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의 ‘집밥’ 코티지 파이
로스트한 고기는 일요일엔 뜨겁게(Hot on Sunday), 월요일엔 차게(Cold on Monday), 화요일엔 볶아서(Hashed on Tuesday), 수요일엔 다져서(Minced on Wednesday), 목요일엔 커리로 먹고(Curries Thursday), 금요일엔 국물 요리로(Broth on Friday), 토요일엔 코티지 파이로(Cottage Pie Saturday) 먹는다는 영국 표현이 있다.
로스트란 여럿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덩어리 고기를 천천히 구워 만드는 요리다(〈시사IN〉 제786호 ‘‘진정한’ 영국 음식 선데이 로스트’ 기사 참조). 그러니 로스트를 하는 경우 덩어리 고기나 곁들인 야채들을 다 먹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으로 치면 명절을 쇠고 남은 나물이나 전을 활용해 다른 음식을 만들듯 일요일에 대가족이 모여 성대하게 로스트하고 남은 고기는 여러 가지로 변신하여 일주일 식사를 책임지는 게 보편적이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선데이 로스트를 먹은 다음 날은 남은 고기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다. 그다음에는 다시 데워서 먹는다. 이렇게 살코기는 알뜰하게 발라먹고 금요일쯤에는 남은 뼈로 육수 낸 것을 베이스로 수프를 만들어 먹는다. 종교의 문화적 영향이 강하던 시절, 금요일에는 고기를 피하기도 했으니, 이 육수에 영국에서 재배되어 싸고 구하기 쉬운 감자나 양배추, 양파 등 야채를 넣고 푹 끓여 경제적이고 ‘거룩하게’ 또 한 끼를 때울 수 있었다.
토요일에 등장하는 것이 코티지 파이인데, 코티지 파이 또는 셰퍼드 파이는 선데이 로스트를 하고 남은 고기를 재탄생시켜 먹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안에 들어가는 고기가 쇠고기면 코티지(cottage, 시골집이라는 뜻) 파이가 되고, 양고기면 셰퍼드(shepherd, 양치기라는 뜻) 파이가 된다.
파이라고 하면 흔히들 산딸기, 사과 같은 과일이나 피칸 등 견과류가 올라간 디저트를 생각하기 쉽지만 영국 음식 중에는 ‘파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면서 달지 않은, 세이버리(savory, 풍미 있는)한 음식이 여럿 있다. 들어가는 단백질의 종류에 따라, 또는 바삭한 밀가루 겉껍질을 씌우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데, 코티지 파이와 셰퍼드 파이는 다른 파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만들기가 쉽고 간단하다.
코티지 파이 또는 셰퍼드 파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감자를 삶는다. 영국 음식에서 감자는 한국 음식의 밥에 견줄 수 있다. 끼니를 마련하려면 밥부터 짓는 식이다. 삶은 감자에 버터와 우유를 넣고 으깨어 매시트포테이토를 만든다. 이때 취향에 따라 크림을 넣어 더 부드럽게 하거나 치즈를 넣어 좀 더 쫄깃하게 만들기도 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중불로 달군 다음 적당한 크기로 다진 양파, 당근 등의 야채를 볶다가 남은 고기가 있다면 또 대충 다져서 넣고 조금 더 볶는다. 볶음밥을 만들 때는 찬밥으로 하는 게 제격인 것처럼 코티지(셰퍼드) 파이 역시 남은 고기로 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지난 일요일에 로스트를 하지 않았다면 고기를 사서 해도 된다.
20대 젊은이가 꼽은 ‘진정한 영국 음식’
만일 생고기를 사용한다면 보통 간(minced) 고기를 쓴다. 고기가 적당히 익을 때까지 볶고, 밀가루를 조금 넣고 덩어리지지 않게 5분 정도 더 볶는다. 여기에 육수와 토마토퓌레, 우스터소스, 여러 가지 허브, 소금, 후추를 넣고 10분 정도 끓인다. 이러면 고기에 양념이 배고 밀가루가 걸쭉하게 되어 대략 밥이 없는 커리나 면이 없는 짜장을 좀 더 뻑뻑하게 한 정도 질감의, 건더기가 많은 스튜가 된다.
이것을 오븐 용기에 옮겨 담고 그 위에 만들어둔 매시트포테이토를 두툼하게 얹는다. 쫀득한 식감을 원하면 이때 치즈를 더 뿌리기도 한다. 약 190℃로 예열된 오븐에 넣고 감자가 노릇해질 때까지 20~30분 구우면 파이가 완성된다. 영국 사람들 역시 따뜻하게 먹어야 하는 메인 요리를 뜨겁게 먹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식전 드링크를 마시면서 음식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거나 접시도 뜨겁게 데우고 여러 방법을 동원하는데, 코티지(셰퍼드) 파이의 경우 조리 시간에 민감한 요리가 아니다. 따라서 가족의 퇴근이나 하교가 늦어져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초보가 만들기에 적합하므로 집을 떠나는 대학생들이 처음 배우는 요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단백질, 탄수화물에 야채까지 넣을 수 있어 영양이 풍부하고 한번 만들어 놓으면 며칠씩 두고 먹을 수도 있다. 친구들을 불러 자기네 집 특유의 파이 맛을 보여줄 수도 있다. 매시트포테이토를 만드는 방법에 변화를 줄 수도 있고, 당근이나 콩 같은 여러 야채를 바꿔 넣을 수도 있어서(영국 엄마들이 아이들이 싫어하는 야채를 먹이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집 것과 맛이 같은 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년 전 부엌 공사를 하느라 주방을 쓸 수 없었을 때 이웃 할머니가 며칠 두고 먹으라며 큰 오븐 용기에 가득 코티지 파이를 만들어준 일이 있다. 매일 음식을 사서 먹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집밥을 먹지 못하고 있다니’ 하고 안타까워하며 만들어준 것이 다름 아닌 코티지 파이였다. 말하자면 코티지(셰퍼드) 파이란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대표적인 ‘집밥’이다. 로스트비프가 명절이나 특별한 날 대가족이 모인 시끌벅적하고 거나한 식사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면, 코티지(셰퍼드) 파이는 식구들과 같이하는 평범한 저녁밥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다.
대신 이렇게 ‘손쉽게 만들어 먹는 집밥’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식당 메뉴에 올라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손님용 요리도 아니다. 캐주얼하고 친밀한 분위기에서나 등장할 수 있는 음식이라서, 외부인이나 관광객으로서는 경험하기 힘든 음식이기도 하다.
지난번 ‘선데이 로스트’ 편에서, 영국 할머니에게 ‘진정한 영국 음식이 뭐냐’고 물으니 선데이 로스트라고 대답하더라고 쓴 바 있다. 그런데 당시 20대 후반 정도의 젊은이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그는 셰퍼드 파이를 들었다. 각각 본요리와 재활용 요리를 진정한 영국 음식이라고 말한 셈이다. 다만, 그 청년에게 셰퍼드 파이란 걸 그럼 어디서 사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잠시 생각한 끝에, 셰퍼드 파이는 사서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고 말했다. 마켓 등에서 셰퍼드 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파는 반조리 음식은 진정한 셰퍼드 파이가 아니라는 거다. 뭔가 ‘우리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 정도의 뉘앙스다.
사먹을 수도 없다면서 소개하면 어쩌란 말이냐 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집집마다 다른 맛의 음식이니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레시피 종류도 많다. 내 방식의 코티지 파이를 개발해보는 것이다.
김세정(변호사)·최은주(이학박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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