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년만에 드러난 한국·노르웨이 불법 입양 실태…“진상규명 이제 시작일 뿐”[인터뷰]

김은송 기자 2026. 9. 1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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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디스 에크하르츠 노르웨이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 공동대표가 지난 8일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어릴 적 거울을 들여다보면 주변 누구와도 닮지 않은 제 모습에 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인생이라는 책에서 가장 중요한 첫 페이지를 누군가 통째로 찢어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비그디스 에크하르츠(54)는 자신의 삶을 ‘첫 페이지가 찢겨 나간 책’에 비유했다. 1972년 한국에서 태어나 생후 11개월 만에 노르웨이로 입양됐다. 그는 노르웨이 해외입양인 단체 ‘노르웨이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NKRG)’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비그디스는 최근 노르웨이 정부의 해외입양 실태 조사 결과 발표에 맞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한국은 노르웨이로 해외 입양된 이들의 최다 출신국이다. 1954년 이후 6700명이 넘는 아동이 보내졌다. 그동안 노르웨이 당국은 불법 입양의 존재를 부정해왔다. 그러나 노르웨이 ‘해외 입양 조사 위원회’는 지난 7월 70여년간의 한국인 해외 입양이 적법성과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해외 입양 책임이 한국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정부에도 있다고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위원회는 2023년 6월 왕실 칙령으로 설치돼 입양 과정의 관리 부실과 불법 행위 여부 등을 조사해왔다.

비그디스는 정부 보고서의 구체적 내용을 짚으며 “입양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직감하고 있었지만, 막상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보니 다행스러운 마음과 함께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노르웨이 정부는 한국 입양기관의 서류를 검증 없이 수용했고, 1990년대 후반까지도 부모 있는 아동이 ‘기아(고아)’로 둔갑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입양 절정기였던 1980년대에는 노르웨이의 한국 입양 알선기관 ‘베르덴스 바른’이 한국 입양기관 ‘홀트아동복지회’에 자금을 대는 대가로, 홀트에서 노르웨이로 한해에 170명이 넘는 아동을 보내기로 합의하는 일도 있었다. 노르웨이 정부는 1985년 베르덴스 바른에 별다른 조사 없이 한국인 입양에 대한 무기한 허가를 내주며 이를 사실상 방관했다.

스무살이 되던 해부터 베르덴스 바른을 통해 자신의 입양 정보를 확인하려 했던 비그디스는 정보 제공 거절 답신만 반복해서 받아야 했다. 비그디스는 “알선 기관들은 ‘친모의 자발적 포기’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며 “홀트는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기록을 사유화한 채 접근을 통제했다”고 말했다.

한국미혼모가족협회와 뿌리의집, 국내입양인연대 등 1970년대 불법 해외 입양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7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불법 해외 입양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2024년 비그디스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낯선 기분이 들면서도 마침내 내가 있어야 할 고국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비그디스는 많은 입양인이 불법 입양과 정체성 혼란에 따른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지만, 국가나 전문기관의 지원 없이 이를 홀로 감당하며 과거의 상처가 다시 불거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입양인들이 진실을 밝혀 나가는 길을 혼자 걷지 않도록 국가 차원의 정서적 지원과 동행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입양인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친부모나 가족의 유전적·의료적 정보를 알지 못하면 갑작스러운 질병이 발생했을 때 의료진조차 적절한 치료법을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그디스는 “1960~1980년대에 입양된 이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수십년을 더 기다릴 시간이 없다”며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회복 조치가 더이상 지체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비그디스는 진상규명과 피해 회복을 위해 한국과 노르웨이 정부가 함께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입양 시스템을 같이 만든 주체로서 노르웨이와 한국 모두 협력에 응해야 한다”며 “두 나라가 서로 자극을 주고 동력을 실어주며, 책임 있게 나아가도록 압박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입양인들이 한국과 인연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 체계도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입양인들의 한국 국적 회복 절차를 적극적으로 돕고,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 등을 마련해 고국과 다시 연결될 수 있게 지원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비그디스는 단순한 과거사 청산을 넘어 미래 세대를 위한 작업이라고도 설명했다. “좋은 부모님을 만난 건 행운이었지만, 노르웨이에서 자라며 훗날 내가 나이가 들면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게 될지조차 상상할 수 없어 문득문득 고립감이 밀려왔습니다. 다음 입양인 세대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한국인이라는 유산과 정체성에 진정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그디스는 지난 7일 진실화해위를 찾아 해외입양인 단체들과 함께 불법 해외입양 사건을 추가로 접수했다. 지난 9일과 10일에는 국회에서 열린 ‘제5회 입양진실의 날 국제컨퍼런스’에 패널로 참여해 양국 정부의 공식 사과와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비그디스 에크하르츠 노르웨이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 공동대표가 지난 8일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 “70년 불법 해외입양 진상 규명하라”…해외입양 피해자들, 진화위 재조사 촉구·상임위원 기피 신청
     https://www.khan.co.kr/article/202609071418001

김은송 기자 ss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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