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서 사느니 탈조선 하겠다” 연 2만 명 한국 국적 포기

오유진 2023. 3. 18.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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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해외이민·투자박람회에서 방문객들이 상담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유럽여행 중 외국인 친구들을 만났을 때 총을 맞은 기분이었어요. 공부량도 교육비도 제가 가장 많았는데, 연봉이나 사회적 직위는 그 친구들이 높았거든요. 다양한 배움의 기회, 폭넓은 직업 선택, 원만한 노후 복지. 견줄 수조차 없었어요. 투자 대비 아웃풋도 안 나오는 한국에선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 도전을 결심했습니다.” (캐나다 이민을 준비 중인 28세 박모씨, 서울)

한국을 떠난다. 몸만 떠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한국인’임을 포기하고 제2의 ‘내 나라’를 찾아 나선다. 법무부에 따르면 최근 11년(2012년~2022년)간 26만2305명의 한국인이 국적을 상실 또는 이탈했다. 국적포기자는 이민 등으로 외국 국적을 취득해 후천적으로 국적을 상실하는 '국적상실자'와 선천적으로 복수국적을 취득한 뒤 병역 등의 이유로 외국 국적을 선택하는 '국적이탈자'로 나뉜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연평균 약 2만명의 선·후천적 복수국적자가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셈이다. 같은 기간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14만8528명)보다 1.7배나 많다. 이들의 발길은 대부분 선진국으로 향했다. 최근 5년(2018년~2022년)간 우리나라 국적상실·이탈자의 새 국적은 미국(56.2%), 일본(14.8%), 캐나다(13.6%) 순으로 많았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미국 보스턴에서 거주하고 있는 송민기(30)씨는 “과거에는 영주권만으로 충분히 미국 생활이 가능했지만, 최근 자녀의 취업 등을 이유로 시민권이 없으면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가 늘며 국적을 포기하는 이민자들이 많아졌다”며 “미국 영주권자 중 약 80%는 한국 국적을 포기하더라도 미국 시민권 취득을 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현지 상황을 설명했다. 송씨는 “현재 국내법상 만 65세 이상일 경우 조건부 이중국적이나 국적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민자들 대다수가 큰 고민 없이 국적을 포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적은 여전히 한국이지만, 생활터전을 해외로 옮긴 사람도 많다. 결혼, 입양, 취업, 사업 등으로 장기 체류비자를 취득해 몸과 마음을 외국에 두는 이들(해외이주자)도 매년 증가 추세다. 1980년대 해외이주신고자 수는 연간 3만명대를 웃돌았다. 기회의 땅 미국에 가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불던 때였다.

하지만 한국이 점차 선진국 반열에 오르자 이주신고자 수는 2000년 1만5000명대로 감소하더니, 2014년에는 249명까지 줄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경기침체 등이 이어지며 지옥보다 힘든 한국 사회를 빗댄 ‘헬조선’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제2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한국 사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2017년 해외이주법이 개정된 후 2019년 해외이주자 수는 약 4000명대를 기록했다. 2020년~2021년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주춤했지만, 지난해부터 해외이주가 다시금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어쩌다 ‘탈조선(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것)’의 꿈을 꾸게 됐을까. 이민을 준비하거나 실행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국만큼 살기 좋은 나라가 없다”면서도 “한국 사회는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다분히 모순된 이들의 발언은 우리 사회의 모순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사회가 양적으론 성장했지만, 성장 과정에서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병폐들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송민기씨는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지금은 힘들지만, 더 나은 내일이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내 능력, 노력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기 어려운 시대”라며 “이런 맥락에서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탄생했고, 언어와 능력이 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노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해외로 떠나자는 분위기가 퍼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한국이 ‘헬조선’이라는 인식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달 20일 통계청에 따르면 최근 3개년 평균 한국 주관적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서 5.9점으로 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한국인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지난 10년간 오름세였지만, 타 국가와 비교했을 때는 삶의 질이 낮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이다. 한국갤럽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3명 중 1명인 34%, 그중에서도 사회생활을 가장 활발하게 하는 30대 응답자의 경우 절반에 달하는 46%가 요건만 충족될 경우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응답했다.

한국 사회가 임신·출산, 자녀를 양육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은 이들을 더욱 해외로 부추겼다. 저출산 문제가 이민의 주된 이유라고 말한 헨리(32)씨는 한국의 미래세대에 확신이 없어 자녀에게 미국 시민권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경쟁은 경쟁대로 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지금 MZ 세대들은 평생 일해도 집 한 채 못 사는 삶을 살고 있다”며 “20년 뒤 내 자녀가 고령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세금 등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후퇴하는 한국이 아닌 성장하는 미국을 선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캐나다 영주권자로 거주하다 2년 전 역이민한 30대 박모씨는 "가족이 있는 한국에서 생활하고 싶어 돌아왔는데, 아이 교육 때문에 다시 해외로 이민을 고민하고 있다"며 "한국에서는 수백만원에 달하는 영어유치원을 보내지 않으면 아이가 뒤처지는 것 같아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교육할 수 있는 해외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 특유의 문화도 자유와 공정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미국 이민을 준비 중인 송로익(25)씨는 “한국 사회는 웬만큼 해선 삶의 질을 올리기 어려운 사회”라며 “스트레스 레벨이 높은 직장생활, 나이에 대한 압박, 흔히 말하는 ‘특이한’ 사람에게 보내는 사회적 시선 등 받지 않아도 되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헨리씨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창의적인 접근보다는 기존의 방법을 고수하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성과보다는 사내 정치가 진급에 유리해지는 것을 알게 돼 회의감이 들었다”며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고,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으며, 피곤한 인간관계가 덜한 미국 사회가 나와 더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됐다”고 전했다. 실제로 송씨처럼 국내 대신 해외로 취업 문을 두드리는 사람 수도 증가하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2013년 연간 1600명대였던 해외 취업자 수는 지난해 5024명으로 10년 새 약 3.1배 증가했다.

하지만 인구 데드크로스를 겪는 한국에서 더이상 이들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이민청까지 설립해 국외 인구를 국내에 들여오려고 하는 상황에서 떠나는 한국인들을 내버려 두기에는 인구 감소 추세가 가파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해외로 떠나는 이민자들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미미하다. 2015년 이민정책연구원 ‘나가는 이민 통계 현황 및 개선 방안’ 보고서 또한 “해외로 나가는 이민자의 숫자가 국내 유입 이민자보다 4배 가까이 많음에도 정부의 관심은 국내로 들어오는 이민자에게만 집중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보고서를 작성한 이창원 이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2017년 이후 관련 통계 수집이 일정 부분 개선됐지만, 여전히 나가는 이민에 대한 표준화된 통계조차 없다”며 “조만간 재외동포청 설립을 앞둔 상황에서 ‘한국 출생 후 해외 이주자’에 대한 정확한 집계와 관리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타 국가에 비해 지나치게 배타적인 국적법을 손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 국적을 취득하면 복수국적이 가능하지만, 한국인이 해외에서 현지 국적을 취득하면 한국 국적은 포기해야 하는 비대칭적 상황"이라며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외국인이 되도록 유도하는 제도를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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