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생각하는 갈대
동물의 행동은 생각이 개입하는 정도에 따라 몇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단순한 것이 반사(reflex)다. 반사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고정된 행동다.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슬개골 밑을 해머로 톡 쳤을 때 무릎을 펼치는 반사(심부건 반사, deep tendon reflex)가 대표적이다. 이 반응에는 뇌나 생각이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더 복잡한 반사도 있다. 신생아의 뺨에 부드러운 물체를 갖다 대면 아기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엄마 젖꼭지를 찾는 반응이다(먹이찾기 반사, rooting reflex). 이 반사에는 뇌가 관여하지만, 생각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출생시 뇌 회로에 새겨진 자동적인 행동이다.
조금 더 복잡한 것이 본능(instinct)이다. 반사보다 복잡하고 조직화되어 있지만 역시 고정된 행동 양식으로, 진화의 과정에서 획득되어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것이다. 생존필수적 욕구를 수행하는 먹기, 마시기 및 공격-방어 행동 등이 본능에 속한다. 본능적 욕구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욕구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고려해서 본능적 행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학생들은 배가 고파도 수업 중에는 밥을 먹지 않는다. 즉 본능적 행위의 집행에는 나의 판단(생각)이 관여한다.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다. 물병에 입을 댈 때마다 전기충격을 받는 학습을 하면, 실험실 쥐는 목이 말라도 물병에 입을 잘 대지 않는다.
더 높은 수준의 행동은 자발적 행동이다. 프로그램을 따르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추구할지를 내가 생각해서 결정하는 창의적인 행동을 포함한다. 다른 동물에서도 본능이 아닌 창의적 행동은 있지만, 그 깊이와 범위에서 인간을 필적할 종은 없다. 인류가 문명을 만들어낸 것은 이런 행동에 기인한다. 생각하고 판단해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문명을 갖춘 인류의 기본적인 행동 양식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 했다.
그런데 우리가 행동하기 위해 생각을 사용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징후가 보인다. 판단 없이 반사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자극에 반응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영장류 진화 이전의 행동 양식이 재등장하고 있다.

패스트 지식
사람들은 생각하고 판단하는 행동 양식을 버렸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집밥이 아닌 패스트푸드가 주식이 되어버린 것과 같다. 패스트푸드는 쉽게 구할 수 있고, 먹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고, 무엇보다 맛있다. 그러나 누구도 패스트푸드를 천천히 음미하지는 않는다.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패스트 지식도 이런 특징을 갖는다. 휴대폰에서 유튜브를 접속하면 수십 초 내에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이 지식은 짧고 단순하다. 너무 명료해서 차근차근 되씹어볼 필요도 없다. 패스트 지식에 익숙해지면서 어떤 정보를 접했을 때 깊이 생각한 뒤 받아들이는 행동 양식은 이전 시대의 낡은 관습이 되어버린 것 같다.
많은 정보를 쉽게 얻게 된 문화적 환경이 이와 관계될 것이다. TV가 우리의 저녁 시간을 차지하던 시대에 지식인들이 TV에 붙인 별명은 “바보상자”였다. 언어(신문-책의 문자나 라디오-강의의 이야기)를 통하지 않고 시각 자극을 위주로 전달되는 정보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떨어뜨려서 결국 바보로 만들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 후 등장한 인터넷은 이전 시대와는 차원이 다르게 정보의 양을 늘렸다. 특히 인터넷이 모바일 동영상 위주가 되면서 생긴 변화는 TV의 등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맵고 짠, 열량 높은 지식들
정보가 개인에 맞춤으로 전달되는 것은 TV와 인터넷 동영상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인터넷은 극도의 편식을 조장한다. 음식에 다시 비유하자면, TV는 여러가지 음식(상당수가 정크푸드지만)이 차려진 뷔페인 반면, 인터넷 동영상은 우리 집 냉장고에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와 콜라만 가득 차 있는 것과 같다. 한 접시가 담고 있는 정보의 양도 다르다. TV 프로그램은 대개 수십분이므로 어떤 주제의 흐름을 간략하게라도 보여줄 수 있는 반면, 인터넷 동영상은 몇분 내에 결판을 내야 살아남는다. 먹거리들은 딱 한입만큼의 크기로 제공된다. 그래서 한번에 여러 개 먹어치울 수 있다. 종류는 몇 가지 없지만 양은 무한정 많다. 너무 많기 때문에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을 여유가 없다. 개개의 먹거리가 천천히 음미할 만큼 특별한 맛을 갖는 것도 아니다. 똑 같은 맛의 음식을 한꺼번에 여러 개 허겁지겁 뱃속에(머릿속에) 채워넣기 바쁘다.
