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의 시작, 자동차 역사의 첫 페이지, 칼 벤츠 박물관(1)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31개 자동차 박물관을 소개하기로 한 후 고민은 '첫 방문지를 어디로 할 것인가'였습니다. 고민 끝에 자동차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 칼 벤츠를 만나는 것부터 이번 여정이 시작되는 게 자연스럽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향한 곳이 독일 라덴부르크의 칼 벤츠 박물관이었습니다.

◆ 공장, 박물관이 되다

칼 벤츠 박물관은 다임러 그룹이 운영하는 슈투트가르트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과는 다릅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하마터면 사라질뻔한 공장을 지켜낸 한 수집가의 의지와 다임러 그룹의 적극적 지원으로 설립된, 역사적 장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칼 벤츠는 만하임에 기계 제작소를 동업자와 함께 세우는 것으로 사업가 및 발명가의 길을 가게 됩니다. 하지만 매번 투자자들과 뜻이 맞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데요. 회사를 정리하고 다시 새로운 공장을 세우는 등, 여러 차례 갈등과 위기를 거치며 그의 자동차 사업은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됩니다.

1897년 벤츠 & Cie 직원들 모습

가스 엔진 제작으로 시작된 공장 Benz & Cie는 40여 명의 직원 수가 1910년에는 1900명 이상으로 늘어나며 사업은 성공을 거둡니다. 투자자들은 더 빠른 차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칼 벤츠는 자동차 속도가 너무 빨라서는 안 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고, 갈등은 폭발합니다. 결국 칼 벤츠는 자신의 회사인 Benz & Cie를 나와 약 10km 떨어진 라덴부르크에 칼 벤츠 죄네(C. Benz Söhne)라는 회사를 다시 세웁니다. 박물관은 바로 이 C. Benz Söhne 공장 자리에 들어섰는데요. 라덴부르크 시내에 있던 칼 벤츠 박물관이 복원 공사를 끝낸 2005년 현 공장으로 옮겨왔습니다. 

◆ 칼 벤츠의 흔적과 유산을 만나다

건물 우측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매표소가 나오는데 요금은 성인 기준 5유로로 비교적 저렴한 편이지만 다른 곳들과 달리 여기서는 사진을 찍으려면 별도의 사진료(3유로)를 내야 합니다. 이 점을 제외하면 나무랄 곳 없는 곳입니다. 일단 박물관 안으로 들어오면 옛 공장 느낌을 최대한 살린 덕에 마치 19세기 말로 시간 여행을 간 기분이 듭니다.

크기는 부지 전체로 보면 축구 경기장만 하고, 전시실 기준으로는 경기장의 2/3 정도 돼 보였습니다.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자동차와 50여 대 이상의 자전거와 모터바이크, 그리고 벤츠와 다임러의 자동차 외 다른 제조사의 클래식 카와 여러 소품까지, 꽤 많은 모델이 알차게 전시돼 있습니다. 전시관은 총 6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Benz & Cie 공장의 모습을 재현한 곳부터 오토바이크와 자전거 구역, 1926년 고트립 다임러가 세운 자동차 회사 DMG (Daimler Motoren-Gesellschaft)와 Benz & Cie가 합병한 후에 생산된 '메르세데스' 모델 구역까지, 나름 주제별로 구분을 했습니다만 사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순서 상관없이 눈에 들어오는 것부터 봐도 무방합니다.

표를 끊고 돌아서면 1929년에 생산된 메르세데스-벤츠 W11 모델(슈투트가르트 260이라는 이름으로 판매)이 방문객을 먼저 맞습니다. 6기통의 중형급 모델로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생산됐는데, 이 차의 전 모델 8/38이 그 유명한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만든 것입니다. 포르쉐와 다임러의 인연은 꽤 긴 편이었는데요. 1931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설계사무소를 세우기까지 포르쉐는 다임러에서 엔지니어로 일했습니다. 

통로를 따라 다임러 벤츠 시절 자동차들을 감상하고 있는데 한 독일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슬쩍 말을 건네더군요. "이게 아데나워가 총리 시절 타던 차예요."라며 앞에 있는 자동차를 가리켰습니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서독의 초대 총리였죠. 독일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나치와 히틀러에 저항했던 그를 두고 처칠은 '비스마르크 이후 가장 중요한 독일인'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관용차이기도 했던 메르세데스 Typ 300(W 186)

◆ 자전거부터 자동차까지, 사연도 제각각

총리 관용차에서 눈을 돌리면 원색의 버스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1927년에 만들어진 N 1 아우스시히츠바겐(Aussichtswagen)으로 여행객들을 태우고 코스를 도는 일종의 관광버스였습니다. 1인당 30마르크의 비용을 받고 아침 8시에 출발, 독일 남부 도시들을 돌았다고 하는데, 나무로 만든 딱딱한 의자에 종일 앉아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여행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을 거 같습니다. 3.9리터 6기통, 최고 마력은 50PS.

