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형지식분점] 건담을 거절해 천추의 한을 남긴 회사… 일본 장난감 업계 삼국지 2부!
*본 기획에서는 완성품 피규어는 상세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금형을 통해 뽑아져 나온 플라스틱 사출물을 조립, 일부 도색하여 완성에 이르는 제품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연재 첫 번째 ‘일본 장난감 업계 ‘삼국지’ 편에 예상 못한 반응에 많이 놀랐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더 재미나고 기발한 얘깃거리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지난 번에서 업계 1등 반다이를 따르는 여러 서브컬처 계 프라모델 업체들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원래 전통적으로 프라모델, 즉 조립식 모형을 만들어 판매하던 업체들은 그럼 다 죽었느냐? 그건 또 아닙니다. 이번엔 반다이보다 더 오래된 업력을 보유한 정통의 모형 메이커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정통’이라고 단어를 붙이려다 보니 ‘그럼 모형이 ‘정파’냐 ‘사파’냐 하는게 존재한단 말이냐!’라며 불쾌감을 느끼실 분들도 계시겠다 싶은데요, 그럴 의도는 전혀 없이 오로지 설명의 편의를 위해 붙인 단어라고 이해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애초 모형 제작이라는 취미가 시작된 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물건을 일정 축척으로 작게 만들어 즐기는 것이었고, 그 소재는 전쟁에 쓰이는 도구 즉, 전차, 전투기, 함선 등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물론 자동차나 여객 항공기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그렇고요. 그래서 오래된 프라모델 메이커들의 시작 아이템은 전차나 비행기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죠.
일본의 모형 업체 이렇게 밀리터리, 에어로 장르로부터 발전해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메이커들이 바로 ‘타미야’, ‘하세가와’, ‘후지미’, ‘아오시마’ 등이죠. 이 회사들에게는 공통으로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요, 바로 이들 회사의 시작지점 및 본거지가 전부 시즈오카 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의도된 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세계 모형 관련 전시회 중에서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호비쇼가 시즈오카에서 열리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죠(매년 5월 개최). 아무튼 그래서 시즈오카는 흔히 ‘모형의 마을/도시’라고 불리곤 합니다.
여기까지 서론으로 하고, 본격적으로 각 메이커들에 대한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아, 여기서 타미야라는 회사는 정통 프라모델 메이커 중 분명 No.1으로 꼽히지만,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서브컬쳐 또는 오덕 분야에는 관심이 그닥 없는 회사라 여기서는 제외키로 합니다.
서브컬쳐 모형의 원조는 사실 나야, 하세가와
하세가와는 1941년 ‘하세가와제작소’라는 명칭으로 창업해 목재 모형을 주로 다루는 회사였다가 1961년, 신 소재 플라스틱을 이용한 프라모델 분야에 뛰어든, 역시 업력이 오래된 메이커입니다. 하세가와가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는 바로 ‘비행기’로, 지금은 또 별반 통하지 않는 내용이긴 합니다만 전성기 시절에는 ‘비행기의 하세가와’라는 별명이 붙어있던 걸로 유명하죠.
전통 장르인 에어로나 밀리터리를 약간 빗겨간 신선한 시도를 꽤나 일찍부터 했던 하세가와의 대표작 중 하나는 ‘계란 비행기’. 1980년대부터 시작된 이 시리즈는 각종 명 전투기들을 큰폭으로 ‘데포르메’해서(이른바 SD죠) 계란 모양으로 만들고 조립성도 쉽게 해서 낸 하세가와의 대표작입니다. 아마 나이 좀 드신 한국의 ‘어르신’ 모델러 분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제품일 테죠. 이 시리즈는 탄생부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답니다.
