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의 발달 앞에서 스포츠, 새로운 길을 묻다 [S 스토리]

송용준 2019. 11. 2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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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세계적 마라토너’ 킵초게 / 특수 러닝화 신고 ‘마의 2시간’ 경신 / ‘기술도핑’ 논쟁따라 기록 인정 안돼 / 박태환 전신수영복은 착용금지 / ‘의족 스프린터’ 피스토리우스는 / 법정투쟁 승소해 올림픽 출전도 / 마라톤 … 수영… 골프… 야구… / 장비 따라 경기력 좌지우지하자 / 스포츠 전 영역으로 논란 확장
인간 한계를 뛰어넘어 새 역사를 쓴 케냐 마라토너 엘리우드 킵초게(35). 남자 마라톤 세계기록(2시간1분39초)을 보유한 킵초게는 ‘마의 기록’으로 여겨졌던 2시간 벽을 깨버렸다. 지난달 12일 오스트리아 빈의 프라터 파크에서 열린 이벤트 ‘1:59 챌린지’에서다. 그는 1시간59분40초에 42.195㎞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그러나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이를 공식 세계기록으로 공인하지 않았다. ‘1:59 챌린지’가 기록달성을 위해 철저히 환경을 조성한 이벤트였다는 이유에서다.

이 대회에선 선도차량이 레이저로 적정 속도를 유도하고 페이스메이커들이 돌아가면서 킵초게를 도왔다. 그럼에도 킵초게의 레이스는 세기적 도약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부 선수가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킵초게가 차량유도 같은 간접 지원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기에 ‘서브 2’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논란은 킵초게가 나이키의 러닝화 ‘줌엑스 베이퍼플라이’ 시리즈 중에서도 특별 제작된 신발을 신고 달린 데서 비롯됐다. 스포츠 과학자 로스 터커가 이 신발을 두고 “선수가 평지보다 1~1.5% 경사 내리막길을 뛰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준다”고 말할 정도다. 결국 IAAF 기술위원회는 “신발이 선수의 발 보호·안정을 넘어 부당한 도움·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며 조사에 착수했다. 이렇듯 첨단기술이 적용된 기구나 장비를 통해 개인 능력치 이상의 기량향상을 끌어내는 것을 두고 ‘기술도핑’이라고 부른다.

흔히 금지약물 복용으로 알려진 도핑이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범주로 확장된 사례 중 하나다. 특히 최근 들어 첨단기술 분야의 비약적 성장과 더불어 ‘기술도핑’이 스포츠의 공정성을 해치는 요소로 크게 부상하고 있지만 무엇이 기술도핑인가를 두고 스포츠계는 갑론을박 중이다.
올림픽에 출전한 남아공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가 ‘의족’을 착용 한 모습.
◆점점 확장되는 도핑

스포츠에서 도핑이라고 하면 대부분 금지약물을 통해 순간적으로 자신의 능력치 이상의 기량을 선보이도록 돕는 ‘약물도핑’을 떠올린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유전자 정보 조작으로 기량향상을 유도하는 ‘유전자 도핑’도 등장했다. 이에 더해 수술로 신체의 특정 기능을 높이는 ‘서지컬 도핑’도 있다.

