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노가 두려웠다. 연애할 때는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싫다’고 거듭 이야기를 했더니 화를 참다못한 남자친구가 ‘도를 닦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화를 안내고 사느냐’고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하기도 했다. 분노를 순식간에 폭력으로 뒤바꾸는 어른들을 보며 자라서인지도 모르겠다. 분노라는 감정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매서운 흉터를 남기고 오랫동안 쌓은 관계를 무너뜨리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였다.
분노는 오랫동안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다. 가톨릭에서도 분노는 일곱 가지 대표적인 죄에 속하며, ‘노하기를 더디하라’는 성경 외에도 ‘한때의 분함을 참으라’는 명심보감, ‘분노는 무모함에서 시작하여 후회로 끝난다’는 피타고라스의 금언에 이르기까지 분노에 대한 경고가 무수히 전해져 내려온다. 분노를 함부로 표출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정서적, 신체적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관계의 평화는 쉽게 깨진다. 사회를 보다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분노는 경계해야 할 감정이었을 테고, 우리는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분노를 그토록 꺼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노를 폭발적으로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분노를 금기시하는 것 또한 문제를 낳기는 마찬가지다. 화가 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화가 날 때 주변의 기대 혹은 터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감정을 억누르고 있게 되기 쉽다. 이 때 분노는 ‘화’라는 감정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여러 다른 가면을 쓰게 되는데, 분노가 아닌 슬픔이나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화났다’고 말하는 대신 ‘속상하다’고 말하는 편이 사람들에게 보다 편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갈 길을 잃은 분노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한 화는 자기에게 향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죄책감이 된다. 게슈탈트 심리치료자인 어빙 폴스터(Erving Polster) 교수는 죄책감은 분노의 반전(retroflection)이라고 설명했다. 반전은 다른 사람에게 하고 싶은 행동을 자신에게 하는 심리적인 현상을 뜻한다. 타인에게 화를 내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이깟 이런 일’로 화가 나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저 사람도 사정이 있는데 내가 너무 속이 좁은 거 아닌가’라거나 ‘내가 잘못 해서 저 사람이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아닐까’와 같은 자책 뒤로 숨게 된다.
특히 화가 나는 대상이 부모나 자녀, 혹은 연인이나 배우자와 같이 ‘내가 당연히 이해해야 하는 존재’일 때, 분노는 갈 길을 잃는다. 내담자 K의 어머니는 매우 헌신적인 분이었다. 이혼 후 노점상을 하며 빠듯하게 외동딸을 건사해왔다. K는 그런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할 나이에 이르자 남편감에 대한 어머니의 간섭이 심해졌고 처음으로 갈등이 생겼다.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의 결정을 존중해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있는데도, K는 이를 차마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분노의 방향을 틀어 어머니의 기대에 맞춰주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렇게 나를 위해 고생한 어머니에게 화를 내다니’, ‘어머니가 싫어할 만한 사람을 데려온 내가 부족한 거지’ 같은 생각이 감정의 항아리를 덮어씌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화가 났다는 마음의 상태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상담을 통해 화를 내어도 괜찮다고,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마음에 이르자 그녀는 분노를 있는 그대로 응시할 수 있었다. 그제야 “엄마 너무해”라는 말이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화를 누르느라 팽팽해져 있던 긴장이 스르르 풀어지기 시작했다.

캄캄한 마음의 방향계
우리가 그토록 불편하게 여기는 화는 실은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상태를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은 존재이다. 특히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거나 침범당했을 때, 분노는 선명하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방향을 가리킨다. 가족이나 프라이버시, 일의 성과와 같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누군가 흔들어댈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지금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소중한 것을 지켜’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연거푸 늦을 때,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상대가 계속 연락을 해올 때, 운전 중에 누군가가 급하게 끼어들 때 우리는 화가 난다. 화가 나야만 한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나의 시간과 경계, 안전을 누가 침범했기 때문이다. 그때 분노라는 신호가 작동하는 것이 정상이다. ‘지금 경계를 넘어왔다’, ‘네가 한 행동이 잘못됐다’,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주어야 나를 보호할 수 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화가 나지 않으면 상대가 우리를 계속 함부로 대하도록 두게 될 수 있다. 무심결에 끓어오른 냄비 손잡이를 잡았을 때 강렬한 통증을 느낄 수 있어야 곧바로 손을 뗄 수 있다. 그래야 피부가 보호되는 것처럼, 우리 마음 역시 누군가의 심리적 침범에 분노라는 통증을 느껴야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다.
