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 계엄군끼리 오인사격…송암마을 주민 무차별 화풀이 학살

광주일보 2026. 5. 1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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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 철수 공수부대, 전교사 만나 오인사격
흥분한 계엄군, 송암동 일대 시민 향해 총질
10살·13살 어린 생명들 온기마저 빼앗아
주민 30여명 연행…구타·총살 정황 확인
도청 내부선 무기 반납 둘러싼 갈등 격화
<챗GPT 생성 이미지>
계엄군은 광주 시민들 몰래 광주에 재진입해 유혈 진압할 계획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24일 광주 외곽에서는 광주 재진입 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준비하던 계엄군들이 서로 오인사격을 하고, 분풀이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상황이 잇따라 발생했다.

24일 오전 9시50분께 광주 북구 운암동 광주 톨게이트 인근 도로에서는 이동 중이던 병력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총성이 터졌다. 육군 제31보병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과 기갑학교 병력이 서로를 시민군으로 오인해 교전을 벌인 것이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교전은 아군과 적군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총성이 멈춘 뒤 현장에는 숨진 병사 3명의 시신만 남았다.

1980년 5월 24일 도청 앞에서 시민군이 자발적으로 총기를 회수하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같은 날 오후 1시50분께 광주시 남구 송암동 효덕초등학교 삼거리에서는 또 다른 참극이 벌어졌다. 광주비행장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던 11·7공수여단 차량부대가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였다.

병력은 광주 방면에서 나주 방향으로 이동하던 시민군을 발견했고, 잠시 뒤 장갑차와 63대대 병력이 시민군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뒤따르던 병력들은 전방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총성에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누가 어디를 향해 쏘고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병사들은 도로 주변과 골목 방향으로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효덕초 일대는 그야말로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진 총탄은 어린아이들도 비껴가지 않았다. 당시 저수지에서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던 진남중 1학년 방광범(13)군은 머리에 총탄을 맞아 현장에서 숨졌다.

인근에서 놀던 살레시오초 4학년 전재수(10)군도 계엄군을 보고 달아나다 벗겨진 고무신을 주우려던 순간 M16 소총탄 6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혼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총격 속에서도 선두 장갑차와 차량부대는 효덕초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보병학교 화기중대 방어선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장갑차 측은 전방 차단선을 시민군이 설치한 장애물로 오인해 돌파하기로 결정했고 반대편 화기중대는 접근하는 장갑차를 시민군 차량으로 착각했다.

잠시 뒤 화기중대 측이 90㎜ 무반동총을 발사했다. 굉음과 함께 계엄군끼리 총격을 주고받는 오인 교전이 벌어졌고, 이 사고로 군인 9명이 목숨을 잃었다.

교전이 중단된 뒤 제11공수여단은 송암동 지역에 대한 수색 작전에 나섰다.

제11공수여단 62·63대대는 송암동과 일성마을 일대를 수색하며 시민군 6명과 주민 30여 명을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김종철(17씨)군은 체포된 뒤 62대대 6지역대 소속 병사로 추정되는 계엄군에게 희생된 것으로 전해졌다.

일성마을 주민 3명도 한꺼번에 끌려간 뒤 묘법사 앞 철길과 도랑 부근에서 집단 구타를 당한 후 총살됐다.

또 인근 도로를 지나던 민간인은 오인사격 이후 흥분한 계엄군의 총격에 부상을 입고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이날 밤 숨졌다.

1980년 5월 24일 상복을 입은 채 거리를 걷고 있는 유족의 모습. <광주일보 자료사진>
송암동 일대 오인 교전과 민간인 희생이 이어진 뒤 계엄군은 다시 광주 재진입 준비에 속도를 냈고 계엄군 병력은 하나둘 광주비행장으로 집결했다.

계엄군이 은밀히 광주로 재진입할 계획을 꾸미는 사이, 광주는 두 쪽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도청 안에서 시민군의 무기를 반납할지 여부를 두고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내부 갈등이 깊어지더니, 24일 회의를 기점으로 표면화된 것이다.

강경파는 “정부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희생자 장례, 구속자 석방 등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온건파는 “계엄군의 재진입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협상과 무기 반납이 필요하다”고 맞서는 싱황이었다.

분위기는 결국 강경파 쪽으로 기울었다. 정부의 공식 사과와 희생자 시민장,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기 위해 무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기 회수와 협상을 주장하던 온건파는 시민군 내부 강경 여론과 도청 밖 시민들의 반발에 밀려 수습대책위원회에서 점차 영향력을 잃었다.

결국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내부 주도권은 강경파로 넘어갔고, 도청은 협상과 수습의 공간에서 계엄군 재진입에 대비한 최후 항전의 거점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하성민 기자 hs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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