이렇게 ‘가능성이 엿보였던’ 하세가와의 이쪽 세계(?) 실력은 그야말로 활짝 펴게 되는데…. 그게 바로 애니메이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주역 기체 ‘VF-1 발키리’ 프라모델화였던 것입니다. 하세가와는 계란 비행기에 이어 자신들의 명성을 다시금 떨치게 되죠. 이 발키리는 미 해군의 걸작 가변익 전투기인 F-14 톰캣을 모티브로 한 것이었기에 에어로 장르에서 특히 강점을 가진 하세가와에게 제격인 셈이었습니다. 동체와 날개 전체에 꼼꼼히 새겨진 패널라인과 리벳 자국, 파이터 모드에서 보여주는 현용 전투기의 날렵하고 세련된 모습 등… 비록 SF 모형계의 후발주자인 반다이 제품의 접착제나 공구가 필요 없는 쉬운 조립성과 도색이 필요 없는 그런 장점은 가지지 못했지만 ‘과연 비행기는 하세가와군!’이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이 외에 일러스트레이터 ‘요코야마 코우’씨의 잡지 연재 기획을 모형화한 시리즈 ‘마쉬넨 크루거’를 통해 밀리터리와 SF물을 성공적으로 혼합했고, 세가의 아케이드 액션 게임인 ‘전뇌전기 버츄얼 온’ 프라모델도 하세가와를 통해 제품화됐습니다.
이렇게 하세가와는 전통적인 모델러와 서브컬쳐 문화에 친숙한 신세대 모델러들과의 융합(?)을 가장 잘, 활발하게 전개해 나가는 모범적인 메이커라고 할 만합니다. 내놓는 제품들도 매력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통칭 ‘크리에이티브 웍스’라는 시리즈로 진행하고 있는 하세가와의 모형들 중 한 가지는 꼭 소개하고 싶네요.
미술가, 아트 디렉터인 ‘코바야시 카즈시’ 씨의 오리지널 메카인 ‘메카트로 위고’의 프라모델은 근미래에 등장할 법한 아이템으로 황당무계하지 않은 현실적인 상상력과 귀여움을 함께 갖춘 프라모델 시리즈입니다. 접착제도 필요없는 스냅 타이트 키트로, 개인적으로 꼭 만들어 라인업을 구성해놓고 싶은 녀석들인 겁니다.
오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온 아오시마 vs 후지미
하세가와 다음 타자인 아오시마, 그리고 후지미의 경우는 선의의 경쟁자, 라이벌 구도로 포지셔닝하기에 딱 좋은 메이커들입니다. 잘 하는 분야도 그렇고 라인업도 묘하게 비슷한 게 많죠.
우선 아오시마는 저희 연재에서 소개하는 업체 중 창업 년도로 보면 가장 오래 된 메이커입니다. 무려 1924년! 일본의 연호로 ‘쇼와’도 아니고 무려 ‘타이쇼’ 때 생긴 회사라는 것이죠(쇼와는 1926년부터이니까…).
창업 당시 회사의 이름은 ‘아오시마 비행기 연구소’ 회사 이름에서 나오듯 동력 달린 모형 비행기 제작이 주 아이템이었다고 합니다. 이 회사 역시 프라모델 분야로 뛰어든 것은 하세가와 및 뒤에 얘기할 후지미와 같은 해인 1961년이었고, 프라모델로 사업 방향을 선회한 이후에는 어찌된 일인지 비행기 모형보다는 다른 분야에 집중했습니다.
회사의 최종적으로 바뀐 이름이 ‘아오시마 문화교재사’라는 것에서 보듯 라인업은 그야말로 인기가 있을 법한 것은 전부 다 손댄 느낌인데요. 60년대 미국과 소련의 달 착륙 경쟁으로 우주 붐이 일자 아폴로 시리즈를 냈고, ‘우주소년 아톰’, ‘오바케의 Q타로’ 등 인기 애니메이션 관련 프라모델을 저작권을 따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아오시마에게는 안타까운(?) 후일담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에 걸쳐 모형업계에 불게 된 건프라 붐과 관련된 얘기입니다. 당시 기동전사 건담이 TV에서 방영중일 때 건담의 프라모델 제작 의뢰가 아오시마 쪽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오시마는 당시 건담의 다음 타자 애니메이션으로 결정됐던 ‘무적로보 트라이더 G7’부터 모형화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유로 건담을 맡는 것이 무산되었고, 결국 건담의 모형화는 반다이로 넘어간 것. 아오시마로서는 그야말로 ‘천추의 한’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당시 분위기로는 건담은 초기 시청률이 그닥 좋지 않는 등 성공과는 거리가 있는 애니메이션이었고 오히려 트라이더 G7 쪽이 시청률 대박을 치는 등 인기작이었기 때문에 아오시마의 선택은 인간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신의 선택’에 좌우된 거라고 봐야겠지만요.