또한 어린 아이가 학대로 고통받은 사건을 접할 때, 이주노동자가 착취당하는 것을 볼 때, 동물들이 살처분될 때 우리는 화가 난다. 나의 소중한 무언가를 넘어 타인의 존엄성이나 생명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절망 앞에서 화가 나는 마음은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내게 해주기도 한다. 연구자들은 이를 ‘공감적 분노(empathic anger)’ 혹은 ‘도덕적 분개(moral outrage)’라고 부른다. 이러한 분노 덕분에 우리는 공동의 문제에 마음을 모을 수 있고, 사회적 약자들은 분노를 동력 삼아 집단적인 행동을 도모할 수 있다.
우리가 분노를 느낄 때 몸은 곧바로 전투 채비를 한다. 비상 상황임을 감지한 편도체 덕분에 심장박동이 증가하고 호흡이 빨라지면서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분노에 관한 저명한 연구자인 라이언 마틴(Ryan Martin) 심리학 교수는 분노를 ‘연료’라고도 표현했다. 분노는 우리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과 에너지도 주는 것이다.
나는 평소 거의 큰소리를 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가 리더로 있던 소모임 구성원에 대해 부당하게 비난했을 때, 없던 용기가 솟아나 목청껏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느라 눈물이 찔끔 났지만 말이다. 마트에서 만난 아이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어른을 볼 때, 낯모르는 이더라도 ‘그러지 마세요’하고 간섭을 해버린다.
부적합한 감정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분노는 예측 불가한 폭탄이 아니라 행동의 방향을 가리키는 강렬한 에너지가 된다. 나 또는 이웃을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서 용기를 내게 해주고, 미투운동이나 촛불시위와 같이 사회를 바꾸는 힘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분노가 가리키는 방향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은 ‘주의 깊게 관찰하고 돌보지 않을 때만 분노가 파괴적인 힘을 가진다’고 말한다. 분노는 그 자체보다 이를 마주하려 하지 않고 밀어내거나 누를 때 문제가 된다. 어느 감정이든 해소되기 위해서는 무대 위에 올려놓고 충분히 주목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분노나 미움, 질투와 같은 감정에게는 선뜻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주려 하지 않는다. 감정은 무대 아래로 끌어내리려 할 때 더욱 아우성대기 마련이다. 무대로 올라와 실컷 말한 후에야 분노는 스스로 내려갈 테고, 다른 감정이 올라올 자리를 마련해줄 것이다. 대부분 분노는 할 말이 많다.
많은 경우 분노는 나에 대한 충실한 정보원이 되어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상대의 행동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준다. 가령 학교 행사든 모임이든 진행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을 때 남편은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데, 시간을 촘촘히 계획하는 나는 정색하고 만다. 옆 차선의 택시가 운전을 거칠게 할 때 나보다 안전에 대한 바람이 큰 남편은 자주 발끈하곤 한다. 사람마다 욕구의 종류와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도 반응이 다르다. 유독 화가 많이 나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에 대한 내 욕구가 강하다는 의미이고, 분노가 거셀수록 나의 바람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 테다. 내가 원하는 바에 닿을수록 파르르 끓어올랐던 분노도 조금씩 가라앉을 수 있다.
나도 이제는 ‘도인’처럼 화를 덜 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분노는 단순히 멀리하거나 경계해야 할 ‘나쁜’ 감정이 아니었다. 화가 솟구칠 때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을 응시하고, 그 분노를 어디에 사용할지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여전히 분노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밀어내거나 화르르 뛰어들 때도 있을 테다. 하지만 판단이나 두려움 없이 화난 마음을 오롯이 바라보는 시간이 쌓이다 보면, 분노 그 자체보다 분노가 가리키는 방향에 더 시선을 두게 되는 날도, 분노가 주는 힘에 기대어 나와 타인을 보호할 수 있는 용기를 얻어가는 날도 점차 늘어갈 것이다.
<참고문헌>
라이언 마틴 (2021). 분노의 이유. 이재경 역. 반니.
알무트 슈말레-리델 (2019). 우울한 게 아니라 화가났을 뿐. 이지혜 역. 티라미수 더북.
조긍호, 김지연, 최경숙 (2009). 문화성향과 분노통제:분노 수준과 공감의 매개효과를 중심으로. 한국심리학회지: 사회 및 성격, 23(1), 69-90.
Hoffman, M. L. (2008). Empathy and prosocial behavior. In M. Lewis, J. M. Haviland-Jones, & L. F. Barrett (Eds.), Handbook of emotions (3rd ed., pp. 440–455). The Guilford Press.
Spring, V. L., Cameron, C. D., & Cikara, M. (2018). The upside of outrage.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22, 1067-1069.
글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로 출간하였고,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지금은 NGO에서 일하는 남편과 아프리카에서 살아보고 있습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지안의 계정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이지안의 상담블로그 ☞블로그
* 해당 글은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는 총 25여명의 작가들이 매일(주중)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뉴스레터로,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무료 레터 콘텐츠입니다.
#지식토스트
Copyright © 해당 글의 저작권은 '세상의 모든 문화'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