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억의 의무’ 난징대학살 상기시키는 비극의 현장 [중국 백범 김구 로드를 가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서남쪽으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영정하에 놓여 있는 다리 노구교에서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쪽으로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왔다.
일본은 이 사건을 트집 잡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베이징과 텐진 일대가 일본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그해 8월에는 강남 지역의 거점 도시 상하이로까지 전쟁이 확대되었다. 중화민국 수도였던 난징도 위험해졌다. 난징에 위기가 닥치자, 11월 20일 장제스는 수도 이전을 발표하고, 서쪽의 한구(漢口), 중경(重慶)으로 옮겨갔다. 상하이를 점령한 5만여 명의 일본군은 신속히 진격하여 12월 13일 무방비 상태였던 난징을 접수했다. 노구교 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일본군은 12월 13일 난징을 점령하고 6주 동안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대학살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저항이 거의 없었음에도 투항한 포로뿐만 아니라 피난 가는 무고한 시민들에까지 총격을 가하고, 부녀자를 강간하고, 난징시 대부분을 불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남경의 인구가 60만 명이었는데, 인구의 절반인 30만여 명이 이때 살해되었다.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는 당시 일을 이렇게 적었다.
"일본군은 난징에서만 적어도 42,000명을 학살했다. 대부분 여성과 어린아이로 적어도 10세부터 70세까지의 여자라면 모두 강간당했다. 피난민은 만취한 병사에 의해 총검으로 살해됐다. 대낮의 성행위도 낯선 일이 아니었다. 5만 명이 넘는 이 도시의 군대는 1개월 이상 근세에 전례 없는 강간, 학살, 약탈이란 온갖 음란을 즐겼다."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낱낱이 고발한 최초의 영문 논픽션인 <난징의 강간; The Rape of Nanking>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Iris Chang)이다. 그녀는 본인이 쓴 책이 '두 가지' 잔학 행위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하나는 일본이 수많은 이의 목숨을 빼앗은 '난징대학살' 그 자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이 이 대학살의 기억을 사람들 머릿속에서 지우려 하는 행위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라는 역사 경구를 원고 쓰는 내내 마음 깊이 새겼다는 아이리스 장은 서른여섯 살이던 2004년에 자살하고 말았다. 책 출간 이후 일본 극우세력으로부터 지속적인 협박을 받으며 공포와 우울증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정직하게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하는 일본 극우세력이야말로 아이리스 장 죽음의 궁극적 원인이리라.
아이리스 장이 난징대학살의 진상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 것은 '기억의 의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의무를 잊는다면 대학살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온당히 할 수 없을뿐더러 비극은 늘 되풀이될 수 있다.
군인이 저항 능력이 전혀 없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강간하는 것은 고금의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간의 추악한 면이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의 군대는 남하하여 양저우(양주)에서 저항 의지가 전혀 없는 명나라 유민을 학살했다. 1645년 음력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10일 동안 양저우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왕수초는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를 써서 당시의 참혹한 살해 현장을 전해주고 있다.
왕수초는 야차와 같은 청나라 군대의 살육을 피해 비 오는 지붕 위에서 담요를 덮은 채 밤을 지세웠고, 함께 도망가다가 잡힌 형과 동생이 처형당하는 비명을 들었으며, 공동묘지로 도망가 관 속에 숨어 있던 만삭의 아내는 청군에게 강간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이렇게 10일 동안의 무자비한 살육으로 곳곳에 죽은 시체가 뒹굴었고, 시신들이 운하의 물을 검붉게 물들이며 썩어갔다. 당시 왕수초의 가족 8명 가운데 3명만이 살아남았다. 양저우 전역에서 청군에 의해 살해당한 이는 80만 명 정도 되었다. 왕수초는 본인이 글을 남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먼 곳의 풍문은 기대하지 않는다. 후세 사람으로서 다행히 태평성세에 태어나 평온무사의 즐거움을 누릴 때 스스로 반성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물건을 허술히 여기는 자는 이를 읽고 놀라 두려워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난징대학살기념관
난징에는 난징대학살기념관이 있다. '기억의 의무'를 상기시켜 주는 공간이다. 이곳을 개관한 1985년 8월 15일은 항일전쟁 승리 40주년이 되는 때였다. 기념관 설립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1982년에 벌어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이다. 중국 '침략'을 '진입'으로 서술하는 등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이 중국인의 분노를 자아냈고, 그 결과 기념관 설립이 추진되었다.
난징대학살기념관 입구에는 '1937. 12. 13 ~ 1938. 1'이라는 날짜가 새겨진 십자탑이 서 있다. 탑의 높이는 12.13m, 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한 날을 의미한다. 세 개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다섯 개의 타원형은 죽은 영혼 30만을 뜻한다. 박물관 내부 뜰에 있는 수많은 조약돌은 30만 명의 영혼과 뼈를 의미하며, 몇 미터 간격으로 놓여 있는 바위는 16곳의 학살지를 나타낸다. 기념관 내부에는 남경대학살 당시의 각종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유리벽 안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1만여 명분의 유골이 어지럽게 쌓여 있다.
30만! 난징대학살기념관 곳곳에서는 '30만'이라는 희생자 수를 환기한다. 일본이 난징을 침략했을 당시 많은 수의 난징 시민은 이미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 남은 50만 명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였다.
이들을 상대로 일본군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잔혹한 방법으로 살인과 강간을 저질렀다. 12월 13일은 난징대학살로 희생된 30만 명의 넋을 기리는 국가추모일이다. 이날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으로 추모하기 시작한 2014년에 중국 정부는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를 위안부 자료와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자 신청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은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능가하는 비극의 역사, 1937년 12월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 범죄인 난징대학살을 고발하는 기념관이다. 731부대의 생체실험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중국에서 벌인 끔찍한 만행으로 손꼽힌다. 중국 측 통계에 따르면 난징에서는 40일 사이에 30만 명의 중국인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숫자에 대해 일본 정부는 지나치게 부풀려진 것이라고 중국 측에 항의하고 있으나 기념관 진일보 상의 벽면에는 여전히 '희생자 300,000'이라는 문구가 크게 조각되어 있다.
기념관은 양민 학살이 자행된 만인갱 구덩이 위에 건립되어 있으며 움푹 팬 형태를 띠고 있다. 1985년 지어졌으며 1995년 증축 작업이 진행되었다. 2007년 12월에는 난징대학살 70주년에 맞춰 18개월간의 보수와 정비 작업을 마치고 기념관을 확장 개관했다.
기념관 내에는 크게 3개의 전시실로 나뉘어 있다. 강동문 학살지에서 발견된 유골을 모아놓은 기념실, 일본군 만행 전시실과 일본 군국주의 침략사 전시실이다. 이곳에 3,500여 점의 사진과 3,300여 점의 자료를 전시해 놓았는데, 학살 증거 사료와 사진, 영상, 사용된 무기, 관련 모형, 당시 일본군들의 일기, 당시 난징에 거주했던 외국인들의 기록까지 꼼꼼히 전시해 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