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장군은 정말 무능한 무장일까?

출처 : DBR

신립 장군(1546∼1592)은 조선 시대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이순신, 권율 장군만큼이나 칭송을 받는 뛰어난 무사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새재에 방어진지를 마련하고 전투를 하자는 부장들의 건의를 무시하고 기병을 활용한 정면 돌파를 주장해 충주 벌판의 탄금대에서 일본군과 맞섰다가 참패를 당했다. 패배의 치욕을 못 견딘 그는 결국 남한강에 투신해 순절했다. 중요한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오명을 남겼다.

그가 비난 받는 근거로는 새재가 아닌 탄금대를 택한 전술 실패, 부하 장수들과의 불통 등이 있다. 그런데 신립 장군의 선택을 비난하는 근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논리적인 허점이 있다. 

DBR 348호에 실린 기사를 통해 신립의 전술 결정을 현대 군사학의 관점에서 재평가하면서 그 시사점을 분석해보자.

충주 탄금대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METT-TC 관점에서 본 신립의 결정

신립을 비난하는 주된 근거는 높고 험한 새재가 아닌 평야 지대인 탄금대에 진을 쳤다는 것이다. 보통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싸우면 유리하다. 화살이나 총탄도 더 멀리 날아가고, 몸끼리 부딪치는 육박전을 할 때도 상대적으로 힘을 쓰기 수월하다. 

현대 군사학에 따르면 전술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Mission(주어진 임무)’ ‘Enemy(적의 규모, 전투력 등)’ ‘Troop Available(아군의 규모, 전투력 등)’ ‘Terrain(지형과 기후)’ ‘Time Available(주어진 시간)’ ‘Civil Consideration(민간에게 미치는 피해 등)’ 등 일명 ‘METT-TC’를 고려해야 한다. 신립의 전술도 METT-TC의 관점에서 재평가할 수 있다.

먼저 Mission의 경우 신립에게 주어진 임무는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라는 것으로 신립은 왜군과 반드시 격돌해 승부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일이 상주에서 패배하고 도주해 와서 보고한 왜군의 병력 규모와 전투력이 대단함을 감지한 신립은 조정에 후퇴를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신립은 새재 아니면 근처의 다른 곳에서라도 일본군과 결전을 해야 했다.

‘Enemy’를 보면 일본군의 병력 규모는 모두 5만 명 수준이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새재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군은 죽령으로,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正)의 제3군은 추풍령으로 진격해 오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새재에서 고니시의 제1군을 막는다 해도 가토와 구로다가 조선군의 방어선을 신속히 돌파할 경우 퇴로를 차단당한 채 포위돼 협공을 받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Troop Available’ 측면에서 조선군의 병력은 1만 명 내외였으며 주력 부대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궁기병 부대였다. 따라서 산악 지대보다는 평야 지대에서 더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문경 새재의 실제 옛 과거길 / 출처 : 문화재청

‘Terrain’의 경우 새재가 험준한 산악이라 방어에 유리한 것은 인정되나 5배가 넘는 일본군에게 포위됐을 경우 적시에 한양이나 지방에서 대규모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전멸당할 우려가 있었다. 특히 식량이나 화살을 충분히 보급받지 못한 상황이라면 험준한 산악에 진을 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결정인데 당시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을 감안할 때 신립 부대의 보급 상황이 넉넉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미뤄 짐작할 수 있다.

‘Time Available’을 보면 하루 이틀 내에 일본군과 조우할 것이므로 새재에 진을 치든지 새재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충주는 교통의 요지이고 물류 거점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으로서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곳이어서 조선군이 진을 치고 있을 경우 반드시 격파할 필요가 있었다.

‘Civil Consideration’은 현대전에서 민간인의 안전을 충분히 배려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임진왜란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고려 요소였을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백성을 안전한 곳으로 소개하는 조치는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할 때 당시 곧 출현할 일본군과 결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신립은 사지라고 판단되는 새재에 진을 칠 수 없었고 게다가 주력 부대가 궁기병이기 때문에 평야 지대이면서 일본군이 지나칠 수 없는 요충지인 충주에서 결전을 치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군과 일본군의 주 무기 비교

신립이 믿고 있던 조선군의 주 무기는 궁기병이 말을 타고 돌격하면서 발사하는 ‘편전(애기살이라고 하는 30㎝ 정도의 짧은 화살을 통아(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모양의 통)에 넣고 발사하는 독특한 화살)’이었다. 최대 사거리는 활의 장력, 궁수의 완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최대 사거리가 380m에 달했고 관통력이 우수했으며 철갑 갑옷을 뚫고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유효 사거리는 80m 정도였다.

일본군의 주 무기는 잘 알다시피 화승총인 조총인데 최대 사거리는 500m, 유효 사거리가 100m 정도였다. 유효 사거리가 비슷하고 모든 일본군이 조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니 편전 발사 속도가 더 빠르다면 8000명의 정예 궁기병 부대를 출전시킨 조선군이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었다.

