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길을 걸으며] [10] 빌린 책 속의 연애편지
아침의 도서관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책으로 가득한 성으로 걸어 들어갈 때, 오늘은 또 어떤 운명이 날 기다릴까 하는 기대로 마음이 부푼다. 빌리고 싶은 책은 한두 권 정해 가지만, 서가를 걷다 보면 꼭 예기치 못한 만남이 성사되고는 한다. 어, 이 제목 흥미롭네. 이 작가는 처음 보네, 하고 펼쳤다가 자석처럼 그 책이 마음에 붙는다. 그런데 그날 내 마음에 붙은 건 책이 아니라 편지였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띄운 연애편지.

새해에 빌려 읽고 싶은 책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였다. 문학실로 들어가 세계 문학 전집을 모아둔 책꽂이에서 책을 찾는데, 그 옆에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책인데, 희곡? “당신이 이 시간에 이런 동네를 돌아다니는 이유는 당신이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난 그걸 당신에게 제공해 줄 수 있지요.” 이런 첫 문장이라니. 맘에 들어. 휘리릭 넘기는데 책 중앙에 낯선 편지가 끼어 있었다. 저런, 누가 잊고 책을 반납했구나. 여러분이라면 이 편지, 어떻게 할까? 읽을까, 버릴까, 태울까.

나는 읽었다. ‘내리막길을 씩씩하게 우다다 뛰어서 너에게 안긴 날의 모습을 네가 기억하는 것처럼 나도 그 순간의 너를 봤고, 기억하고 있어.’ 아, 내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지. 타인의 편지가 내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하여 전율했다. 예술이란 이런 것일까? 결국 예정에 없던 이 책을 빌렸다. 편지와 함께. 책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추억이란 사람이 발가벗겨졌을 때조차 꼭 지니는 비밀 무기랍니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한 기억, 수십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추억, 인간은 그런 것들로 산다.
혹시 이 아름다운 편지의 주인이 이 글을 본다면, 제게 연락해 주세요. 저는 태울 수도,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당신이 나타날 때까지 간직하겠습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또 봐도 재밌다”… ‘왕사남’ 관객 100명 중 8명은 ‘N차 관람’
- 3월 서울 아파트 상승 거래 비율, 작년 8월 이후 최저… 강남권서 크게 줄어
- [속보] 경찰, ‘현금 살포 의혹’ 김관영 전북지사 압수수색
- “은행 자금 촘촘히 뒤섞여…사모 대출엔 거대한 ‘정보 공백’이 있다”
- 이진숙 “기차는 떠났다. 대구 바꾸라는 것이 민심”… ‘보궐 출마해 달라’ 장동혁 제안 거절
- 고용 호조·중앙은행 엑소더스 겹악재… 수급 불균형 늪 빠진 미 국채
- 60만원대 美 브랜드 못지 않아, 국내 개발 거리측정기 10만원대 초특가
- 나이들면 꼭 필요한 단백질, 속 안 좋아 고기 못 먹는 엄마 위해 기자가 고른 것
- 서울 생애 최초 아파트 구매 1위 ‘강서구’...2위는 노원
- 한국 아이돌에 택시기사가 ‘바가지’… 필리핀, 정부까지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