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후무…‘데뷔 첫 타석 대타 초구 끝내기 만루홈런’의 전설

[이재국의 베팬알백] ⑧다시 없을 진기록…2001년 송원국의 만루홈런에 관하여

2001년 데뷔 첫 타석 대타 초구 끝내기 만루홈런을 날린 송원국 ⓒ두산베어스

한화 송진우는 6월 3일 청주 LG전에서 KBO 역사상 최초로 투수 대타 끝내기 안타를 날려 화제를 모았다. 7-7 동점 1사 2·3루 찬스에서 외국인투수 브라이언 워렌 타석에서 대타로 나온 송진우는 LG 마무리투수 신윤호를 상대로 극적인 끝내기 우전 안타를 쳐냈다. 전문 투수가 대타로 나서 끝내기 안타를 친 것은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20일 후. 이번엔 만화에서나 볼 법한 더 대단한 대타 홈런이 나왔다. 어쩌면 KBO 역사상 다시는 없을 진기록 중의 진기록.

‘데뷔 첫 타석 9회말 2사 만루 대타 초구 끝내기 만루홈런’은 우리가 2001년 추억의 우물을 길어 올릴 때 빠뜨릴 수 없는 진귀한 역사다.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8번째 주제는 2001년 6월 23일 밤에 터진 두산 베어스 송원국의 데뷔전 대타 홈런 이야기다.

1998년 2차 1라운드에 지명한 유망주 내야수 송원국 ⓒ두산베어스

◆꿈같은 일? 낮잠 자다가 4년 만에 데뷔 첫 1군행 통보

송원국은 곤히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천에서 잠실로 이동하는 구단 버스 안이었다. 2군경기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히 움직이며 훈련을 한 뒤 초여름 낮에 경기까지 치렀으니 잠이 쏟아질 수밖에.

“어이~. 송원국!”

잠결에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손상대 2군 감독이었다.

“지금 바로 1군에 합류해라.”

잠에서 막 깨어난 송원국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싶었다. 1998년 신인드래프트 2차 1라운드 지명된 유망주 내야수. 그러나 입단 후 3년 반 동안 1군 콜업이 한 번도 없었으니 1군행 통보가 꿈만 같았다.

광주일고 시절 송원국은 동료들과 황금의 내야진을 구축했다. 1979년생인 1루수 최희섭, 2루수 송원국, 유격수 이현곤. 여기에 1년 후배 정성훈이 천부적인 자질로 3루수로 자리했다. 이런 천재 선수들 사이에서 송원국은 장타력이 있는 우투좌타 2루수로 주목을 받았다(BK 김병현은 빠른 1979년생으로 1년 선배였다).

두산에 입단하자마자 루키로서 창원 스프링캠프(당시 IMF 여파로 국내에서 스프링캠프를 소화함)에 초대했을 정도로 구단에서도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수비훈련 도중 송구를 하는데 팔꿈치가 찌릿찌릿 저려 왔다. 결국 팔꿈치 수술을 해야만 했다.

재활 후 야구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간염까지 발생했다. 1군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자신의 포지션인 2루수 자리엔 안경현이 주전으로 도약해 있었고, 1999년 한화에서 트레이드로 영입된 홍원기가 내야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하고 있었다.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고 길어지는 2군 생활. 송원국은 방황했다. “야구 그만두겠다”며 몇 차례나 팀을 떠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당시 김정균 2군 매니저(현 구장관리팀장)가 집까지 찾아가서 다시 데려와 야구를 시켰다.

“다시 이천에 갔더니 우경하 2군 타격코치님이 ‘딱 1년 반만 열심히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안 되면 그만둬도 된다'면서요.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정말 열심히 훈련을 해봤어요. 반 년 정도 흘렀을까? 2군에서 야구가 좀 되더라고요. 그리고 그날 버스 안에서 1군행 통보를 받은 거죠.”

송원국(현 안산공고 감독)은 김동주의 부상으로 생애 처음 1군에 콜업돼 엔트리에 등록된 2001년 6월 23일(토요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처음엔 꿈인가 했어요. 솔직히 장난치시는 줄 알았죠. 그런데 진짜더라구요. 구단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잠실구장 안으로 들어갔어요. 당시 여름이라 야간경기(오후 6시30분 시작)를 할 때였는데 곧바로 1군 경기 준비를 했죠.”

