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객열전] LPBA '메기 효과' 기대주 한지은

홍성완 기자 2023. 5. 2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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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나이로 '철벽' 세계 1위 클롬펜하우어 꺾고 우승
'4대천왕' 산체스와 신생팀 'SY바자르' 합류
프로당구 선수 한지은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스포츠한국 홍성완 기자] '메기 효과(Catfish Effect)'라는 이론이 있다.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들은 항구에 도착하기 전 대부분 죽는다. 하지만 정어리가 가득 담긴 수조에 메기를 넣으면 천적을 피해 정어리들이 활발한 운동효과를 보이며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는다. 이와 같이 생존이 걸린 절체절명의 상황에 직면하면, 최대한의 잠재력을 발휘한다는 데서 나온 이론이 메기 효과다.

여자 아마추어 국내 랭킹 1위 자리를 지켰던 '샛별' 한지은(22.SY바자르) 선수는 올해 여자 프로당구리그(LPBA)에서 메기 효과를 가져올 '다크호스'로 거론되고 있다.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그는 강한 결단력과 투지를 갖췄다. 당구를 위해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난공불락의 '철의 여제'로 불리는 세계 랭킹 1위 테레사 클롬펜하우어(네덜란드)를 결승전에서 꺾는 대이변을 일으켜 일약 유명해졌다.

이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클롬펜하우어의 벽에 막혀 준우승에 머물렀던 한지은은 지난 3월 아시아 정상을 차지한 뒤 전격적으로 프로행을 선언했다. 신생팀 SY의 선택을 받은 그는 '4대천왕' 중 한 명인 다니엘 산체스(스페인),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황득희 선수 등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이에 따라 신생 SY는 대번에 우승권 전력으로 급부상했다. 올 시즌 LBPA 합류를 앞둔 한지은에 대한 당구 팬들의 기대감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자세로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경기도 양주 '빌런캐롬클럽'에서 한지은을 만나 그의 당구 스토리를 들어봤다.

◆ 피아니스트와 바둑기사 꿈꾸던 소녀
    스승 임상렬 만나 당구 인생 시작

지난해 국내대회에서 3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굳건하게 랭킹 1위를 지켜온 한지은은 올해 3월에 열린 '2023 아시아3쿠션선수권 대회' 여자부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아시아 여자 당구 최강자 자리에 올랐다. 

그는 각종 대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며 여자 3쿠션의 미래이자 보물로 불렸다. 따라서 많은 팬들은 그의 향후 행보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지은은 지난 4월 산체스, 최성원(휴온스) 선수 등과 함께 PBA 전향을 전격적으로 선언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2001년생으로 22살에 불과한 한지은의 구력은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어린 시절 우연히 아버지를 따라 간 당구장에서 재야의 고수이자 성남당구연맹에서 20년째 활약하고 있는 임상렬 선수를 만났고, 그로 인해 당구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프로당구 선수 한지은이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를 따라 당구장에 갔어요. 그때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임상렬 스승님이 '한 번 쳐볼래'라고 권유하셔서 당구를 처음 배우게 됐죠. 처음에는 기초만 알려주시니까 딱히 재미는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워낙 스승님이 기본기를 중시하시는 분이라 처음 두 달 동안은 스트로크 자세 같은 기본기만 배웠으니까요. 기술적인 부분은 한참 후에 차근차근 알려주셨죠. 원래 저는 피아니스트와 바둑기사를 꿈꾸기도 했어요.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좋았거든요. 당구도 새로운 걸 배운다는 그 자체가 좋아서 시작했던 것 같아요."

탄탄하게 기초를 다지면서 당구를 배운 한지은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당구연맹에 선수로 등록했다. 본격적인 당구 선수로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딸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길 바랐던 부모님은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줬다. 그렇게 한지은은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예전부터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길 바라셨어요. 어머니는 내심 걱정을 많이 했지만, 결국은 제 선택을 존중해 주셨죠. 그만큼 책임감도 느꼈던 것 같아요. 사실 공이 잘 맞을 때는 좋지만 안 맞을 때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어린 마음에 당구를 그만두고 싶은 때도 많았어요. 그래도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컸으니까 버틴 것 같아요. 그리고 모든 일이 다 힘들잖아요. 모든 일이 내 맘처럼 풀리지 않는 거니까요."

선수 등록 후 한지은은 꾸준하게 대회에 나가 입상권에 들면서 이름을 서서히 알려갔다. 어린 나이에 기초부터 착실히 실력을 쌓자 성적도 뒤따라왔다. 당시까지 어린 여자 선수층이 불모지나 다름없던 환경이어서 그의 성장은 더욱 눈에 띄었다.

"당시 초중등 동호회에 선수가 별로 없다 보니 항상 참여하는 선수들끼리 시합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입대해 군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조화우 선수를 비롯해 예은(김예은) 언니, 그리고 현지(용현지)하고 늘 같이 시합했었거든요. 실력이 뛰어났다기 보다는 경쟁이 심하지 않아서 입상까지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 고등학교 자퇴 후 한 단계 도약
    클롬펜하우어와 실력차 절감도

중학교 때까지 방과 후 당구장에 들러 연습을 하던 한지은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오로지 당구에만 매진하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고등학교는 한 학기만 다니고 자퇴를 했어요. 당구만 집중해야겠다는 결심이 섰거든요. 그러다 보니 친구가 많이 없는 건 좀 아쉽지만 후회는 없어요. 다만, 수학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보니 기회가 되면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당구에만 집중하기 시작한 한지은은 연맹 대회뿐만 아니라 세계 대회에서 꾸준한 성적을 올렸다. 특히 2019년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버호벤 오픈 3쿠션 토너먼트' 여자 결승전에서 세계 최강 클롬펜하우어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18세 때 일이다.

