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니Ⅱ로 확인한 선진국 시장의 가능성
포니Ⅱ 후속을 개발하던 무렵, 정세영 사장은 캐나다 시장조사를 지시한다. 수출시장 개척을 위해서였다. 의외로, 결론은 희망적이었다. “당장 현대차를 팔아도 손색이 없겠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당시 소련의 ‘라다(Lada)’도 연간 7,000~8,000대를 팔고 있는데, 포니Ⅱ라면 더 경쟁력이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번 역시 반대는 사내에서 나왔다. 뒷바퀴 굴림 방식의 포니Ⅱ 대신 새로 개발 중인 차로 승부를 걸자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정세영 사장은 이번 역시 정면 돌파를 선택한다. 1982년 10월, 현지에 상주할 인력을 보내고 현대그룹과 포니에 대한 홍보활동을 시작했다.

나아가 캐나다 대도시마다 개최하는 모터쇼에 빠짐없이 나갔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현지 소비자의 관심은 뜨거웠다. 하지만 실제 포니2를 팔기까진 여러 걸림돌이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시행 중이던 ‘5마일 범퍼’가 대표적이었다. ‘시속 5마일로 충돌했을 때 범퍼 변형이 없어야 한다’는 규정이다. 그 즈음 미국이 규정을 2.5마일로 완화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현대차는 캐나다 또한 규정을 2.5마일로 바꾸려니 예상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꿈쩍 않고 유지했다. 때문에 현대차는 1984년 1월에서야 포니2를 출시했다. 예정보다 8개월 늦었다. 현대차는 원래 1983년 4월 포니Ⅱ를 선보여 5,500대로 첫 해를 마무리할 작정이었다. 허나 1984년 2만5,000대, 1985년엔 7만9,000대나 팔았다.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동시에 미국 자동차 업계의 견제도 막을 올렸다. 소형차를 공격적으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의욕이 앞섰던 캐나다 현지공장 건설
‘폭풍 성장’하던 포니Ⅱ 판매가 차츰 누그러졌다. 설상가상으로, 캐나다 정부는 “현지 공장을 세우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마침 현대차는 공장 위치로 미국과 캐나다를 놓고 저울질 중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캐나다 무역부 장관 스티븐슨이 한국을 찾아와 “정 사장 집에서 밥을 얻어먹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정 사장은 다소 의아했지만 그를 초대했다. 역시나 목적이 있었다. 스티븐슨은 “원하는 조건을 최대한 들어줄 테니 꼭 캐나다에 공장을 세워야한다”고 설득했다. 심지어 “부지 50만 평을 1 캐나다 달러에 주겠다”고 제안했다. “바로 답을 하지 않으면 밥도 먹지 않겠다”고 버텼다.

정세영 사장은 외국기업 유치와 고용증대를 위해 장관이 직접 한국까지 날아와 세일즈하는 열정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결국 현대차는 캐나다 퀘벡주 브로몽(Bromont)에 연간생산 10만 대 규모의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당시 미화 2억9,000만 달러를 투입한 프로젝트로, 현대차의 거침없는 성장세를 안팎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또한, 캐나다뿐 아니라 궁극엔 미국 시장까지 노린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1989년 7월, 현대차는 공장을 완공했다. 창업 18주년을 맞는 해였다. 현대차는 브로몽 공장에서 쏘나타를 만들었다. 그런데 시기가 썩 좋지 않았다. 가령 일본차 제조사들이 현지 생산을 늘리면서 공급과잉 상태였다. 특히 쏘나타를 포함한 중형 세단 시장은 경쟁이 가장 치열했다. 재고가 쌓이면서 인센티브와 광고비 지출로 수익성이 뚝 떨어졌다. 급기야 1993년 10월, 현대차는 브로몽 공장의 가동을 중단했다. 뼈아픈 실패였다.

국산 최초의 앞바퀴 굴림 자동차
한편, 현대자동차(이후 현대차)는 1978년부터 ‘X카 프로젝트’, 즉 앞바퀴 굴림 자동차를 준비했다. 현대차는 수없이 퇴짜 맞은 끝에 일본 미쓰비시로부터 기술을 들여와 계획을 구체화했다. 1984년 1월부터 35대의 프로토타입(시제작차)을 만들어 각종 테스트에 나섰다. 이후 수백 대를 더 제작해 캐나다에서 혹한 테스트, 미국에선 종합 성능테스트를 치렀다. X카의 차명은 ‘엑셀(Excel)’로 정했다. ‘뛰어나다’는 뜻의 영단어 ‘Excellent’에서 따왔다. 스타일링은 포니와 포니Ⅱ, 스텔라를 그린 이태리의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맡았다. 엑셀은 길이와 너비, 높이 3,985×1,595×1,380㎜의 차체에 직렬 4기통 1.3L 77마력, 1.5L 87마력 엔진을 얹었다. 미쓰비시 뉴 미라지용 엔진을 기반으로, 배기량과 출력을 키웠다.

