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둘로 쪼갠 군사분계선은 그냥 '흰 선'에 불과했다

2022. 11. 2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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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종단열차②] 후에,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무의미한 싸움

[박정연 기자(daramji@pressian.com)]
2019년 5월 <프레시안>은 조합원들과 함께 시베리아 종단열차를 탔습니다.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 황량한 대지 위에 빛나는 태양과 해가 진 뒤 떠오른 수많은 별들을 함께 보았습니다. (관련기사 : 최초 여성 공산주의자 김알렉산드라를 따라 걷다) 코로나로, 또 전쟁으로 열리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 철길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번엔 베트남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프레시안>이 철도노동자들과 함께 베트남의 남북을, 열차로 종단하고 온 이야기를 전합니다. 곧 <프레시안>의 조합원들과 함께 떠날 날을 그려봅니다.

한국과 베트남은 숙명적으로 닮은 점이 있다. 중국과의 국경을 접했다는 지리적 공통점으로, 두 국가 모두 중국과 오랜 조공관계를 맺었다. 중국의 주도권이 약해지는 시점에 베트남은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조선 역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두 나라는 해방되었지만 분단을 맞이했다. 독일과 같은 전범국가가 아님에도 말이다.

한국은 북위 38도선,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났다. 세계 냉전의 중심은 미국과 소련이었지만, 제국의 대리전이 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한국과 베트남에서 계속됐다.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인접 나라들도 차례로 공산화 된다는 '도미노 현상'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미국 대통령의 말이 유령처럼 두 나라를 떠돌았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베트남은 비록 20년의 전쟁을 거쳤지만, 냉전에 의한 분단을 끝냈고,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그 냉전이 계속 되고 있다. 하노이에서 야간열차를 타고(관련기사 : 철도 노동자와 함께 야간열차를 타고, 베트남 남북을 종단하다) 베트남의 북과 남을 가르는 지역인 후에를 찾아 이제는 흔적으로 남은 냉전의 조각을 톺아봤다.

베트남의 휴전선'이었던' 북위 17도선을 넘으며 도보다리를 생각하다

베트남은 북위 17도 선을 기준으로 북쪽엔 베트남민주공화국, 남쪽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공화국으로 나뉘게 된다. 북위 17도선을 따라 벤하이강을 사이로 그어진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이 대략 2㎞씩 거리를 두고 DMZ(비무장지대)를 설정했다.

우리는 베트남 DMZ의 상징인 벤하이강을 가로지르는 히엔르엉 다리를 찾았다. 이 다리는 1954년 베트남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비무장지대 설정 당시, 기준점이되는 곳이었다. 이 다리를 기준으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갈라지면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고 했다. 히엔르엉교는 두 가지 색으로 절반이 나뉘어져있었다. 파란색 북베트남 관할, 노란색은 남베트남 관할이라는 표식이었다.

▲히엔르엉 다리에 그어진 흰색의 군사분계선을 사이로 북베트남을 상징하는 파란색과 남베트남을 상징하는 노란색이 색칠되어있다. ⓒ박흥수 철도노동자
▲히엔르엉 다리에 그어진 흰색의 군사분계선을 사이로 북베트남을 상징하는 파란색과 남베트남을 상징하는 노란색이 색칠되어있다. ⓒ프레시안(박정연)

1976년 통일된 베트남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지며 더이상 이 색깔들은 의미를 잃었다. 파란색과 노란색 사이의 흰색 군사분계선(MDL)을 두고 남과 북의 시민들은 물론 군인들조차 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2022년도의 우리는 그 흰색 선을 넘었다. 군사분계선은 넘고 나니 그저 흰색으로 색칠한 선 하나에 불과했다. 왠지 허무해졌다.

