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의 발달 앞에서 스포츠, 새로운 길을 묻다 [S 스토리]

이 대회에선 선도차량이 레이저로 적정 속도를 유도하고 페이스메이커들이 돌아가면서 킵초게를 도왔다. 그럼에도 킵초게의 레이스는 세기적 도약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부 선수가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킵초게가 차량유도 같은 간접 지원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기에 ‘서브 2’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논란은 킵초게가 나이키의 러닝화 ‘줌엑스 베이퍼플라이’ 시리즈 중에서도 특별 제작된 신발을 신고 달린 데서 비롯됐다. 스포츠 과학자 로스 터커가 이 신발을 두고 “선수가 평지보다 1~1.5% 경사 내리막길을 뛰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준다”고 말할 정도다. 결국 IAAF 기술위원회는 “신발이 선수의 발 보호·안정을 넘어 부당한 도움·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며 조사에 착수했다. 이렇듯 첨단기술이 적용된 기구나 장비를 통해 개인 능력치 이상의 기량향상을 끌어내는 것을 두고 ‘기술도핑’이라고 부른다.

스포츠에서 도핑이라고 하면 대부분 금지약물을 통해 순간적으로 자신의 능력치 이상의 기량을 선보이도록 돕는 ‘약물도핑’을 떠올린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유전자 정보 조작으로 기량향상을 유도하는 ‘유전자 도핑’도 등장했다. 이에 더해 수술로 신체의 특정 기능을 높이는 ‘서지컬 도핑’도 있다.


야구도 기술도핑과 무관한 종목은 아니다. 특히 배트와 공 이 두 가지는 그 제작 방식에 따라 세계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다. 당장 지난해까지 극심한 타고투저였던 한국 프로야구가 2019년 공의 반발계수를 높이면서 홈런이 30% 이상 급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술적 속임수는 ‘부정 배트’로 발현된다. 배트 속에 코르크를 넣거나 속을 압축시켜 반발력을 높이는 방식이다. 이를 막기 위해 각국의 프로야구는 허가받은 업체의 배트만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장비 외에도 신체에 직접 착용하는 의류나 신발 등을 통한 기술도핑이 더더욱 주목받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수영이다. 2008∼2009년은 세계수영계의 기술도핑 시대로 불린다.
당시 스피도사가 폴리우레탄 소재를 활용해 개발한 전신수영복 때문이다. 수영복 표면에 상어 비늘 같은 미세한 돌기를 만들어 인간 피부보다 훨씬 적은 마찰로 인해 수영 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진 이 수영복이 수영계를 지배하면서 2008년에만 무려 108개의 세계신기록이 작성됐다. 2009년 로마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단일 대회 사상 최다인 43개의 신기록이 세워졌다.

인간 한계 기록에 가까워질수록 기록달성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하지만 단축 간격이 줄어든 이유 중 하나로 첨단기술이 가미된 러닝화 때문이라는 데 이견은 찾기 힘들다.
수영복이나 신발과는 차이가 있지만 ‘의족’을 둘러싼 논쟁도 기술도핑과 무관하지 않다. ‘의족 스프린터’로 유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선천적 기형으로 생후 11개월부터 무릎 아래를 절단한 채 의족으로 살아왔던 그는 육상 400m에서 장애인 대회를 석권한 뒤 일반 대회 출전자격을 얻기 위해 법정 투쟁까지 벌였다.
IAAF는 그가 쓰는 의족이 일반 선수보다 25% 정도 에너지 경감 효과가 있다며 일반 대회 출전을 금지했지만 피스토리우스는 스포츠중재재판소(CAS)의 판결을 거쳐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2012년 런던올림픽에 나설 수 있었다.
◆장대높이뛰기 장비 따라 ‘수평’서 ‘수직’ 운동으로... 종목의 정체성까지 변화
역사적으로 볼 때 수영처럼 단기간에 확연히 기록 차가 나타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술도핑으로 인정된 사례는 많지 않다. 어디까지가 기술의 도움이냐는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것이 큰 이유지만 새 기술의 빠른 보급속도도 요인으로 꼽힌다.
러닝화의 경우만 봐도 2019년 6대 메이저 마라톤 대회에서 3위 안에 든 남녀 선수 36명 중 31명이 논란의 나이키 제품을 착용했다. 나머지 5명은 경쟁사인 아디다스 제품을 신었다. 결국 누구나 비슷한 제품을 쓴다면 공정한 경쟁이 된다는 논리다.
실제 IAAF의 규칙도 이런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2017∼2018시즌 규칙은 ‘어떤 기술적인 도움을 받아 착용자에게 부당한 이익을 주거나 불공정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경기화가 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개정된 2018∼2019시즌 규칙에는 기존 내용에서 ‘기술적인 도움’이 삭제되고 ‘보편성 정신에 입각해 모든 종류의 경기화는 합리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됐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킵초게가 ‘서브 2’를 달성할 때 신었던 신발이 대중화될 것이라는 근거로 IAAF가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라 전망한다.

결국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기술도핑의 기준이 과학적 담론에 있다고 말한다. 서울대 강사인 김정효 박사는 “과학이 만들어 낸 기술을 가지고 인위적인 여부를 따지는 기준을 만드는 것 역시 과학이라는 점이 기술도핑의 역설”이라고 설명했다. 박보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는 “단단한 나무 시대의 장대높이뛰기는 장대를 잡고 빨리 올라가는 종목이었다.
하지만 새 장대 도입 이후는 과학자들에 의해 장대의 탄성을 이용해 수평운동을 수직운동으로 바꾸는 기능을 다루는 것으로 이 종목의 정체성이 바뀌었고 기술도핑 논란이 사라졌다”고 예를 들었다.
송용준 기자 eidy015@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더 글로리' 박성훈·'D.P.' 구교환…엘리트 집안 이단아들이 증명한 압도적 이름값
- 가구 공장 임영웅, 간장 판매왕 이정은…수억 몸값 만든 ‘월급 30만원’
- “5만원의 비참함이 1000만원으로” 유재석이 세운 ‘봉투의 품격’
- '명량' 권율·'슬빵' 박호산…마흔 앞두고 개명 택한 배우들의 신의 한 수
- “세균아 죽어라~ 콸콸”…변기에 소금, 뜨거운 물 부었다가 화장실만 망쳤다
-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이미 진행중인 ‘침묵의 지방간’
- “은희야, 이제 내 카드 써!” 0원에서 70억…장항준의 ‘생존 영수증’
- “명함 800장 돌려 0대 팔았다”…1000억원 매출 김민우의 ‘생존법’
- “4480원이 2만원 됐다”…편의점 세 곳 돌게 만든 ‘황치즈 과자’ 정체 [일상톡톡 플러스]
- “13억 빚 정리 후 작은 월세방이 내겐 우주”…김혜수·한소희의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