1920년대 벤츠 관광버스

투어용 버스를 지나면 독특한 모양의 벤츠 모델을 하나 보게 됩니다. 메르세데스-벤츠 170 VG라는 이름의 이 세단은 1939년부터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만들어졌던 나무 가스 자동차입니다. 전쟁으로 기름이 부족했던 당시 나무나 숯을 태워 여기서 나오는 가스로 차를 굴렸는데 170 VG도 그런 나무 가스 차 중 하나였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에만 이런 형태의 자동차가 50만 대나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나무 3kg을 태운 가스는 당시 연료 1리터와 비슷했습니다.

의미 있는 자동차가 많이 전시돼 있지만 이만큼 벤츠에게 고마운 모델은 아마 없을 겁니다. 벤츠는 1893년 삼륜 자동차가 아닌, 처음으로 네 바퀴로 된 자동차를 만듭니다. 빅토리아 Vis라는 모델이었죠. 빅토리아의 장거리 주행 성공으로 그 가능성을 확인한 칼 벤츠는 이듬해인 1894년 2천 제국 마르크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벨로(Velo)를 만듭니다.

1기통, 1리터, 2.75마력의 이 네 바퀴 자동차는 당시 국민차로 불렸는데, 6년 동안 1200대가 팔렸습니다. 자동차를 여전히 낯설어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큰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특히 이 모델은 프랑스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칼 벤츠의 자동차 사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준 효자 자동차입니다.

최초의 자전거 Draisine

박물관 중심부에는 자전거 한 대가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칼 드라이스(Karl Drais)라는 귀족 집안 출신의 발명가 만든 'Draisine'인데요. 흔히들 이것을 '최초의 자전거'라고 이야기합니다. 페달이 없던 자전거를 타고 드라이스는 1817년 처음으로 장거리 주행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괴상한 자전거 등장에 깜짝 놀랐고, 칼 드라이스를 별종 취급했습니다. 1818년 그의 자전거는 독일에서 특허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해외 특허를 신경 쓰지 못하는 바람에 곳곳에서 많은 복제품이 나오고 말죠. 경제적인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 드라이스는 칼 벤츠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까지 살았던 칼스루에에서 무일푼으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만든 게 정말 최초의 자전거인 것인지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발명가로서, 그리고 이동성의 또 다른 개척자로서 그의 업적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 레이싱 카들 속 빛나는 모델

칼 벤츠 박물관은 레이싱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흥미로운 곳입니다. 전시관 왼쪽으로 별도의 공간이 마련돼 있는데, 그곳에는 레이싱 팬들을 설레게 할 만한 다양한 경주용 차와 소품과 사진 등이 전시돼 있습니다. 1999년 맥라렌-메르세데스팀에서 F1 월드 챔피언이 된 미카 하키넨의 머신도 볼 수 있고, 레이서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저렴한 가격에 판매가 됐던 MK4 같은 모델도 볼 수 있습니다. 1957년형 SLR 같은 차 앞에서도 한참을 서 있게 되죠.

레이싱 카들을 모아 전시해 놓은 공간
미국에서 가져온 SLR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것은 1921년에 만들어진 AVUS 렌바겐(Rennwagen,경주용차라는 뜻)을 직접 본 것이었습니다. 베를린에는 1913년에 착공해 1921년 완공된 아부스(AVUS)라는 고속도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고속도로이자 경주용 트랙이기도 했죠. 직선으로 9km의 도로 양 끝에는 43도나 되는 뱅크(트랙의 경사진 부분)가 있었는데 많은 사망 사고가 일어나 '죽음의 벽'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아부스 경주도로의 뱅크 구간을 달리는 자동차들

칼 벤츠 박물관에서 만난 아부스 렌바겐(경주용 차라는 뜻)은 바로 이 역사적 장소에서 펼쳐진 첫 경주 대회에 출전했던 모델입니다. 출력과 차체 중량 등으로 급을 나눠 실시된 경주 대회에 벤츠 & Cie 공장은 두 대의 각기 다른 차를 내보내는데요. 당시 비가 강하게 내렸고, 매우 미끄러운 상황에서도 10/30PS 모델은 평균 속도 121km/h로 해당 급에서 우승컵을 차지합니다.

