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타주 [말글살이]

한겨레 2025. 10. 2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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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연 부장판사가 지난 4월2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내란 우두머리 혐의 형사재판 두번째 공판에서 취재진의 퇴장을 명령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어떤 성격의 사회이냐에 따라 같은 말에도 온도 차이가 느껴진다. 말에는 서로 다른 사회적 가치나 감정이 담기기 때문이다. ‘사보타주’(sabotage)는 나막신을 뜻하는 프랑스어 ‘sabot’(사보)에 행위를 뜻하는 ‘-age’(아주)가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로 ‘나막신으로 뭔가를 하는 행동’이다. 급격한 산업화에 화가 난 프랑스 노동자들이 자신의 나막신을 벗어 기계에 던져 망가뜨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얘기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사보타주는 노동자가 저항의 표시로 생산을 방해하거나 기계를 파괴하는 행위를 뜻한다. 첩보원이 주요 시설을 파괴할 때에도 이 단어를 쓴다. ‘스파이가 철도를 사보타주했다(파괴했다)!’

이 말이 한국에 건너오면서 ‘태업’ 정도의 소극적 저항으로 축소되었다. 국어사전에도 ‘파괴’와 같은 거친 뜻은 빼고 ‘겉으로는 일을 하지만 의도적으로 일을 게을리함으로써 사용자에게 손해를 주는 방법’ 식으로 풀이하여 ‘농땡이 부리기’ 정도로 뜻을 쪼그라뜨렸다. 체제에 대한 적극적 저항 행위였던 것이 근무 태만과 같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 셈이다.

저항보다는 불성실에 가까운 것으로 뜻이 얄팍해지다 보니 그 쓰임이 널널해졌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사용자, 정부 관료, 정치인, 공직자, 회사의 책임자들도 ‘사보타주’를 한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정도의 의미인지라 누구든 자신만의 이유로 일을 게을리하면 ‘사보타주한다’고 한다. 원치 않는 일이 생기면 관련 규정을 내세우고 절차를 핑계 삼고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미룬다. 하루가 급한 사람들은 속이 타고 입이 마르지만 나 몰라라 한다. 어차피 시간은 나의 것!

권한과 책임이 있는 자들의 티 나지 않는 사보타주가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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