그런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진짜 동화 같은 이야기는 그 뒤에 기다리고 있었다.

두산 김동주가 2001년 6월 23일 부상으로 빠지면서 송원국은 입단 4년 만에 1군 무대에 데뷔하게 됐다. ⓒ두산베어스

◆ 9회말 2사 만루 "대타 송원국"…김인식 감독의 호출

SK 김희걸과 두산 이광우의 선발 맞대결로 펼쳐진 그날 경기는 초반부터 난타전으로 전개됐다. SK가 1회초 2점을 먼저 뽑았다. 2회초 '철인' 최태원의 2점홈런까지 터지면서 경기 초반 SK가 4-0으로 앞서나갔다. 두산은 2회말 곧바로 5번타자 최훈재의 적시 2루타와 상대 실책 등으로 3점을 뽑아내 1점차로 따라붙었다.

6회말 1사 1·3루서 6번타자 안경현의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4-4 동점, 7회말 2사 만루서 4번타자 심재학의 2타점 좌중간 적시타로 6-4로 역전에 성공했다. 그러나 구원 나온 박명환이 8회초 1점을 내줬다. 9회초 무사 무사 2·3루서 SK 4번타자 이호준의 유격수 땅볼 때 6-6 동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어진 9회말. SK 마운드에는 6회 무사 1루서 등판한 좌완 오상민이 껌을 쫙쫙 씹어가며 계속 던지고 있었다. 선두타자인 9번 김민호가 좌익수 뜬공으로 물러났다. 1번타자 정수근도 헛스윙 삼진. 2아웃이 되면서 승부는 연장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여기서 2번타자 장원진이 좌전안타를 치고 나갔다. 1루 대주자로 김원섭(2003년 KIA로 트레이드된 뒤 ‘명품다리’ 응원가로 거듭난 선수)이 들어갔다.

3번타자 타이론 우즈 타석. SK 강병철 감독은 투수 교체를 지시했다. 좌완 오상민을 내리고 ‘어린왕자’ 김원형(현 SSG 감독)을 세운 것. 우즈가 중전안타를 때리면서 2사 1·3루로 돌변했다. 여기서 SK는 4번타자 심재학을 고의4구로 걸렀다. 2사 만루가 됐다.

5번타자는 강봉규. 이날 선발출장한 최훈재 자리에 6회말 대타로 나서 2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그 순간 두산 김인식 감독이 움직였다. 저 멀리 더그아웃 의자에 앉아있는 누군가를 향해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대타감을 급하게 찾는 듯했다. 송원국은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부를 줄은 몰랐다.

옆에서 누군가가 “야! 송원국~! 감독님이 부르시잖아”라며 소리쳤다. 1군에 처음 올라온 4년차 중고 신인. 송원국은 깜짝 놀라서 감독 앞으로 뛰어갔다.

두산 베어스 김인식 감독 ⓒ두산베어스

◆ 김원형의 초구 받아쳐 만든 대역사

“직구만 쳐~.”

김인식 감독은 자신 앞에 달려온 송원국에게 딱 한마디만 했다. 대타로 나가라는 의미였다. 데뷔 첫 타석인데 6-6 동점에 2사 만루 찬스. 어떻게 보면 신인이 견뎌내기엔 가혹한 상황. 선수로서는 여기서 뭔가 보여주지 못하면 또다시 2군행 통보를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부랴부랴 자신의 방망이를 찾는 송원국에게 베테랑 김호가 방망이 한 자루를 건넸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배트였다.

“일본 유명 브랜드 제품이었어요. 근데 엄청 무겁더라고요. 저는 평소 가벼운 방망이를 사용하는데 손에 잡히는 느낌이 900g은 족히 넘을 것 같았어요.”

송재박 코치는 긴장한 표정으로 타석으로 향하는 송원국을 불러 귓속말을 했다.

“직구 하나만 노려쳐라. 변화구는 보지 말고.”

