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고미술품 수집가 임상종의 꿈과 좌절[청계천 옆 사진관]

변영욱 기자 2024. 10. 12. 13: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백년사진 No.82

백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하나 골라 의미를 찾아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골동품 거래의 대표적인 거리 중 한 곳인 서울 인사동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자기가 모아 둔 조선의 보물들을 아무 조건 없이 사회에 내놓겠다고 하는 시민의 이야기입니다. 조선의 미술품이 사라지고 외세에 빼앗기는 것이 안타까워 10년 동안 많은 골동품을 모아왔는데 어느덧 마땅히 보관할 곳도 없고 더 이상 물건을 사 모을 여력도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기자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해서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고미술품을 무상 기증하겠다는 임상종씨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서울 인사동에 살던 고미술품과 골동품 수집가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시죠.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924년 10월 6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적년수집 고미술품 무상 제공(積年收集古美術品 無償提供)을 언명(言明)
10 여년 모아둔 조선의 보배를 보수없이 사회에 내놓겠다고

글씨로 그림으로 건축으로 조각으로 옛날의 조선을 꽃밭같이 꾸미던 조선의 모든 미술품은 사라져 없어지고 재변(災變)으로 없어지고 알지 못하여 찾지 못하고 찾았으나 빼앗기고 하여

◇옛날의 광명이나마 차차 사라지려 하는 때에 영남출생(嶺南出生)으로 방금 시내 인사동(仁寺洞)에 사는 림상종(林尙鍾)씨는 어려서부터 사라져가는 민족의 자랑거리를 남달리 아까워하여 자기의 일생을 고조선 미술품 수집 보존에 바치기로 하고 10여 년 이래로 자기의 거대한 전 재산을 이에 탕비하여 대표적 미술품이라 할만한 그림(畵) 이천 폭과 글 시(書)삼천폭과 신라(新羅) 고려(高麗) 리조(李朝)때의 그릇 도자기(陶磁器) 수백종과 기타 골동품 수십종을 모았는데 이 가운데는 삼한시대의 불상(佛像)도 있고 구하지 못할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호렵도(虎獵圖)도 있고 근세의 신화라하는 장승업(張承業)의 그림도 있고 김종서(金宗瑞)의 글씨도 있고

◇고구려의 유물로 집안현(輯安縣)에 잇는 영락대왕(永樂大王)비의 탑본(搭本)도 있고 그밖에 신라 고려 때의 조각(彫刻) 도기(陶器) 동기(銅器) 등 우리나라의 고귀한 미술품은 거의 갖추어 있는데 이 같은 거대하고 어려운 사업에 일 개인의 힘은 한이 있어 지금의 림씨는 살림을 이어가는 여러장의 전당포와 이 같은 보배를 굶어 죽어도 영원히 보존하겠다는 정상만 남았을 뿐인데 만 가지 일에 돈의 힘이 드는 지금에 있어서 정성만 가지고 있다 무슨 변을 당하여 한 폭의 그림이나 한 개의 그릇이라도 잃거나 하면 어찌할까 하는 걱정으로 림씨는

◇단연히 결심하고 어떤 개인이나 어떤 민간 단체에서 이것을 영구히 맡아 사회의 공유물로 완전히 보존하는 기관이 생기면 조금도 아끼지 않고 서화 그릇 등 전부를 내여놓기로 하였다더라.

◇분로촌공(分勞寸功) - “땅 팔아 그림 한 폭”/임상종씨 담(林尙鍾氏談. 인터뷰)
이 소식을 듣고 왕방한 기자에게 림씨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하되『참말 인제는 내 힘만으로는 더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이는 아실터이고 모르시는 이는 모르실터이지요마는 나는 실상 땅 한 마지기를 팔아서 그림 한 폭을 얻어오고 세간을 팔아서 글씨 한 쪽을 모은 것이 『분로촌공』으로 그래도 지금에는 저만콤 모으게 되엿습니다. 저것을 모은다고 밥이 생기거나 옷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도로혀 내 자신의 구복은 줄어드는 세움이지마는 그런 생각을 하고야 모아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정성 뿐이고 힘이 없습니다.

◇저렇게 모은 물건이 일조일석에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고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고 한폭 두쪽 잃어질지도 모를 일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어쨌든 이 물건을 한 곳에 모아 미술관을 지으시겠다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으면 아무 보수도 없이 그대로 내여주겠습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떼여혔치자면 쉬운 일 이지요마는 나는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한데 뭉치여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랍니다』는 말끝에는 무한한 결심과 보배에 대한정성이 넘치었다.