그러면서 몇년 전 남북의 정상이 넘었던 도보다리가 떠올랐다. 살짝 발을 들어 올려 한 걸음에 넘어갈 수 있는 군사분계선의 턱, 그 턱에 불과한 다리는 냉전의 세월이었다. 그 다리를 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났으며 지금은 또다시 넘을 수 없게 된 현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군사훈련과 미사일이 왔다갔다하는 전쟁의 위험을 벗어나 온 국민이 평안하게 평화를 꿈꾸게 될 날이 올 수 있을까. 선 하나에 불과한 남한과 북한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언젠가는 허무함을 느낄 수 있길 바랐다.

과거 분단시절, 히엔르엉 다리를 중심에 두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자신들의 국기를 더 높이 거는 경쟁을 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대남, 대북 선전 방송을 더 크게 하기 위해 사람 몸보다도 더 큰 스피커를 사용했다. 경쟁적으로 국기를 게양하던 냉전의 시절을 뒤로하고 히엔르엉 다리 북쪽에는 하나의 국기가 걸려있다. 그리고 그 스피커들은 역사박물관에 유물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선전방송에 쓰였던 확성기는 이제 유물로 남았다. ⓒ박흥수 철도노동자
▲두 개의 깃발이 경쟁적으로 달리던 게양기에는 하나의 깃발이 남았다. ⓒ프레시안(박정연)

폭격을 피해 땅 밑에서 이어진 삶의 줄기

1호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북베트남의 최전방마을 '빈목'에 다다른다. 전 세계에서 가장 심한 폭격을 받은 장소로 불리는 빈목은 베트남 전쟁 당시 약 9천만톤에 달하는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고 한다. 빈목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군인도, 정치인도 아닌 민간인들이었다. 건물들은 무너지고 일궈왔던 논과 밭은 폭격으로 허허벌판이 되었다. 그래서 빈목의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아래로 내려간다. 폭격이 한창인 대지 아래로.

폐허가 된 빈목 마을의 대지 아래로, 새로운 삶의 터전이 생겨났다. 주민들은 1965년부터 호미와 손을 이용해 흙을 파내고 2.8km에 달하는 터널을 만들었다. 터널은 3층 구조로 주거공간으로 쓰인 1층은 12m, 군수물자와 식량 창고로 쓰인 2층은 18m 아래, 3층은 22m 아래에 위치해 있다. 지하 10m를 뚫고 내려오는 미군의 드릴폭탄을 피해 12m 부터 생활 터전을 만들었다.

빈목 마을 주민들의 생명력처럼 뻗어나간 빈목터널은13개의 입구와 7개의 출구가 있었다. 그 출구를 나오면 광찌해안으로 연결되어 있다. 160cm 남짓의 높이로 지어진 빈목터널 안으로 들어가면, 허리를 필 수 없다. 굽이굽이 이어진 빈목터널을 굽힌 허리를 잡고 걸어갔다. 어둡고 습한 터널에서 17명의 아이들이 태어났고, 600여 명의 주민들이 이 터널에서 생활했다.

▲구비구비 이어진 빈목터널. 빈목마을 주민들은 공습을 피해 지하로 터널을 만들어 삶을 이어갔다. ⓒ박흥수 철도노동자
▲구비구비 이어진 빈목터널. 빈목마을 주민들은 공습을 피해 지하로 터널을 만들어 삶을 이어갔다. ⓒ박흥수 철도노동자

빈목 터널의 벽을 만져보니, 황토처럼 눅눅하면서도 단단한 재질의 토양이어서 손과 호미를 이용해서 터널을 오랫동안 만들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생활은 그리 녹록하진 않았을 것이다. 터널을 들어갔다 나오니 몸에 진흙이 묻을 정도로 습한 환경이었다. 터널에서만 지낸 주민들은 피부병이 걸려 폭격이 없는 틈을 타 햇빛을 보러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구불구불한 빈목터널의 끝은 어디일까 싶었던 찰나, 출구가 보였다. 굽은 허리를 잡고 나오며 너나 할 것 없이 "에구구" 곡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이 터널에서 몇 분도 못 있겠는데 어떻게 그 긴 기간 동안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전쟁은 정말 없어야 할 것 같다"는 사람들의 한숨 섞인 토로가 나왔다.

