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하이엔드로 도약한 일본 하이파이의 새 역사

SOULNOTE

일본 하이엔드를 대표하는 아큐페이즈, 럭스만 같은 노포 브랜드들에 비하면 2004년 설립된 소울노트는 이제 20년을 바라보는 비교적 신생 업체에 가깝다. 하지만 그 뿌리를 보면 소울노트는 아큐페이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꽤나 긴 역사를 지닌, 정통 하이파이 하이엔드 업체이다. 아큐페이즈가 트리오, 켄우드에서 분리되어 70년대 중후반에 회사가 설립되었듯이, 소울노트 또한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1975년 설립된 마란츠 저팬이 시작점이다.

사울 마란츠가 설립한 마란츠는 1960년에 들어서며 상품 기획과 생산 문제로 큰 손실을 겪고 회사를 매각하게 된다. 당시 마란츠를 인수한 미국의 영상기기 전문 업체였던 슈퍼스코프는 1950년대 중반부터 일본의 소니와 계약을 맺고 테이프 레코더를 미국 내에 독점 판매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을 끝내려는 소니의 의도에 따라 소니 제품 판매를 종료하고, 1964년에 마란츠를 인수하게 된다. 마란츠는 고가의 하이파이 제품 전문 업체였고, 슈퍼스코프는 대중적인 테이프 레코더 시장을 갖고 있었다. 슈퍼스코프는 마란츠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고급 하이파이 시장용 제품과 대중적인 오디오 시장을 모두 공략할 수 있는 새로운 제품 기획 및 생산을 준비했다. 소니와 사업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슈퍼스코프는 일본의 유능한 오디오 생산 업체를 찾았고 그 대상이 스탠더드 라디오 코프(SRC)이었다. SRC는 본래 라디오와 햄(HAM)이라 부르는 무선 통신 기기 제조 업체였는데, 안정된 생산 능력과 자체 설계 기술 수준에 만족한 슈퍼스코프는 SRC와 마란츠 제품 생산 계약을 맺었다. 이후 1975년 SRC의 지분을 사들이면서 마란츠 저팬을 설립했고, 마란츠 저팬은 마란츠의 거의 모든 제품들을 소화해냈다. 북미 지역 제품 설계팀과 일본의 설계팀이 나뉘어 있었지만, 마란츠 저팬은 마란츠 고유의 회로 기술을 습득하는 기회가 되었고, 가성비 높은 고급 제품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하이파이 사업에서의 수익과 경쟁에 한계를 느낀 슈퍼스코프는 북미 지역 마란츠 영업권을 제외한 마란츠의 모든 것을 필립스에게 매각하게 된다. 필립스는 소니와 함께 매스마켓 오디오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프리미엄의 이미지는 얻지 못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마란츠를 인수하여 고급 하이파이 시장에 뛰어들게 되었다.

주인이 바뀐 마란츠 저팬은 필립스의 우산 아래서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마란츠 산하에서는 고급 아날로그 오디오 기술들을 전수 받을 수 있었지만, 필립스에는 그와 완전히 반대인 최첨단 디지털 기술들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1980년 당시는 CD가 세계 최초로 발매되던 시절이었고, 필립스는 CD를 발명한 CD 오디오 기술의 특허권자였다. 당대 최첨단 최고의 디지털 오디오 기술을 직접 경험하게 된 마란츠는 세계 최고의 CD 플레이어와 디지털 오디오 기기를 개발·생산하게 된다. 이때 마란츠의 개발팀으로 제품 개발을 이끈 인물이 나카자와 노리나가였다. 필립스에서 발매된 LHH 이니셜의 프리미엄 CD 플레이어들과 마란츠의 하이엔드 CD 플레이어들이 모두 나카자와 팀이 개발한 당대 최고의 CD 플레이어들이자 DAC였다. 90년대에 들어서며, 마란츠 저팬은 마란츠의 유산인 Model 7, 9 같은 진공관 앰프 및 고가의 앰프들을 복원, 재생산해내면서 독자 개발로 마란츠의 플래그십 분리형 하이엔드 앰프들 내놓았다. 이때 개발된 아날로그 회로 기술들 중 대표적인 것이 HDAM 같은 증폭 회로 모듈이 있다. 이후로 마란츠 저팬은 SACD와 DVD 등의 최신예 디지털 기술들을 지속적으로 제품화시키면서 필립스 오디오의 모든 것을 책임졌다.

약 20년 동안 마란츠를 보유했던 필립스는 기대만큼의 시너지를 느끼지 못했고, 2000년대를 향하면서 하이파이 시장의 축소에 마란츠 매각을 결정하게 된다. 필립스 산하에 있던 마란츠 저팬은 필립스로부터 마란츠 브랜드를 완전히 인수하여 마란츠 저팬이 마란츠 본사가 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일본의 독자적인 회사로 우뚝 선 마란츠는 사울 마란츠 시절부터 추구해 온 마란츠의 오디오에 대한 열정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마란츠를 인수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2004년 해외 자본을 중심으로 한 기업 인수·합병에 의해 데논과 마란츠가 하나의 그룹으로 통합된다. 이때쯤 나카자와는 사내 엔지니어 및 일부 지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 마란츠에서 나와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나카자와는 마란츠가 과거 SRC 시절부터 일본 내수용으로 개발하던 무전기, 무선 통신 기기 등 같은 통신 기기 사업 부문을 인수하고, 마란츠의 엔지니어들을 데리고 CSR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2004년 설립된 CSR는 무선 통신 제작 및 판매와 더불어 오디오 기기 개발, 생산이라는 크게 2개의 사업을 주축으로 하는데, 오디오 사업은 별도의 브랜드 소울노트(SOULNOTE)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내놓게 되었다.