아부스 렌바겐

하지만 10/30PS는 경주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분해가 된 것으로 추측했죠. 그런데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10/30PS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발견됩니다. 독일 남부의 한 농기계 창고에서 10/30PS 차대를 찾은 겁니다. 그 때부터 박물관 측은 차를 복원하기로 결심하죠. 곳곳에 수소문한 끝에 운 좋게 베를린의 한 수집가로부터 섀시를 제외한 나머지 부품을 구입할 수 있었고, 10년이란 복원 작업 기간을 거쳐 10/30PS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칼 벤츠 박물관에는 세상에 단 3개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진 룩스카, 헨리 포드의 T 모델, 1차 대전 이후 위기 속에서 다임러 벤츠가 만든 메르세데스 타자기, 베르타 벤츠가 결혼식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 등,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전시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현재 음성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으며, 독일어와 영어로 된 안내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2층에 전시된 높은 자전거라는 뜻의 '호흐라트(Hochrad)'. 타기 어렵다고 해서 '쇠로 된 당나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메르세데스 타자기
너무나 탐이 났던 모형 자동차들

여느 박물관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특별 전시나 행사가 진행됩니다. 이와 관한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automuseum-ladenburg.de) 통해 확인하면 됩니다. 칼 벤츠 박물관을 둘러 보는 데에는 2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 곳까지 와서, 이 정도로 끝내기엔 뭔가 아쉽죠? 그래서 하나 더 준비했습니다. 라덴부르크에는 칼 벤츠를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장소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C. Benz & Söhne 로고


오며가며 듣는 역사!

칼 벤츠 & 죄네 (C. Benz & Söhne)

칼 벤츠 & 죄네(Söhne)에서 죄네는 아들이라는 독일 단어 존(Sohn)의 복수형으로 '벤츠와 아들들'이란 뜻입니다. 유럽에서는 예전부터 가족 기업에 이런 식의 작명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칼 벤츠의 첫째 아들 오이겐은 처음부터, 그리고 둘째 리카르트는 만하임 벤츠에서 더 일하다 2년 뒤 합류합니다. 처음에 칼 벤츠는 이 공장에서 자동차가 아닌, 엔진만 생산할 계획이었죠. 하지만 몇 종의 자동차를 만들게 됩니다. 칼 벤츠가 1912년 다시 만하임의 벤츠 & Cie의 감독 위원으로 복귀하면서 회사 경영은 두 아들이 맡게 되지만 자동차 판매에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고, 결국 1924년이 자동차를 생산한 마지막 해가 되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칼 벤츠 죄네는 다임러 벤츠의 부품 납품 업체로 계속 활동을 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회사는 힘을 잃었고, 결국 2004년 완전히 문을 닫습니다. 문을 닫을 때즈음 회사에는 20명의 노동자만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택지 개발에 따라 완전히 사라질 뻔한 공장은 윈프리트 자이델이라는 수집가의 노력으로 박물관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박물관 투어 TIP!

칼 벤츠 공장 자리가 박물관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중의 관심도 늘어났죠. 위치도 나쁘지 않아서 라덴부르크 중앙역에서 네카강 쪽(강을 마주 보고 오른쪽 방향)으로 5~6분 정도만 걸어가면 박물관에 도착합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기준으로 라덴부르크까지는 기차로 약 1시간. 자동차로 방문하면 무료 주차가 가능합니다.



유럽 자동차 박물관 사진전 보러 가기!



글/이완 사진/최민석, 이완, 다임러


<칼 벤츠 박물관 정보>

박물관명 : 닥터 칼 벤츠 자동차박물관

브랜드명 : 개인 박물관

국가명 : 독일

도시명 : 라덴부르크

위치 : Ilvesheimer Straße 26, 68526 Ladenburg, Baden-Wurttemberg, Germany

건립일 : 1984년

휴관일 : 월, 화, 목, 금

이용시간 : 오후 14:00-18:00 (수, 토, 일)

입장료 : 성인 : 5유로, 어린이 : 3유로, 사진 촬영 시 별도 비용 : 3유로

홈페이지 : automuseum-ladenburg.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