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기 힘든 '먼길' 배웅… '원정 화장' 동행기
[작별의 순간, 시작되는 배회·(上)]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박석천씨
경기동북부 전역에 화장장 없고
그나마 가까운 성남·춘천은 마감
75㎞ 거리 인천에 '운좋게' 배정
유골함 건네받은 후 다시 양주로
가족을 떠나보낸 순간 유족은 배회(徘徊)를 시작한다. 애도할 겨를도 없이 선착순 접수법부터 먼저 숙지해야 한다. 수십, 수백㎞로 예정된 '원정화장' 여정을 최대한 단축하는 것이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고인에 대한 마지막 예우다.
2022년 기준 경기도 시신 2만6천구가 화장장을 찾지 못해 경기도 바깥을 떠돌았다. 이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이 땅에 발을 디딘 당신의 미래이자 가족의 현재 이야기다. 지난달 22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박석천(64)씨의 발인 여정을 쫓았다. → 그래픽 참조·관련기사 3면·편집자 주
6월22일 오전 10시께. 잿빛 아침녘부터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쳤다. 석천의 검은 양복 바짓자락과 양말은 흥건히 젖었다. 깨끗이 씻긴 아내 명희(가명·향년 64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작은 흠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앞선다. 영안실로 들어오니 명희가 누운 관이 들어올려졌다. 장의(葬儀)버스까지 고작 5m 남짓, 그조차 행여 빗물이나 튀진 않을까 눈을 떼지 못한다. 아들이 든 영정까지 차량에 오르고 나서야 석천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버스 맨 앞자리에 털썩 앉은 석천은 허공을 바라봤다. 눈시울이 잠시 붉어지다 이내 얼굴을 부비고 시선을 앞 유리창으로 돌렸다. 양주에서 인천으로 75㎞, 다시 인천에서 양주로 도합 150㎞를 종일 내달려야 한다. 뒷자리에 앉은 유족들은 상주 석천을 바라보지만, 그는 슬퍼할 여력조차 없었다.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정오께. 양주장례문화원에서 2시간을 달려 인천가족공원 승화원에 도착했다. 230석을 가득 채운 로비는 마치 넓은 대기실과 같았다. 이곳에는 인천 외에 다른 지역에서 온 유족들도 한데 모여있었다. 석천도 그랬다. 양주는 물론 경기동북부 전역에 화장장은 없고, 그나마 가까운 성남과 춘천은 이미 마감됐다. 멀게는 강원도 인제나 속초까지 고려했던 차에, 마침 인천에 자리가 남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운이 좋았다'는 빈소 관계자의 귀띔은 과언이 아니었다.
오후 1시께. 예정된 시간이 됐다. 접수증을 작성하고 7번째 화장 차수를 배정받았다. 관 9개가 순서대로 화장로로 옮겨졌다. 하나둘씩 관이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희의 관도 모습을 드러냈다. '대기중' 표식은 하나씩 '화장중'으로 바뀌었다. 아홉 가족의 통곡 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여운이 가시기도 전 다른 직원이 석천을 찾아왔다. 다시 2시간을 대기해야 한다는 안내다. 접수부터 화장까지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낯선 타지에서 작별은 찰나에 불과했다.
오후 3시30분께. 피로감에 눈이 감길 즈음 석천은 명희의 유골함을 건네받았다. 아직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75㎞를 달려 장지로 가야 한다. 출발하는 버스 창밖을 내다보다 생각에 잠겼다. 왜 하필 인천일까.
부부는 공교롭게도 40여년 전 각각 양주와 의정부에서 인천 소재 대학으로 통학하던 길에 우연히 만나 연을 맺었다. 졸업 직후 석천의 고향인 양주에 가정을 꾸렸으나, 인천은 두 사람에게 줄곧 애틋한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제는 어스름한 빗길과 통곡소리가 먼저 떠오를 것만 같다. 오가는 길이 이토록 멀고도 피로한 줄을 명희를 보내고서야 깨닫는다.
오후 6시께. 명희의 유골함이 납골묘 속으로 들어갔다. 기어코 발인이 끝났다. 8시간가량 배회하다 도착한 최종 장지는 출발한 장례식장에서 불과 2㎞ 떨어진 곳이었다. 녹초가 된 석천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꼬박 8년 동안 신장 투석 치료로 고통받던 명희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영안실을 나오고도 수시간을 배회한 명희가 자신처럼 지쳐버리진 않았을까. 영면에 드는 순간마저 편치 못했던 건 아닐까. 헝클어진 머리 물기를 털어내며 석천은 장지를 빠져나갔다.
/김산·목은수기자 woo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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