김인식 감독과 같은 얘기였다. 데뷔 첫 타석인데 이것저것 복잡하게 계산하지 말고 자신 있게 직구 하나만 공략하라는 의미였다. 송원국도 속으로 '여기서 2군에 내려가도 여한이 없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재일교포 송재박 타격코치 ⓒ두산베어스

김원형의 초구가 날아들었다. 바깥쪽 직구를 노리고 있었는데 몸쪽으로 왔다. 송원국은 무의식 중에 배트를 돌렸다.

타구는 맞는 순간 외야 담장을 향해 쭉쭉 뻗어갔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은 오른쪽 외야 관중석 중단에 떨어졌다. 끝내기 만루홈런! 그것뿐이랴. 하나만 붙어도 대단한 수식어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데뷔전 첫 타석 9회말 2사 만루 대타 초구 끝내기 만루홈런!’

1982년 백인천의 4할 타율(0.412), 1983년 장명부의 30승, 1984년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 선동열의 3차례 0점대 평균자책점(1986년 0.99, 1987년 0.89, 1993년 0.78) 등 KBO리그 역사에는 몇 가지 ‘불멸의 대기록’이 있지만, 송원국의 이 기록 역시 다시는 보기 힘든 ‘불멸의 진기록’이 될 게 분명하다.

데뷔전 첫 타석 홈런도 흔치 않은 일인데 9회말 2사 만루라는 상황, 여기서 대타로 나와 끝내기 홈런을, 그것도 만루홈런을, 게다가 초구에 때린다는 것 자체가 다시는 충족되기 힘든 조건들의 조합이다.

무아지경으로 달려가던 송원국은 1루 앞에서 홈런을 확인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들고 환호했다. 두산의 모든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날 SK를 10-6으로 이기며 4연패에서 벗어났던 두산은 이 경기의 승리로 동력을 얻어 7연승(1무 포함)을 달리며 3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솔직히 그때 어떻게 쳤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라운드를 돌 때 무슨 제스처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어요. 모든 게 꿈인 것 같았어요. 홈에 들어올 때 실감을 했죠. (심)재학이 형, (안)경현이 형, 타이론 우즈 등 모든 선수들이 달려와서 저를 때리면서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가족들에게 1군 올라간다는 소식을 급하게 전했는데 어머니, 삼촌, 동생 등 가족들도 다 잠실구장으로 와서 경기를 봤어요. 엄마가 많이 우셨어요.”

2002년 한화전에서 생애 두 번째 대타 만루홈런을 친 송원국이 동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두산베어스

◆ 기억하기 싫은 끔찍한 교통사고

“그동안 감독을 하면서 많은 경기를 했기 때문에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황도 많지만, 그 경기 그 장면은 기억에 오래 남아."

김인식 전 감독은 ‘송원국’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곧바로 2001년 6월의 뜨거웠던 밤을 기억해 냈다.

"송원국이 치는 걸 보니까 잘 맞히고 한 방이 있더라고. 그래서 거기서 대타를 냈지. 그 친구 타격은 소질이 있었어. 사고가 나서 그렇게 됐지만….”

김인식 전 감독은 그러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김 감독이 말한 ‘사고’란 바로 2002년 8월 9일 아침의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일컫는다.

당시 송원국은 친구 사이였던 외야수 유재웅과 함께 승용차를 몰고 잠실야구장으로 가다가 송파구 풍납동 올림픽대로에서 차가 뒤집히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송원국은 왼다리가 차에 끼이는 바람에 왼쪽 무릎인대를 크게 다쳤다. 전방과 후방 십자인대는 물론, 외측과 내측 인대까지 완전히 다 끊어졌다.

국내 몇몇 병원에서 검진한 결과 “수술을 하더라도 평생 다리를 절고 살아야 한다”는 소견이 나왔다. 그래서 독일로 날아갔다.

“무릎 수술의 최고 권위자에게 수술을 받았어요. 재활을 통해 걷기까지는 했지만 다시 선수 생활을 하기는 어렵더라고요. 결국 야구를 그만뒀죠. 지금은 걸을 수는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아서 불편하기도 해요. 가끔 빠지기도 하고. 평생 안고 살아가야죠.”