그래서 신립은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결전에 임해 먼저 공세를 취하는 작전을 구상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징비록(懲毖錄)』에 따르면 신립은 조총의 위력에 대해 주의를 촉구한 유성룡에게 조총이 재장전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부정확하기 때문에 기병의 빠른 돌격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만일 유성룡이 조총에 대한 주의를 촉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총의 복사 제작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역사가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조선 조정이 마음만 굳게 먹었으면 조총의 복사 제작이 그리 어려운 과제는 아니었다. 1543년 일본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처음 전래된 포르투갈 조총은 1년여 만에 복제돼 일본 전체로 퍼져나갔다.

무엇이 전투의 승패를 갈랐을까?

탄금대전투 전날 비가 와 달천평야가 질척거렸고 신립의 궁기병 부대가 돌격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기병 돌격은 충격력을 통해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므로 속도가 생명이다. 신립은 일본군의 조총이 재장전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속도감 있는 돌격으로 재장전 이전에 적진을 휩쓸어 버린다는 작전 구상을 했다. 하지만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의 돌격 속도가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날씨뿐 아니라 무기도 신립의 편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새로운 사격술을 채택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개발해 1575년에 나가시노전투에서 적용한 연속 사격술이다. 1열이 쏘고, 재장전하는 사이에 2열이 쏘고, 이어서 3열이 쏘고 나면 재장전을 완료한 1열이 다시 쏘는 방식으로 탄환이 중단 없이 날아오기 때문에 기병대의 돌격으로 적진을 돌파하기 쉽지 않았다.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느린 속도로 돌격해 오는 신립의 궁기병 부대에게 일본군이 쏘는 탄환이 중단 없이 쏟아졌다.

여기에다 가장 중요한 패전 요인은 중과부적(衆寡不敵), 즉 고니시와 가토의 군대를 합하면 일본군의 병력이 신립 궁기병 부대의 3배 수준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일본군의 전술에 관한 사전 정보가 없었던 신립은 궁기병의 편전을 믿고 오히려 선제공격을 가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고니시가 조선군의 시야가 차단된 좌우 측면으로 기습부대를 우회시켜 조선군을 포위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했는데 신립 쪽에서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도 승패를 가른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신립 장군 초상화
신립에 대한 후대 평가가 박한 이유

신립은 적군의 무기 운용 체제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을 뿐이지 전장을 선택한 것 자체는 METT-TC 관점에서 합리적이었으며, 그는 본인이 택한 전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일단 중요한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 거의 모두를 수장시키는 참패를 당하고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급에 포함된 것을 보면 이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둘째, 신립의 작전을 평가하는 잣대가 너무 단순하다. 많은 이가 METT-TC와 같은 여러 가지 작전 요소 중에서 지형 하나만 두고 전체를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셋째, 생존 장병들의 뒷말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하 장수들이 그에게 새재에서 싸우자고 했을 때 왜 새재가 사지인지, 왜 평야 지대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하고 납득시켰다면 어땠을까? 전투에 임하는 부하 장수들의 태도가 달라졌을 것이고 전투가 더 효율적으로 이뤄졌을지 모른다. 부하들을 설득하지 않고 일방통행식으로 밀어붙이다 보니 평소 과격한 면모를 보였던 신립에 관해 생존 장병들의 뒷말이 나오고 아집에 찬 결정을 했다는 선입견이 고착됐다고 볼 수 있다.

넷째, 고니시 유키나가의 작전 평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해서다. 고니시가 새재를 버린 신립을 비웃으며 조선에는 병법을 아는 자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니시의 작전 목표는 새재 돌파이고 신립의 작전 목표는 일본군 섬멸이었다. 세 갈래로 진격해 오는 일본군 전체를 대상으로 작전을 구상해야 했던 신립의 작전 시야가 고니시보다 훨씬 더 넓었다고 볼 수도 있다. 고니시의 시각으로만 신립의 작전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다.

조직에서도 조직 구성원의 능력, 성향이나 조직 구성원이 담당해 실행했던 프로젝트에 대한 다양한 뒷담화가 존재한다. 많은 조직에서 현대판 신립이 양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특히 조직의 수장이나 인사 담당 책임자들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유능하지만 소통 능력이나 친화력이 부족한 구성원이 인사에서 필요 이상의 불이익을 받으면 조직 전체의 역량 저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업무 경험 축적, 자기 계발, 현실 세계의 냉혹함에 적응 등을 통해 조직 구성원의 업무 역량은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한다. 10년 전 상급자나 동료의 평가에 묶여 10년 동안 꾸준히 노력해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인재를 기용하지 못한다면 그 조직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348호
필자 최중경
정리 인터비즈 조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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