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 시장이 멈춰 섰다. 세계 TV 출하량은 10년 가까이 2억대 안팎에서 크게 늘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기간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일시적으로 수요가 늘었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팬데믹 이후 TV 시장은 빠르게 냉각됐고 성장 동력을 잃었다.
문제는 시장 정체만이 아니다. TV는 팔리더라도 돈이 되지 않는 사업이 됐다. 패널 가격과 부품 비용은 오르고 있지만 완제품 가격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여기에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까지 겹치면서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지켜온 글로벌 TV 시장 1위 경쟁도 예전만큼 의미를 갖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TV 시장, 10년째 2억대 '정체'

9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TV 출하량은 최근 몇 년 동안 2억대 안팎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들은 올해 TV 출하량을 약 1억9500만대 수준으로 예상한다. 2010년대 후반 2억4000만대에 가까웠던 시장 규모와 비교하면 사실상 성장이 멈춘 상태다.
TV 교체 주기도 눈에 띄게 길어졌다. 과거에는 5~6년 정도 지나면 TV를 새 제품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7~10년까지 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TV 화질과 기능이 이미 일정 수준 이상 올라오면서 소비자들이 제품을 교체해야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처럼 매년 눈에 띄는 기술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점도 교체 수요를 줄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TV 수요가 정체된 상황에서 수익성 확보는 더 어려운 과제가 됐다.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제품 가격은 오히려 하락하는 추세다. 북미 시장에서는 65인치 UHD TV가 400달러 안팎에 판매되는 사례가 흔하다. 일부 온라인 유통 채널에서는 300달러대 제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10년 전 같은 크기의 TV 가격이 1000달러를 훌쩍 넘었던 것과 비교하면 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셈이다.
이처럼 화면은 커지고 기능은 늘었지만 가격은 계속 내려가는 구조가 TV 시장에 굳어지고 있다. 제조사들 사이에서 파격적인 마케팅과 프로모션으로 판매량을 늘려도 수익이 크게 늘지 않는 경험치가 쌓이고 있다.
TV 제조 기술이 표준화되면서 제품 간 차별성도 크지 않다. 패널과 주요 부품이 범용화되면서 TV 제조는 사실상 '조립' 산업에 가까워졌다. 핵심 부품인 LCD 패널은 중국 BOE와 CSOT 같은 업체들이 대규모 생산 능력을 확보하면서 가격이 빠르게 낮아졌다. 제품 차별화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TV 제조사들이 결국 가격 경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가격 경쟁에 중국 추격까지 '점입가경'
중국 업체들의 부상은 이런 변화를 더 가속화하고 있다. TCL과 하이센스는 공격적인 가격 전략과 대형 TV 중심 판매로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들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글로벌 TV 시장 점유율(출하량 기준)은 약 16%, LG전자는 10% 안팎이다. TCL과 하이센스는 각각 10% 안팎까지 올라오며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다. 출하량 기준으로 보면 TCL은 이미 2022년 LG전자를 앞질렀고 하이센스도 이후 LG를 추월하면서 한국 TV 투톱 체제가 무너졌다.
일부 시기에는 TCL이 출하량 기준으로 삼성전자를 제치고 글로벌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프리미엄 TV 시장에서는 여전히 강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중저가 시장에서는 중국 업체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원가 부담도 커지고 있다. TV 제조 원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패널 가격은 최근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여기에 메모리 가격 상승과 물류비 증가까지 겹치면서 제조 비용이 꾸준히 늘고 있다. 특히 TV에 들어가는 메모리 비중은 최근 몇 년 사이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제조사들이 이런 비용 상승을 제품 가격에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장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가격을 올리면 바로 판매량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결국 TV 제조사들은 낮은 마진을 감수하면서 판매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속수무책 쪼그라드는 실적…"세계 1등도 무용지물"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여전히 글로벌 TV 시장 점유율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TV 시장에서 19년 연속 1위를 기록하며 브랜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고 LG전자는 OLED TV를 중심으로 프리미엄 시장에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2500달러 이상 프리미엄 TV 시장에서는 두 회사의 점유율이 80%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장 정체와 경쟁 심화 속에서 '세계 1위 TV'라는 타이틀만으로 사업 경쟁력을 설명하기 어려워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올 초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지난해 연간 성적표를 공개하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실적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TV사업 실적이 생활가전사업과 합산으로 공시되지만 증권가 추정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기준으로 5000억 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전년도인 2024년에만 해도 1조 원 안팎의 이익을 내던 사업이었다. 30조 원대였던 매출 규모도 지난해 20조 원 후반대로 쪼그라든 모습이다.
LG전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지난해 LG전자에서 TV사업을 맡는 HE사업부 매출액이 14조 원을 넘기고도 300억 원대 적자를 본 것으로 나타나 TV사업 수익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물론 지난해 진행한 희망퇴직 등의 영향으로 일회성 비용이 발생하긴 했지만 TV 출하량과 판매량이 꺾인 영향을 무시하긴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이들이 일찌감치 제품과 사업 다각화에 나서 TV 판매 외에도 B2B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디지털 사이니지나 디스플레이 솔루션 사업 등도 병행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TV 제조를 통해 얻는 실적은 더 줄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 같은 모든 지표들이 'TV 산업이 성장 산업에서 성숙 산업으로 넘어가며 기존의 사업 모델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TV 시장이 성장 동력을 잃으면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TV가 더 이상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사업이 아니라면 앞으로 이들이 무엇으로 돈을 벌어야 할지가 TV업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장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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