●이 기사를 쉽게 정리하면

백년 전 신문에 실린 기사는 인사동에 거주하는 임상종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라져가는 조선의 문화유산을 아끼며, 10여 년 동안 고미술품을 수집해 왔습니다. 임 씨는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그림 2000폭, 서예 3000폭, 도자기 수백 종, 기타 골동품 수십 종을 모았습니다. 표로 만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정말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잡하니 임상종 씨가 수집한 유물들을 본문에서 언급된 종류와 수량을 바탕으로 표로 정리했습니다.

유물 종류
수량
설명
그림(畵)
약 2,000 폭
조선 시대와 근세의 대표적인 그림 포함
서예 작품(書)
약 3,000 폭
김종서 등의 유명한 서예가의 작품 포함
도자기(陶磁器)
수백 종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도자기
불상(佛像)
삼한 시대 불상
삼한 시대의 귀중한 불상
탑본(塔本)
영락대왕비 탑본
고구려 영락대왕비의 탑본
조각(彫刻)
수집된 다양한 조각
신라와 고려 시대의 조각품들
동기(銅器)
수집된 동기류
신라와 고려 시대의 동으로 만든 기물들
호렵도(虎獵圖)
1점
고려 공민왕 시대의 호렵도
장승업의 그림
1점
근세의 대표적인 화가 장승업의 작품

임상종씨와 기자의 인터뷰 내용

임상종 씨는 이러한 유물을 보존하는 것이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현재 그는 여러 장의 전당포를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유물들이 훼손되거나 잃어버릴까봐 걱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보물들을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가 있다면, 보수를 받지 않고 모든 유물을 기증하겠다고 결심했고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

임 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땅을 팔아 그림 한 폭을 사고, 세간을 팔아 글씨 한 쪽을 모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밥이 생기거나 옷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고서도 유물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성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성만으로는 부족하고, 힘이 없음을 토로합니다. 그는 유물들이 일조일석에 없어질 수도 있고, 한 폭 두 폭 잃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고 하면서 그는 유물들을 한 곳에 모아 미술관을 지을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다면, 보수를 받지 않고 기증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유물들이 하나하나 흩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

임상종 수집가는 파산의 위험에서 벗어났을까

임상종씨의 이야기는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서 한번 더 검색이 됩니다. 1925년 7월 19일자 호외에 “水災 同情金” 기탁자 명단이 실리는데 여기에 ‘인사동 199번지 림상종 10원’이라는 한 줄까지 동정이 실립니다. 경성 시내를 강타한 수해 상황을 보도하면서 수재 의연금을 낸 수백 명의 독지가 중 한 명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제대로 추적이 되지 않습니다. 독지가나 기업 문화재단 등이 나타나 그의 수집품을 보관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만들어주었다는 해피엔딩의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가 별로 도움이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제희의 풍수칼럼 (21fengshui.com)이라는 곳에서 임상종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http://www.21fengshui.com/content5/view.html?id=4-1-1-1-3의 포스팅에 따르면
“여기저기서 빌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임상종은 급기야는 고리대금업을 하는 최상규(崔尙奎)에게 군선도를 비롯한 고서화를 맡기고는 계속해서 돈을 빌려 썼다. 당시에 남에게 돈을 빌려쓰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자가 월 2할에 가까워 5달만 지나면 원금의 곱이 되었던 시절이다. 마치 밑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 식으로 늪에 빠진 임상종은 더 이상 빚을 갚을 길이 없자, 파산선고를 했다. 그러자 개인으로써는 유래가 드물게 수집했던 3백여 폭의 고서화가 이자와 원금 대신으로 고스란히 최상규에게로 넘어갔다. 욕심이 부른 파멸이었다. 죽음이 가까웠을 때에 임상종의 손아귀에는 손바닥만한 고서화 조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천추의 한을 품은 채 1940년 눈을 감았다. 고리대금업자 최상규는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으로 곧 임자를 찾아 나섰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백년 전 신문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10월 6일자 신문에 실린 인사동 큰손이었던 임상종의 인물사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과 기사에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언론이 세상에 사실을 알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시대였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일수도 있구요. 지금처럼 대기업이 문화재단을 운영하거나, 일반 시민들이 십시일반 투자하는 클라우드 펀딩이 대중화되었다면 좀 더 행복한 결말이 나올 수도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