CSR의 소울노트는 2006년 DC1.0이라는 DAC를 시작으로 오디오 기기들을 발매하면서 하이파이 시장에 등장했다. 소울노트의 초기 제품 개발은 NEC와 마란츠의 엔지니어였던 스즈키 테츠가 이끌었다. 초창기 소울노트의 제품들은 주로 엔트리급 내지는 중급 가격대 정도의 인티앰프, SACD 플레이어, DAC 등의 제품이었다. 켄우드에서 나온 아큐페이즈가 하이엔드 중심의 콘셉트를 잡았던 것과 달리 소울노트는 가성비를 훨씬 끌어올린 중·저가 시장용 제품으로 출발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애초에 하이엔드 및 프리미엄 오디오를 생각했던 나카자와의 목표와는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2015년에 나카자와는 소울노트의 콘셉트를 완전히 바꾸었다. 중·저가, 가성비의 오디오가 아닌, 프리미엄 이미지에 어울릴 만한 하이엔드 오디오 전문 부티크로 소울노트를 새롭게 개편했다. 그가 제품 기획에서 개발까지, 전권을 맡긴 인물은 현재의 소울노트를 일으켜 세운 카토 히데키이다. 사장과의 독대를 통해 브랜드와 사업 전체를 책임지게 된 카토 히데키는 돗토리 공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과거 80년대 중반 NEC에서 엔지니어 생활을 하며 업계에 발을 들인 인물이다. NEC의 역사적인 앰프였던 A-10 앰프 시리즈의 개발을 맡았으며, NEC가 오디오 사업을 접게 되자 마란츠로 이직하여 마란츠의 대다수 제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과거 마란츠 저팬 시절에 나카자와 팀에 합류하여 마란츠 저팬의 전성기에 나온 LHH 시리즈와 마란츠의 프로젝트 D-1 등 프리미엄 SACD/CD 플레이어와 앰프들 대다수 개발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카토 히데키가 이끄는 소울노트는 모든 제품의 단종과 함께 소울노트 제품 라인업을 중급 하이파이인 1 시리즈, 하이엔드 입문기인 2 시리즈, 그리고 궁극의 성능을 내는 럭셔리 하이엔드인 3 시리즈로 제품군을 규격화하고 개발 로드맵을 세웠다. 카토 히데키는 전통적인 일본 오디오 업체 출신의 엔지니어지만, 그는 기존 설계 방식을 모두 버리고, 미국이나 유럽식 하이엔드처럼 독자적인 아이디어와 사운드 감각으로 하이엔드 부티크적인 설계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S/N비 스펙이 떨어지더라도 소리를 위해 피드백이 없는 회로 설계만을 하고, 주파수 스펙을 버리고 시간축 응답 개선을 위해 디지털 필터가 없는 DAC나 디스크 플레이어를 만드는 등, 일본 업계에서 보면 이단아 내지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볼 만한 제품 설계를 추구했다. 첫 출발점이 된 2016년 발매작 인티앰프와 포노 앰프, A-1과 E-1은 등장과 함께 일본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새로운 소울노트의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발 3년차가 되는 2017년에는 A-2 인티앰프와 E-2 포노 앰프로 하이엔드를 향한 중견 모델인 2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발매하면서 카토 히데키의 기술적 입지가 탄탄히 구축되었다. 이듬해에는 2 시리즈의 첫 DAC인 D-2가 발매되었고, 2019년에는 대망의 하이엔드 라인업의 첫 작품인 S-3 SACD 플레이어/DAC를 내놓는다. S-3은 발매와 함께 스테레오 사운드의 올해의 제품 등으로 선정되는 등, 업계에서 최고의 디지털 소스기기로 인정받으며 대성공을 거두었고, 스테레오 사운드 테스트 룸의 레퍼런스 디스크 플레이어로 납품되기에 이르렀다. 수년에 걸친 카토 히데키의 노력은 일본 하이파이 시장과 오디오 평론가들 사이에서 소울노트 브랜드에 대한 인지도와 제품 판매를 급격히 늘리게 되었고, 실제로 유명 평론가의 레퍼런스 제품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코로나 시기로 인해 약간의 주춤거리긴 했지만, 개발을 늦추지 않고 소울노트는 2020년에 P-3 레퍼런스 프리앰프를, 2021년에는 ZEUS라 불리는 D-3, Z-3, X-3의 플래그십 디지털 플레이어 시스템을, 2022년에는 M-3 레퍼런스 모노블록 파워 앰프를 내놓으며 대망의 소울노트 플래그십인 하이엔드 3 시리즈를 완성해냈다.

S-3 SACD 플레이어의 성공은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인지도를 만들기 시작하여 소울노트는 2020년부터 유럽과 북미 시장에 수출을 시작했는데, 매년 디스트리뷰터의 숫자가 늘면서 본격적인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서게 되었다. 한국 또한 2023년 6월부터 델핀과 공식 수입 계약을 맺으며, 한국 시장에 공식 수입 판매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세계적 성공을 바탕으로 늘어난 업무 및 생산으로 인해, 모기업인 CSR은 2023년 7월 1일자로 소울노트를 브랜드가 아닌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하여 (주)소울노트를 설립했다. 나카자와의 결단과 카토 히데키의 노력이 더해진 소울노트는 이제 세계적인 하이엔드 오디오 업체로 우뚝 서게 되었고, 소울노트의 전 제품들은 독자적인 설계 기술과 특수한 부품과 섀시 등으로 소울노트만의 개성과 차별화된 사운드를 자랑한다. 올 여름부터 시작된 소울노트의 한국 발매는 향후 오디오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글 | 성연진(audioplaza.co.kr)

•문의 : (주)델핀 (02)2678-3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