하지만 가장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술도핑이다. 다른 도핑 방식들은 적발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들이 있지만 기술도핑은 어디까지가 기술의 도움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능력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점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기술도핑을 둘러싼 역사적 사례들을 봐도 종목의 특성이나 상황에 따라 공정한 경쟁으로 인정되기도 하고 기술도핑으로 부정되는 등 천차만별이다.
한국 여자 장대높이뛰기 대표 임은지가 바를 넘고 있다. 장대높이뛰기는 기술도핑 역사에서 시초로 언급되는 종목이다.
◆장비를 둘러싼 기술도핑 논란
기술도핑 논란의 가장 오래된 사례는 육상의 장대높이뛰기다. 단단한 나무 장대를 사용하다 1912년 대나무 장대의 등장과 함께 4m 시대가 열렸다. 이후 조금씩 기록향상이 이어졌지만 1942년부터 1957년까지 15년 동안 세계기록이 1㎝ 늘어나는 정체기를 맞았던 장대높이뛰기는 1961년 이후 탄소 유리섬유 장대가 보급되면서 엄청난 변혁기를 맞았다. 3년 새 세계기록은 48㎝나 늘어났지만 이후 다시 정체돼 1994년 6m14㎝ 이후 새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규칙상 장대의 재료나 길이 두께 등에 제한이 없기에 앞으로 적용될 신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 신기록 탄생이 더딜 것이 분명하다.
골프 역시 장비에 크게 좌우되는 스포츠라는 점에서 기술도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골프 역시 장비에 크게 좌우되는 스포츠라는 점에서 기술도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장비 제한이 없던 초창기에는 거리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클럽 번호가 0.5 단위로 나누어져 30개의 클럽을 들고 경기에 참가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에 가장 먼저 반발한 것은 선수가 아닌 무거운 백을 들고 다녀야 했던 캐디들이었다. 이후 1934년부터 클럽수가 14개로 제한됐다. 또한 첨단소재가 속속 도입되고 헤드의 반발계수가 늘어나 장타력에 대한 분별력이 떨어지자 반발계수도 0.83으로 제한됐다. 그 밖에도 클럽의 크기 길이, 헤드와 샤프트의 정렬까지도 골프룰을 제정하는 세계 양대 기관인 미국골프협회(USGA)와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철저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제 대회에 나서기 위해서는 R&A의 검사를 통과한 장비만 사용해야 한다.

야구도 기술도핑과 무관한 종목은 아니다. 특히 배트와 공 이 두 가지는 그 제작 방식에 따라 세계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다. 당장 지난해까지 극심한 타고투저였던 한국 프로야구가 2019년 공의 반발계수를 높이면서 홈런이 30% 이상 급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술적 속임수는 ‘부정 배트’로 발현된다. 배트 속에 코르크를 넣거나 속을 압축시켜 반발력을 높이는 방식이다. 이를 막기 위해 각국의 프로야구는 허가받은 업체의 배트만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같이 장비가 경기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종목들이 대개 기술도핑의 유혹을 많이 받지만 대부분의 종목은 허가된 업체가 만든 제품만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 장비의 통제를 통해 이를 막고 있다. 장대높이뛰기처럼 아예 제한을 없애서 모든 기술을 동원해도 상관없다고 풀어놓은 종목은 드물다.
박태환이 전신수영복을 입고 있다. 이 수영복은 기술도핑으로 인정돼 착용이 금지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착용만 했는데도…

최근에는 이런 장비 외에도 신체에 직접 착용하는 의류나 신발 등을 통한 기술도핑이 더더욱 주목받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수영이다. 2008∼2009년은 세계수영계의 기술도핑 시대로 불린다.

당시 스피도사가 폴리우레탄 소재를 활용해 개발한 전신수영복 때문이다. 수영복 표면에 상어 비늘 같은 미세한 돌기를 만들어 인간 피부보다 훨씬 적은 마찰로 인해 수영 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진 이 수영복이 수영계를 지배하면서 2008년에만 무려 108개의 세계신기록이 작성됐다. 2009년 로마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단일 대회 사상 최다인 43개의 신기록이 세워졌다.

