HBM은 데이터 입출구(IO) 개수가 일반 D램보다 월등히 많아, 그만큼 칩이 크다. 여기에 개별 칩을 수직으로 쌓고 가공하기 위한 실리콘관통전극(TSV)과 웨이퍼레벨패키지(WLP) 같은 고난도 후공정이 추가로 진행되기 때문에 수율이 크게 줄어든다. 범용 D램과 비슷한 수량의 HBM을 제작하려면 생산능력이 3배 이상 필요하다. HBM에 집중된 생산능력으로 인해 설비투자를 늘리더라도 공급이 더디게 증가하는 이유다.

HBM 공급과잉 가능성으로 언급된 요인 중 하나는 삼성전자의 급격한 생산능력 증가다. 올 하반기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HBM3E(5세대) 8단을 시작으로 공급을 확정하면 빠르게 생산량을 늘려 공급이 수요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우려다. 다만 삼성전자는 여전히 엔비디아 공급을 위한 품질인증을 통과하지 못했고, 현재 HBM3E 8단은 SK하이닉스가 독점하고 있다.

HBM3(4세대)와 마찬가지로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를 위한 HBM 초도 물량을 SK하이닉스가 독식하는 그림이 그려지면서 삼성전자의 공격적인 공급계획에도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올 4월 실적설명회에서 올해 HBM 출하량을 전년 대비 3배 이상 늘리고 내년에는 2배 더 확장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지만, 엔비디아 공급이 밀리면서 생산능력과 공급량을 낮출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범용 D램의 가격 상승세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HBM에 지나치게 역량을 쏟을 경우 전체 출하량이 감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을 독점한 SK하이닉스 역시 수익극대화를 위해 무리한 생산 확대보다 고객과 협의가 완료된 물량을 중심으로 신중한 기조를 지키고 있다. 혹시 모를 공급과잉 가능성을 낮추려는 판단으로 보인다.

'증설보다 공급 제약 완화'에 방점 찍힌 투자

공급과잉 우려와 달리 범용 D램 생산량은 아직 정상화되지 않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익성 위주의 사업전략을 추진하며 수요가 낮은 제품의 생산 비중을 크게 낮췄기 때문이다. 채민숙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23일 보고서에서 "올해 HBM 비트그로스(비트 단위 생산량 성장률)는 SK하이닉스가 전년 대비 318%, 삼성전자가 228% 증가했으나, HBM을 제외한 D램 비트그로스는 각각 13%, 15%로 2010년 이후 D램 연평균이었던 10% 후반에서 20% 초반에 미치지 못했다"며 "이는 결국 일반 D램 수요가 과거 추세로 회복되지 못했음을 의미하며, 공급사는 이를 고려해 아직 소극적인 공급기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HBM 집중에 따른 공급제약과 감산이 겹치며 D램 생산능력의 실질적 감소가 부각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범용 D램의 공급과잉을 초래할 증설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지난해 대규모 적자로 SK하이닉스는 설비투자를 대폭 축소했고, 삼성전자 역시 주요 공장의 가동일정을 소폭 연기했다. 이에 따라 당장 내년 공급에 영향을 줄 신규 공장 가동은 삼성전자의 평택 제4공장(P4)이 유일하다. 삼성전자가 이를 바탕으로 공격적인 공급확대에 나설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당장 내년 가동할 공간이 페이즈1(1단계) 정도로 제한적이고 첨단공정의 초기 수율 문제로 단기간에 생산량을 늘리키는 어렵다는 점이 변수로 꼽힌다.

올해 설비투자는 전년 대비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지난해의 8조원을 크게 뛰어넘는 20조원 이상이 거론된다. 시장 침체로 허리띠를 조인 지난해에 비해 올해 HBM을 중심으로 투자 소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의 48조원과 비슷한 규모의 설비투자가 예상된다.

다만 설비투자 확대는 증설보다 HBM의 생산능력 잠식과 선단공정에서 발생하는 낮은 수율에 따른 전체 비트그로스의 하락을 막는 데 방점이 찍힌 것으로 보인다. 특히 SK하이닉스는 투자자들에게 '설비투자 절제'를 통해 영업으로 창출되는 현금흐름 내에서 설비투자를 집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진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