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만 되면 성폭력이 '사랑' 둔갑.. 너무 낮은 '성적 동의 연령' [탐사기획-'은별이 사건' 그후]

‘정의’란 무엇일까. 20년 전 맺은 인연으로 ‘은별이(A씨) 사건’ 초기 때부터 현재까지 A씨와 그 가족을 돕는 이학용(67) 목사는 ‘그 사건’ 이후 정의란 말을 입에 쉬이 담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 자퇴, 보호시설, 6번의 재판, 그리고 지금의 소송전까지…. 세상은 참 가혹했다.

조씨는 이 사건으로 1심 징역 12년, 2심 9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대법원은 A씨가 조씨에게 150여통의 편지를 보낸 점, 평소 애칭을 사용한 점 등을 들어 ‘연인 관계’라고 결론지었다. A씨 측은 ‘어린 나이에 임신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고, 몸이 불편한 부모님이 충격을 받으실까봐 상대방 요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반박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1심은 “무죄가 확정됐다고 무고인 것은 아니다”는 취지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올해 2월 검찰도 조씨의 무고 고소사건을 ‘무혐의’로 결정했다. 겨우 한시름 놓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조씨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무혐의 처분에 대해선 ‘다시 판단해 꼭 A씨를 처벌해 달라’는 취지로 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비극의 서사는 비단 이 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19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청소년성폭력상담소 ‘탁틴내일’ 전문가들과 언론 보도, 법원 판결문, 상담 사례 등을 토대로 최근 10년 동안 사회적 논란이 된 아동·청소년 성범죄 사건들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아이’와 성관계를 가진 ‘어른’은 공통적으로 “서로 사랑한 것”, “동의한 관계” 등 논리를 들고 나왔다. 이는 우리 법이 아동의 ‘특수성’ 인정에 인색한 데다 사랑과 범죄의 경계가 모호해 ‘동의’만 인정되면 법망을 빠져나가기 쉬운 구조이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권현정 탁틴내일 부소장은 “아이들의 순수한 호의나 성적 호기심, 불안감 등을 이용해 ‘동의 증거’를 치밀하게 만들어 놓고 문제가 되면 ‘서로 좋아한 것’이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수사기관에 불려간 아이들이 제대로 된 대처에 어려움을 겪는 것과 달리, 가해자들의 방어 논리는 점점 더 정교해지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다수 전문가는 ‘만 13세’로 규정된 우리나라의 ‘성적 동의 연령’을 문제의 시발점으로 꼽았다. 대다수 선진국이 16세를 기준 삼고 있으며, 개방적 분위기로 알려진 미국 캘리포니아주 등은 아예 18세로 우리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현행법 아래에서 한국은 12세 이하 아동과 성관계를 한 상대방은 형사처벌하지만, 13세 이상이면 일단 동의 여부부터 따진다. 13세부터는 ‘임신 등 성관계로부터 오는 미래 피해와 의미를 충분히 인지·예상한 상태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의제강간 연령, 즉 성관계 동의 연령 상향이 아동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고 반론을 편다. 하지만 어른이 아이들을 심리적으로 길들인 뒤 성적으로 착취하는 ‘그루밍 성범죄’가 확산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아이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과연 어디까지 보호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큰 대목이다. 교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와 성관계를 한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루밍 성범죄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아동 성범죄 흐름과 아이들의 성에 대한 인식 수준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 맞는 동의 연령 재정립이 필요하다”며 “동의 연령이 상향되면 ‘어른이 아이와 하는 성관계는 무조건 범죄’란 인식이 확산하는 등 형벌의 ‘일반 예방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우리 사회는 성 문제에 대단히 보수적이고 대부분 이슈에서 아이들을 ‘보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유독 이 문제에서만큼은 아동·청소년에게 ‘너희의 선택이니 알아서 책임을 지라’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며 “지독한 아이러니”라고 꼬집었다.

중학교 3학년. 음악이 꿈이었다. 하지만 부모님도, 친구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한 사람만 달랐다. 선생님. 꿈을 이해해줬다. 이야기를 들어줬고 같이 고민해줬다. 가끔은 작은 선물을 주기도 했다. “열심히 공부하라”며 문제집을 건넸다. 통기타를 가르쳐줬다. 비타민도 줬다. 점점 가까워지던 차에 그가 불쑥 말했다. “손 잡아도 되니?” 거절하지 못했다.
따뜻한 조언자였던 그는 급기야 성적 요구까지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나’와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수롭지 않게 행동했다. ‘내가 이상한가….’ 한 번은 친구에게 그와의 관계를 에둘러 언급했다. 나중에 이를 안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대단한 문제라도 일으킨 것처럼 쉼없이 몰아붙였다. 두려웠다. “죄송해요….” 한참 뒤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말했다. “어디 가서 절대 얘기하지 마, 알겠지?”
“그때 내가 웃지 말걸 그랬나. 그때 문제집을 받지 말걸 그랬나. 나의 잘못인가. 계속 자기검열을 하게 돼요….”
지난 12일 취재팀이 만난 이모(23·여)씨는 당시 기억을 털어놓고선 “마치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고민 끝에 인터뷰에 응했으나 여전히 성인 남성과의 대화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이를 감안해 서은주 탁틴내일 팀장이 인터뷰에 동석했다.
“유죄라고 달라진 건 없어요. 저는 아직도 (안 좋은 기억들과) 싸우는 중이에요. 그 사람과 비슷한 체형, 닮은 사람을 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요.” 이씨는 지난해 교사 A씨를 고소했고, 지난달 항소심 재판이 끝났다. 법원은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1년6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연인 관계였다”는 A씨의 주장을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대가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한 점 때문에 여전히 불안하다. 그러면서 그는 ‘은별이 사건’을 언급했다. “그런 사건조차 무죄가 나는데…. 2심 때도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피해자들은 더 이상 법이, 판사가 나를 도와줄 것이라 믿기 어렵게 된 거죠.” 피해 청소년 누구나 해당 판결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란 것. 듣고 있던 서 팀장이 덧붙였다. “청소년들은 인터넷 검색을 매우 잘 합니다. 그 판결은 이미 청소년 사이에 널리 퍼져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을 체념하게 만들고 있죠. 아직 신고도 안 했는데 ‘맞고소당하면 어떡하느냐’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게 지금의 현실이에요.”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김민순·이창수 기자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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