지식의 상품화, 수많은 공급자들이 정보 또는 지식을 시장에서 팔기 위해 경쟁하는 것도 지식 패스트푸드화의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클릭수와 구독에 자신의 생존을 걸고 있는 많은 정보 제공자들과 인플루언서에게는 구독자가 “생각을 음미하느라 클릭을 않는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그래서 생각 없이 반응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인터넷에 제시되는 내용은 제목부터가 자극적이어야 한다. 패스트푸드 중에서도 극단적 매운맛을 내세우는 것이 인기 있는 것과 같다. 매운 맛은 그 자체로 잠깐 혀를 얼얼하게 하지만 음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패스트푸드를 통해 섭취하는 것이 영양이 아닌 열량이다. 열량만으로는 건강한 신체를 가질 수 없다. 패스트 지식을 통해 섭취하는 것은 조직된 지식이 아닌 산만하고 편향된 정보에 불과하다. 정보만으로는 건강한 정신을 가질 수 없다.
당장은 아무런 문제없이 박식하고 총명한 사람으로 살 수도 있을 것이지만 정신적인 면역력, 회복탄력성이 떨어질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신이 이미 가진 것과 다른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었을 때 그것에 대해 판단하고 자신의 지식에 동화시킬 능력은 부족하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화해서 그에게 공감하거나 그를 설득하는 능력도 부족하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대화가 사라지고 일방적 주장과 적대행동만 남은 “갈등사회”가 생겨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패스트 지식을 먹고 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신을 위한 건강식
의학정보는 패스트 지식으로 가공되어서 전달된다. 청년들은 유튜브에서 읊어대는 “성인 ADHD의 증상”을 자신에게 한번 적용시켜보고 즉흥적으로 자신이 ADHD라는 진단을 내리고 만병통치약 콘서타(유명한 ADHD 치료제)를 처방받으러 병원에 온다. “자신을 병든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내가 가진 지식은 “이런 행동 = ADHD” 라는, 태클 걸 여지가 전혀 없는 단순 명료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이야기는 특종 뉴스가 되어 인터넷에 떠돈다. 뉴스가 제시하는 근거는 또다른 근거 없는 뉴스다. 이 불량식품은 '선동'이라는 매운 양념을 발라서 출시된다. 구독자는 매운맛에 취할 뿐 그 음식의 재료가 무엇이며 제대로 요리되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이 없어진 사회가 지속될 수 있을까?
종교적 미망에서 벗어나 합리성이 인류를 이끄는 힘이 되리라는 계몽주의 시대의 기대는 어긋났다(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몰상식과 막무가내가 계몽이라 주장되었던 바도 있다). 미신과 주술이 판치는 어두운 시대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물론 신중한 사고와 합리적 판단력만이 우리 삶을 이끄는 가치여야 한다는 생각이 편협한 것일 수도 있다. 포스트모던 운동은 전통적인 합리성의 가치를 부정하고 감각과 부조리를 가치로 추구하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은 기존의 지식 체계에 대한 비판을 담은 작업이었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주위에 널려 있는 감각 자극에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맡기는 움직임은 아니었을 것이다. 창조를 위한 파괴였지 가치의 포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패스트 지식 사회에는 자극 이외의 어떤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지하철에서 책 읽을 수 있을까
문명을 이루었던 사회가 생각이 없어진 사회로 퇴행하는 것은 인류가 처음으로 겪는 일일 것이다. 향후 이런 흐름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 퇴행이 더 심해져서 “첨단 기계를 사용하는 영장류”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희망적으로, 사람들이 반사적 감각 추구에 싫증을 느끼면 천천히 깊이 생각하는 행동 양식이 재등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패스트 지식 중독에서 벗어나 슬로우 지식을 추구하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슬로우 푸드가 건강에 좋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에게 더 가까운 것은 패스트푸드다. “슬로우 지식의 삶”을 지원하는 새로운 서비스(?)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슬로우 지식은 싼 값에 대량 공급되는 패스트 지식과 견주어 시장 경쟁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셰프의 명품 요리가 아무나 접할 수 없는 사치품이듯이, 맛있는 사고를 음미하며 사는 삶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지적인 사치품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사치품을 누릴 여유를 가지려면 현실세계에서는 패스트 지식을 열심히 섭취해야만 할 수도 있다. “명품 슬로우 지식의 대중화”를 내걸고 실제로는 조악한 패스트 지식이 팔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패스트 지식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첨단 슬로우 지식의 새로운 플랫폼”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우리가 해왔던 평범한 생활이다. 멋있는 슬로우 지식 레스토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집에서 고등어 구이와 김치 반찬으로 집밥 한끼 먹는 것이다. 동영상을 시청하고 댓글을 달고 채팅하는 것이 아닌, 책(자기계발서 아닌 진짜 책) 읽고 글(클릭수 유발하기 위한 글이 아닌 나를 돌아보고 다듬는 글) 쓰고 친구들과 대화(일상생활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교류)하는 것이다.
이 평범함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 삶은 달라졌다. 모든 사람이 폰 화면에 코를 박고 있는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은 신기하게 보일 정도가 되었다. 우리는 다시 소박하게 생각하면서 사는 진짜 문명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까?
※ 강웅구는 1988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수련을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뇌의 유전자 발현 이상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정신질환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대표저서로 <정신병리학 – 정신병리의 개념적 접근>(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