구동바퀴를 앞으로 옮기면서 여러 이점이 생겼다. 우선 엔진 힘을 뒤 차축으로 옮길 프로펠러샤프트가 필요 없어졌다. 엑셀의 공차중량은 1,135㎏. 포니Ⅱ보다 50㎏ 더 가벼웠다. 동력 전달경로가 상대적으로 짧아 힘의 손실도 적다. 엔진을 가로로 얹을 수 있어 실내공간도 넉넉했다. 엑셀은 5도어와 3도어 해치백, 세단 형태의 프레스토 등 3가지로 나왔다. 현대차에게 X-프로젝트는 생사를 좌우할 만큼 절실했다. 30만 대 규모의 공장건설을 포함해 3,969억 원을 투입한 까닭이었다. 엑셀은 국내 소형차 시장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출시 이후 곧장 국내 승용차 판매 베스트셀러로 올라섰다. 엑셀은 만 4년의 수명을 마치고, 1989년 4월 후속 뉴 엑셀에게 바통을 넘기고 물러났다. 누적생산대수는 136만870대였다.
미국에서 일으킨 엑셀 돌풍
현대차는 포니로 캐나다 시장의 문을 활짝 연 이후 미국 진출을 준비했다. 보스턴에 자리한 용역회사의 존 슈냅에게 시장조사를 의뢰했다. 미쓰비시 자동차의 미국 진출 마스터플랜을 짜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감에 넘쳤다. “일본차가 수입규제에 걸려 있기 때문에 현대차가 연간 20만 대는 거뜬히 팔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가격이 문제였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한 대 팔 때마다 300달러 가까이 손해 볼 수밖에 없어요.” 수출을 총괄하던 전성원 부사장의 말이다. 정세영은 “설령 손해 보더라도 딜러와 약속을 지키자”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1달러 당 680원이었는데, 수출에 나설 무렵 980원까지 올랐다. 덕분에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왔다.

1985년 4월, 현대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현지법인 ‘HMA(Hyundai Motor America)’를 설립했다. 이제 판매망을 구축해야 했다. 이때 줄기차게 ‘러브콜’을 보낸 회사가 있었다. 바로 크라이슬러였다. “미국에 엑셀을 독점으로 팔 수 있게 해주면, 크라이슬러 판매망을 통해 전 세계 시장에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세영은 단호히 거절했다. ‘우리 자식은 우리가 시집보낸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일본차로 쏠쏠한 재미 봤던 딜러들의 신청이 밀려들었다. 미국에서 토요타 출신 인재도 대거 영입했다. 결과는 대박. 엑셀은 미국 데뷔 첫 해인 1986년 18만6,000대가 팔리며 <포춘>이 미국 10대 상품으로 선정했다. 이듬해엔 26만 대를 넘어섰다. 1987년 2월 9일, 정세영은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세계 10대 자동차 회사를 목표로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는 소위 ‘6.29 선언’을 한 이후 국내 산업은 극심한 노사분규로 진통을 겪었다. 현대차도 직장폐쇄로 노조에 맞섰다. 그 결과 1987년 9만여 대의 생산차질을 빚으면서 4,000억 원 가까운 매출손실을 봤다. 1988년에도 7만여 대, 3,600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협력업체와 해외 딜러의 손실도 뒤따랐다. 1990년대를 맞아 현대차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GT-10’, 즉 글로벌 톱 10 프로젝트였다. 연간 200만 대 이상의 품질 좋은 차를 만들어 국제 수준의 이익을 내고, 세계 일류 자동차 회사가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1991~1993년 기반 구축, 1996년까지 발전, 1999년 성숙도약기를 거쳐 2000년 세계 10대 자동차 제조사로 도약할 계획이었다.

그동안 노력의 결실도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알파 엔진이 대표적이다. 현대차는 1984년 6월, 영국 리카르도(Recardo)와 기술협력 계약을 맺고, 1,000억 원을 투입해 엔진과 변속기 개발에 나섰다. 엔진 300기, 변속기 200기, 시험차량 150대를 동원했다. 1991년 4월, 현대차는 알파엔진 공장 준공식을 치렀다. 이후 해외 기술연구소도 확충했다. 경기 남양과 마북을 비롯해 유럽과 인도, 중국, 일본, 미국 등 전 세계 8곳에서 운영 중이다. 현지 환경과 법규에 맞는 자동차를 연구하고, 트렌드를 분석해 전하는 역할도 한다. 주행시험 시설도 세계로 뻗어가는 중이다. 2004년 미국 캘리포니아 모하비에 여의도 6배 면적의 종합 주행시험장을 마련했다. 2013년엔 독일 뉘르부르크링에 테스트센터를 열었다. (5부에서 계속)
글/김기범(로드테스트 편집장) 사진/현대자동차
참고문헌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 정세영, 행림출판
<뉴 브릴리언트 컴퍼니>, 박병재, 매일경제신문
<시발부터 쏘나타까지, 국산차 계보>, 박인해, 선우일권, 자동차생활
현대자동차 브랜드 히스토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