한편 후지미는 1948년 ‘후지미 모형교재사’로 창업해 1961년부터 프라모델 제작에 뛰어들었습니다. 초기부터 후지미의 ‘전공’은 함선모형으로 1971년에 시즈오카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타미야, 하세가와, 아오시마와 함께 전개한 함선모형 라인업 ‘워터라인’ 시리즈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회사의 시작부터 그랬듯 후지미의 함선모형에 대한 욕심은 특별히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워터라인 시리즈 아래에서 메이커 별로 제작, 발매하는 함선을 정해놓고 라인업을 중복시키지 않는 형태로 운영을 해왔지만 1992년 워터라인 연합에서 돌연 탈퇴, 독자적인 ‘시웨이 모델’ 라인업을 구성하기 시작했죠. 사실 모형 장르 중에서 가장 조립 및 도색 등 완성까지의 난이도가 가장 높은 것 중 하나가 함선 모형인데, 후지미의 이러한 열정 덕분인지 반드시 중급 이상의 도색이 필요했던 갑판을 데칼로 처리한다던지, 접착제 없이 조립하는 ‘스냅 타이트’ 방식을 적용한다던지 해서 함선모형 제작의 허들을 크게 낮춰놓았다는 점은 인정해 줘야 할 메이커이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 아오시마와 후지미는 어떤 부분에서 라이벌로 놓고 봐도 될까? 두 메이커 모두 일본 국산 차량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서 국산차 라인업에 심혈을 기울여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상용차는 물론이고 경주용 차량, 트럭, 버스까지(!) 바퀴가 있는 차량이라면 거의 대부분 라인업을 갖춰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오토 프라모델도 최정상급 기술과 라인업을 갖춘 타미야도 제품 선정의 폭은 어느 정도 ‘팔릴만한’ 물건 위주로 내놓는데 비해 아오시마와 후지미의 자동차 모형 제품들은 ‘일본 사람들 중에서도 그 차를 실제 가지고 있는 사람들 말고는 안 살 것 같은데…’ 싶은 차종도 모형화를 합니다.
특히, 후지미의 자동차 모형의 경우 조립 시 단차도 잘 맞지 않는 등 조립성이 그야말로 ‘개판’인데다 디테일도 거의 생략해서 대충 만든 듯한 느낌을 주어 우리나라 오토 모델러들에게는 ‘제품이 ‘후져서’ 이름이 후지미’라는 불명예도 얻은 바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두 회사는 앞다투어 전력으로 일본 국산 차량 라인업을 확충한 결과 시게노 슈이치 만화가의 인기 만화 ‘이니셜 D’의 자동차 시리즈를 나란히 내놓는다거나, 차량의 겉면을 만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로 도배를 하는 속칭 ‘이타샤(痛車)’를 시리즈화한다거나 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아오시마와 후지미는 서브컬처 계열에서 지금도 열심히 신제품 라인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타미야, 하세가와에는 미치지 못할 지라도 트렌드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두 라이벌 메이커입니다.
열심히 쫓아가지만 여전히 인지도 부족, 도유샤
마지막으로 소개할 메이커는 1951년 창업한 도유샤(童友社, 동우사)입니다. 한국에서 최근 모형을 접하게 된 분들에게는 생소한 곳인데, 모형을 오래 하고 있던 사람들은 많이들 알고 있죠.
가장 유명한 이 회사의 시리즈는 바로 ‘일본의 성 시리즈’, 그리고 ‘갑주 시리즈’가 되겠습니다. 중세 전국시대의 일본 전국의 유명 성을 1/350 스케일로 축소한 성 시리즈는 나름 구색이 잘 맞춰져 있고 디테일도 괜찮다는 평이고, 갑주 시리즈는 일본 국영 방송 NHK의 대하 드라마의 주인공에 맞춰 신상을 발매하는 등 이슈화도 잘 하고 있습니다.
또 요즘에는 일본 외 해외 프라모델 메이커의 제품들을 수입, 판매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도유샤는 요즘 어떤 식으로 오타쿠 서브컬처 장르에 진입하고 있느냐? 바로 중국 메이커의 오리지널 SF 메카를 수입해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일본의 다양한 모형 메이커 중에서 각 분야 1위인 반다이, 타미야를 제외한 주목할 만한 서브컬처, 오타쿠 장르의 모형을 전개하는 곳들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다음에는 아시아권 모형 메이커들 중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중국의 메이커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글/ 베이더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