빈목 터널을 나오며, 북미갈등이 한창이던 2017년 10월 소설가 한강이 뉴욕타임스에 게재했던 '미국이 전쟁을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 다'(관련기사 : 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는 기고가 떠올랐다.

미국에서 전해지는 뉴스에서 나오는 구절들을 꼼꼼히 듣고 있다. 마치 이런 내용인 것처럼 들린다. '우리는 몇 가지 전쟁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매일 2만 명의 남한 사람들이 사망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전쟁은 미국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다. 오직 한반도에서만 벌어진다' ... 지금 여기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대리전이 한반도에서 발발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도미노 효과'를 막겠다는 제국의 대리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자신의 터전을 뒤로하고 공습의 두려움과 죽음을 피해 지하로 내려갔던 빈목 주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햇빛을 볼 수 없는 지하에서나마 삶으로 저항할 수 밖에 없던 그들의 삶이, 전쟁의 위험이 어느새 일상화 되어버린 우리의 삶과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빈목터널에서 지낸 주민의 삶을 재현해놓은 모습. 1평 남짓한 지하 공간에서 이들은 삶을 영위했다. ⓒ프레시안(박정연)

케산전투,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무의미한 싸움.

케산전투는 1968년 1월21일 북베트남군대가 케산미전투기지일대를 포위공격하며 약77일간 벌어졌다. 미군이 단일전투에서 가장 많은 화력을 뿜어낸 전투이기도 하다. 미군의 고엽제 살포로 민둥산이 되었던 '록파일'은 고지의 기지라고 한다면, 케산은 지역의 중심거점이라고 미군은 생각했다.

1일 1,800톤의 폭탄을 투하, 70일간 무려 12.6만 톤의 폭탄을 투하할 정도로 화력전이 대단했던 케산전투. 미군과 공방을 벌이던 북베트남군대는 70여일만에 이곳에서 물러나고 미군의 승리로 전투는 막을 내린다. 기막힌 것은 미군도 결국 이곳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많은 화력을 쏟아 부었고 고전끝에 승리를 거뒀음에도, 미군은 이곳을 포기했고 기지를 파괴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케산기지에 남겨진 미군의 전략 무기들 ⓒ박흥수 철도노동자
▲케산기지에 남겨진 미군의 전략 무기들 ⓒ박흥수 철도노동자

직접 가 본 케산기지의 첫인상은 최대 화력전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드넓은 벌판과 초원이 이어진 모습이었다. 그 위로 미군이 버리고 간 항공기와 무기 잔해가 남아있었다. 그렇게 기지에 펼쳐진 초원을 따라 얼마간 걸었을까. 계단 아래로 내려가니 공습을 피하기 위해 구불구불한 참호가 이어졌다. 마치 미국의 '밴드오브브라더스'의 세트장 같이 전쟁터라는 느낌이 물씬 드는 곳이었다.

▲케산기지에 펼쳐진 구부구불한 참호ⓒ프레시안(박정연)

미군이 중요 전략기지로 판단했던 케산은, 미군이 떠난 뒤 결국 북베트남군이 통제하는 지역이 되었다. 당시 미국은 케산 전투를 미국의 승리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이는 오히려 "왜 미국의 아들이 이름 없는 고지를 지키기 위해 죽어야 하느냐"며 반전여론이 거세지는 계기가 됐다.

케산기지를 방문한 뒤 미국은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결국 '전쟁이 무엇을 위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품고 다음 목적지인 호치민으로 향하는 야간 열차에 몸을 실었다.

▲후에 역에서 정차중인 호치민행 야간열차에 올랐다 ⓒ박흥수 철도노동자

[박정연 기자(daramj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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