쏟아지는 기록에 놀란 세계수영연맹(FINA)은 결국 로마 대회 이후 전신수영복을 전면 금지했다. 그렇다고 당시의 기록까지 삭제한 것은 아니기에 여전히 10년 전 전신수영복 당시 만들어진 세계기록이 깨지지 않고 살아있는 세부 종목들이 적지 않다.
케냐의 마라토너 엘리우드 킵초게가 지난달 12일 오스트리아 빈의 프라터 파크에서 열린 이벤트 ‘1:59 챌린지’에서 1시간59분40초에 42.195㎞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며 최초로 2시간 벽을 깨뜨렸다. AP연합뉴스
그리고 킵초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마라톤 등 장거리 선수들이 착용하는 신발을 두고 말들이 많다. 남자가 2시간10분대에 처음 진입한 것이 1967년이었고 여기서 1999년 5분대 진입까지 32년이 걸렸다. 하지만 비공인이라고 해도 ‘서브 2’가 되는 데는 2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간 한계 기록에 가까워질수록 기록달성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하지만 단축 간격이 줄어든 이유 중 하나로 첨단기술이 가미된 러닝화 때문이라는 데 이견은 찾기 힘들다.

수영복이나 신발과는 차이가 있지만 ‘의족’을 둘러싼 논쟁도 기술도핑과 무관하지 않다. ‘의족 스프린터’로 유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선천적 기형으로 생후 11개월부터 무릎 아래를 절단한 채 의족으로 살아왔던 그는 육상 400m에서 장애인 대회를 석권한 뒤 일반 대회 출전자격을 얻기 위해 법정 투쟁까지 벌였다.

IAAF는 그가 쓰는 의족이 일반 선수보다 25% 정도 에너지 경감 효과가 있다며 일반 대회 출전을 금지했지만 피스토리우스는 스포츠중재재판소(CAS)의 판결을 거쳐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2012년 런던올림픽에 나설 수 있었다.

◆장대높이뛰기 장비 따라 ‘수평’서 ‘수직’ 운동으로... 종목의 정체성까지 변화

역사적으로 볼 때 수영처럼 단기간에 확연히 기록 차가 나타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술도핑으로 인정된 사례는 많지 않다. 어디까지가 기술의 도움이냐는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것이 큰 이유지만 새 기술의 빠른 보급속도도 요인으로 꼽힌다.

러닝화의 경우만 봐도 2019년 6대 메이저 마라톤 대회에서 3위 안에 든 남녀 선수 36명 중 31명이 논란의 나이키 제품을 착용했다. 나머지 5명은 경쟁사인 아디다스 제품을 신었다. 결국 누구나 비슷한 제품을 쓴다면 공정한 경쟁이 된다는 논리다.

실제 IAAF의 규칙도 이런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2017∼2018시즌 규칙은 ‘어떤 기술적인 도움을 받아 착용자에게 부당한 이익을 주거나 불공정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경기화가 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개정된 2018∼2019시즌 규칙에는 기존 내용에서 ‘기술적인 도움’이 삭제되고 ‘보편성 정신에 입각해 모든 종류의 경기화는 합리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됐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킵초게가 ‘서브 2’를 달성할 때 신었던 신발이 대중화될 것이라는 근거로 IAAF가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라 전망한다.

오스카 피스토리우스가 역주하는 모습.
또한 의족과 관련돼서도 기술도핑의 모호한 경계가 드러나는 사례가 있다. 피스토리우스에 이어 독일의 장애인 멀리뛰기 선수 마르쿠스 렘(28)도 2016 리우올림픽 출전에 도전했지만 좌절됐다. 피스토리우스와 같은 재질의 의족이었지만 렘의 기록이 당시 세계 2위에 해당해 메달권이 유력하자 IAAF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결국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기술도핑의 기준이 과학적 담론에 있다고 말한다. 서울대 강사인 김정효 박사는 “과학이 만들어 낸 기술을 가지고 인위적인 여부를 따지는 기준을 만드는 것 역시 과학이라는 점이 기술도핑의 역설”이라고 설명했다. 박보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는 “단단한 나무 시대의 장대높이뛰기는 장대를 잡고 빨리 올라가는 종목이었다.

하지만 새 장대 도입 이후는 과학자들에 의해 장대의 탄성을 이용해 수평운동을 수직운동으로 바꾸는 기능을 다루는 것으로 이 종목의 정체성이 바뀌었고 기술도핑 논란이 사라졌다”고 예를 들었다.

송용준 기자 eidy01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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