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신작 시집 낸 박준 시인 “그리려 하지 않고 백지로 뒀다”

고희진 기자 2025. 4. 2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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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의 신작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출간한 박준 시인이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는 누군가를 부르는 일이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2018)는 그리는 일이었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여유가 생겨 시 안에 이미지도 여럿 쓰고 사건도 많이 만들었다. 슬픔의 길을 지나며 들고나온 신작은 속절없이 자신을 짚어볼 뿐이다.
7년 만에 새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창비)로 돌아온 박준 시인(42)을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만났다. 첫번째 시집에서 두번째 시집이 나오기까지 6년, 두번째 시집에서 세번째 시집이 나오기까지 다시 7년이 걸렸다. 과작이라 불릴 만하다.
그는 “나에게 시를 쓸 수 있게 하는 힘은 안녕함, 안온함, 혹은 심심한 지루함이다. 이런 감정들 속에서 시든 좋은 것이든 떠올리는데, 그간 극도의 슬픔에 휩싸여 있었다. 이 같은 감정을 대면하기 싫으니 시를 쓰기 힘들었다”며 “결국 대면해야하는 데 생생한 것을 생생한대로 쓰는 것은 시의 방식이 아니니 이를 삭이고 태워서 가루를 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핏빛(의 감정)이었지만, 이걸 그냥 낭자한 상태로 내보낼 수는 없고, 말리는 과정을 거쳤다”고 말했다.
시인은 지난 몇년간 “여러번 상주가” 되어 “도처에 널린 죽음”을 대면해야 했다. 4부로 나뉜 시집엔 53편의 시와 1편의 산문이 수록됐다. 전반적으로 애도와 슬픔의 정서가 느껴진다.
‘몇해 전 아버지는 자신의 장례식에 절대 부르지 말아야 할 지인의 목록을 미리 적어 나에게 건넨 일이 있었다…빈소 입구에서부터 울음을 터뜨리며 방명록을 쓰던 이들의 이름이 대부분 그 목록에 적혀 있었다’(시 ‘블랙리스트’ 중)
‘생일과 기일이 너무 가깝다. 그간의 일을 삼일 만에 떠나 보내고 세상을 끝낸 풍경의 상가. 조등 하나 걸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것들의 힘은 더 세다. 죽음이 이야기하는 삶은 한결같지만 삶이 이야기하는 죽음은 매번 다르다’(산문 ‘생일과 기일이 너무 가깝다’ 중)
7년 만의 신작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출간한 박준 시인이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감정을 태워 가루를 내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일까, 앞선 두 시집에도 상실과 애도의 정서가 흘렀으나 이번은 좀더 마른 느낌이 든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던 음식도 이번엔 그저 속을 달래는 미음이다. 신간을 두고 예전과 비슷하다는 평과 무언가 달라졌다는 평이 동시에 나오는 이유다.
‘미음을 끓입니다 한 솥 올립니다 회회 저으며 짧게 생각합니다…묽어져야 합니다 고개를 파묻습니다 나는 아직 네게 갈 수 없다 합니다’(시 ‘마음을 미음처럼’ 중)
시인은 “다르게 쓰려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면서도 “눈 앞에 둔 풍경은 여전했다. 하지만 흰 도화지에 무엇인가를 그릴 것인가 고민하는 것과 그냥 백지로 두는 것은 차이가 있다”며 이번 시집은 그냥 둔 쪽이라고 설명했다.
오로지 슬픔만이 담긴 것 같지만 이번 시집을 묶어내며 시의 소중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이것을 누군가에게 말로는 못하겠는데 시로는 말할 수 있구나. 감정을 물을 타고서라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내게는) 시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말해야 사니까. 시가 새삼 소중해졌다”고 말했다.
그의 시집은 여전한 환대를 받고 있지만, 시의 영토는 점점 줄어든다. 사람들이 더 이상 시구를 외우지 않고, 감정을 전달하는 언어를 쓰지 않는 세상은 어쩌면 마중도 배웅도 없는 기다림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는 2020년부터 3년 동안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비교적 젊은 청취자를 대상으로 한 방송이었어요. 어느날 생각해보니 제 방송이 중장년을 대상으로하는 바로 앞 시간대 프로그램보다 더 많은 곡을 내보내고 있더군요. 과거엔 5분 넘는 곡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대부분 3분이에요. 전주와 간주, 후주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마중도 배웅도 없이 바로 가사가 시작하죠. 미디어도 그렇고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그렇습니다. 애도와 복기의 기회가 점점 없어지고 있어요. 인간다움의 깊이를 고민하는 이런 시간이 어디까지 짧아질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합니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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