'2022 제10회 세계여자3쿠션선수권대회' 당시 모습. 이 대회에서 한지은은 준우승을 차지했다. ⓒ한지은 선수 제공

그리고 지난해 9월 네덜란드 헤이르휘호바르트에서 열린 '2022 제10회 세계여자3쿠션선수권대회'에서 또 다시 결승전에 올라 클롬펜하우어와 우승을 다퉜다. 비록 세계 최강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그쳤지만, 세계랭킹 2위라는 값진 성적표를 거뒀다.

"2019년 버호벤 대회는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대단한 클롬펜하우어 선수하고 결승전에서 경기한 것만 해도 좋았는데 이기고 우승까지 차지했으니까요. 그런데 작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그 선수한테 졌어요. 작년 대회가 더 기억에 남는 게 '정말 난 아직 멀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정말 클롬펜하우어 선수가 잘 치더라고요. 좋은 승부를 펼쳤어야 했는데 그냥 참패를 당했죠. 졌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은 경기였어요."

10여 년을 연맹에 몸담았던 한지은은 올해 LPBA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새 시즌을 맞이하고 있다. 신생팀에 합류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새로운 룰과 공인구에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변에서 주목받는 선수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전 실감이 나지 않아요. 그냥 시즌을 앞두고 걱정과 함께 부담감도 커요. 그렇지만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이 더 큰 것 같아요. 한동안 함께 경기하던 선수들과 다시 경기를 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크고요."

한지은은 재능도 재능이지만 지독한 연습벌레로 유명하다. 매일 구장을 찾아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에 할애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같은 소속팀이 된 이영훈 선수에게 많은 지도를 받고 있다. LPBA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스스로에게 더욱 채찍질을 가하며 하루 또 하루 연습에 몰두하는 모습이다.

"LPBA로 전향하면서 연습구장도 옮겼어요. 근처에 자취집을 마련해 이동 시간도 최대한 줄이면서 연습에 매진하고 있어요. 하루 2시간 정도 개인연습을 하고, 그 외에는 구장 손님들하고 연습시합을 해요. 구장에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 동호회 고수 분들인데 그분들과 시합을 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죠. 일단 그분들과 대등한 경기를 할 정도로 실력을 늘리는 게 목표이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거의 당구만 치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영훈 선수에게 배우면서 기술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 첫 시즌은 리그 적응이 우선 목표
    "'절친' 용현지와 결승서 만나고파"

LPBA 첫 시즌을 맞이하는 한지은의 우선적인 목표는 리그에 적응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8강 이상의 상위권 진입을 염두에 두고 있다.

"첫 시즌부터 우승한다는 건 운이 많이 따라주지 않는 이상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일단 우승은 욕심이라고 봅니다. 성적을 내지 못하더라도 절망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편하게 적응한다는 마음으로 임하려고 해요. 그렇게 해서 잘 풀리게 되면 그 다음에 최대한 좋은 성적 거두도록 노력해야겠죠."

프로당구 선수 한지은이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한지은에겐 다행스럽게도 리그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가 있다. 바로 동갑내기 절친 용현지(하이원리조트) 선수다. 이 둘은 여러 면에서 통하는 부분이 많아 친분이 두텁다. 또한 경기에 임할 때는 서로를 자극하는 선의의 라이벌이기도 하다. 그래서 LPBA에 먼저 진출한 용현지에게 여러 모로 도움을 받고 있다.

"현지한테 여러 가지 물어보는데 잘 알려주고 조언도 많이 해줘요. 현지가 생각도 깊고 성숙하다 보니 의지가 많이 돼요. 이번에 LPBA 온다고 하니까 너무 반가워하더라고요. 연맹에 있을 때도 항상 '결승에서 보자'라고 서로 덕담을 나눴는데 LPBA 결승에서 둘이 꼭 만났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현지하고는 친하다 보니까 토너먼트 초반보다는 최대한 늦게 만나고 싶은 마음이에요."

한지은은 올해 PBA 팀리그에 새롭게 합류하는 SY그룹의 'SY 바자르'에 지명됐다. 그의 스타성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각오를 새롭게 다진다. 아마추어 성적에 연연하기 보다는 프로리그 신인이라는 마음으로 항상 도전하는 자세로 임하겠다는 것이다.

"SY팀에 뽑히게 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에요. 팀에 소속되는 건 그만큼 책임감이 따라오기 때문에 팀에 좋은 성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자기관리에도 더욱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생팀이니 만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해야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의연함과 조숙함이 엿보이는 한지은의 모습이다. 그가 이처럼 늠름하게 성장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 선택을 존중해 주시고 스스로 길을 개척하도록 해주신 부모님께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에요. 부모님 못지않게 감사한 분은 역시나 임상렬 스승님이죠. 제가 당구선수의 길을 가게 해주신 분이니까요. 당구 배울 때는 먹을 것도 직접 해주시고 지금도 조언을 아끼지 않으세요. 그리고 그동안 후원해주신 많은 분들께도 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항상 잘 챙겨주는 민지(송민지) 언니, 그리고 지금 절 가르쳐주는 영훈 오빠한테도 늘 고마운 마음이에요."

한지은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자, 앳된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다 쑥스러운 목소리로 팬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제 올해 시즌 시작이 얼마 안 남았는데, 시즌 시작하면 또래 친구들과도 많이 사귀고 싶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많은 기대를 하시는 팬 분들도 있을 텐데, 제가 기대한 만큼 못하더라도 적응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해 주시고 너그럽게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조금씩이라도 더 나아지는 선수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프로당구 선수 한지은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스포츠한국 홍성완 기자 seongwan62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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