은퇴 후 자동차 딜러도 해보고 PC방 등 사업도 해봤다. 그러다 아들이 생기면서 다시 야구로 돌아왔다. 2017년 홍익대 장채근 감독 밑에서 코치를 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18년 모교 광주일고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는 2019년부터 안산공고 감독을 맡아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안산공고라면 SSG 김광현, 두산 정철원 등을 배출한 학교. 그동안 주로 야구 변방에 머물러 있던 안산공고였지만 송 감독 부임 후 2022년 이마트배와 대통령배에서 연이어 4강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켰다.

“교통사고는 기억하기도 싫죠. 제 삶이 완전히 달라졌으니까요. 그래도 이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만약 그때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그 후에 더 큰 사고가 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지도자가 되고 나서 이제는 제가 경험했던 것들을 제자들에게 얘기도 해주고 있어요.”

송원국의 호쾌한 타격 모습 ⓒ두산베어스

◆ 짧았던 영광…그러나 뼛속까지 ‘두산맨’

우리가 송원국을 떠올릴 때 대부분 ‘데뷔 타석 9회말 2사 만루 대타 초구 끝내기 만루홈런’만 기억한다. 그러나 한번만 반짝한 게 아니었다. 짧은 프로 생활이었지만 그날 외에도 임팩트 있는 장면을 종종 연출했다.

그해 8월 8일 잠실 현대전에서 송원국은 5-5 동점이던 9회말 2사 2·3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날렸다. 그러면서 ‘9회말의 사나이’로 불렸고, 유난히 찬스에 강한 이미지를 심어주면서 2001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포함됐다.

2002년 5월 22일 잠실 한화전에서는 7회말 정수근 타석 때 대타로 들어서서 또 만루홈런을 터뜨리면서 ‘대타 만루홈런의 사나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대타 만루홈런을 두 번이나 기록한 것은 빙그레 전대영, 롯데 임수혁(작고)에 이어 역대 3번째였다. 지금까지 기간을 확대해도 역대 8명만이 2차례 대타 만루홈런 진기록을 수립했다.

무엇보다 대타 끝내기 만루홈런은 쉽게 볼 수 없는 진기록 중의 진기록. KBO 역사에서 송원국이 최초였다.  이후 16년이나 지난 2017년 넥센 이택근(5월 18일 고척 한화전)이 역대 두 번째로 기록했을 뿐이다. 여기에 데뷔전이나 초구 등의 조건이 들어가면 송원국이 유일하다.

송원국은 2001년 36경기에서 타율 0.235(81타수 19안타) 3홈런, 15타점을 기록했다. 2002년에는 8월에 사고가 나기 전까지 3할대 타율(0.308)에 3홈런 13타점을 곁들였다.

송원국은 1군 활약상만 따지면 팬들에게 채 두 시즌도 보여주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었다. 짧았던 영광 뒤로 긴 여운을 남긴 선수. 송원국은 두산 팬들에게 아픈 손가락으로 기억되고 있다. 송원국도 두산을 잊지 못한다.

“두산에서 뛰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저는 두산 유니폼만 입었던 선수입니다. 사람들이 대타 만루홈런만 기억하는데 한국시리즈도 경험해봤고, 해볼 건 다 해봤어요. 당시 저를 도와주신 프런트 분들이 아직 두산에 많이 계세요. 김태룡 단장님은 당시 매니저셨고, 제가 야구 그만두고 방황할 때 잡아주셨던 김정균 매니저님은 지금 팀장으로 계시잖아요. 아직도 저를 기억해주시는 두산 팬들도 많더라고요. 두산은 그런 끈끈함이 있어 좋아요. 그래서 저는 요즘에도 프로야구를 보면서 늘 두산을 응원한답니다. 전 뼛속까지 두산맨입니다.”

PS) 키움 히어로즈 투수 김재웅이 송원국 감독의 외사촌 동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김재웅은 1998년생. 송원국(1979년생)과는 19살 차이다. 프로 데뷔전에서 대타 초구 끝내기 만루홈런을 쳤을 때 김재웅은 세 살이었다. 송 감독은 “재웅이가 이제 저보다 훨씬 유명해졌어요. 우리 집안에서 스타가 한 명 나왔어요”라며 사촌 동생을 자랑하며 웃었다.

송원국은 "두산에서 뛰었던 시간은 짧았지만 난 뼛속까지 두산맨"이라고 했다. ⓒ두산베어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OBS라디오 프로야구 해설위원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