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현대자동차 베라크루즈

최근 들어 대형 SUV의 인기가 상당하다. 쌍용자동차가 새로운 대형급 SUV인 G4 렉스턴을 내놓은 이래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던 대형 SUV 시장은 현대자동차 팰리세이드의 등장으로 더욱 가속이 붙었다. 그리고 대형 SUV 시장의 수요가 커지면서 미국에서도 경쟁하고 있는 쉐보레 트래버스까지 데뷔했다. 이 뿐만 아니라 쌍용자동차 G4 렉스턴 역시 마이너 체인지를 통해 상품성을 크게 보강했으며, 기아자동차는 데뷔 11년차인 모하비를 스킨체인지급으로 뜯어 고친 모하비 더 마스터를 내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다.



현대자동차 대형 SUV 라인업의 역사는 현대정공 갤로퍼의 섀시를 기반으로 개발한 테라칸을 시초로 본다. 테라칸은 출시 초기 쌍용 렉스턴에 비해 뒤떨어지는 성능과 올드한 감각의 디자인으로 평가가 좋지 못한 편이었지만 꾸준히 성능을 개량하고 상품성을 개선함으로써 분투했으나 결국 렉스턴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리고 2006년, 현대자동차는 기존에 없었던 방식의 대형 SUV를 내놓으며 시장의 이목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이 차의 이름은 바로 ‘베라크루즈’다.


베라크루즈(Veracruz)는 현대자동차가 국내 시장은 물론, 북미시장 수출까지 염두에 두고 개발한 전략 차종이다. 차명인 베라크루즈는 멕시코 동부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이다.

 
 
베라크루즈는 외관에서부터 전통적인 SUV의 스타일링과는 크게 다른 감각을 자랑했다. 2세대 싼타페(CM)와 초대 투싼 등을 통해 나타난, 단순하면서도 볼륨감 있는 스타일링 기조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한 편, 대형 모델에 어울리는 화려한 디테일을 더해 승용 세단의 고급스러운 감각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베라크루즈의 길이는 4,840mm이고 높이는 루프랙 적용 여부에 따라 1,750~1,805mm까지 높아지며, 폭은 기본 1,945mm에 사이드 스텝을 적용하면 1,970mm였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덩치를 자랑했으며, 휠베이스는 2,805mm로 동급 최장을 자랑했다. 공차중량은 3.0 디젤 모델을 기준으로 사륜구동 적용 여부에 따라 2,030~2,115kg까지 나갔다.



인테리어 역시 기존과는 전혀 다른, 현대적이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내세웠다. 선대인 테라칸이 그 외모만큼이나 투박한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베라크루즈는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자사의 승용 세단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디자인 큐를 반영함으로써 고급 세단의 인테리어에 가까운 분위기를 완성했다. 물론 편의장비 역시 동급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승차 정원은 7인승으로, 2-3-2 배열의 좌석 배치를 가지고 있었다. 실내공간 역시 동급 최대 수준을 자랑했다.



현대 베라크루즈는 기존의 대형 SUV들과는 전혀 다른 구조로 설계되었다. 바로 일반 승용차와 같은 일체형(Monocoque) 차체구조를 적용한 것이다. 베라크루즈의 일체형 차체구조는 싼타페(CM)의 것을 확장한 구조로 설계되었으며, 이 때문에 기본적인 구동방식 역시 전륜구동을 기본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테라칸을 비롯한 종래의 대형급 SUV의 경우, 고전적인 바디-온-프레임(Body-on-frame) 차체구조와 후륜구동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설계라고 할 수 있었다. 일체형 차체구조는 차대(Chassis)와 차체(Body)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바디-온-프레임 구조에 비해 설계적인 자유도가 높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을 십분 활용하면 충격흡수 설계와 구조강성, 최적화 등 바디-온-프레임 구조보다 더욱 가벼우면서도 충돌안전과 승차감에도 유리한 차체구조를 구현할 수 있다. 사륜구동 시스템 역시 고전적인 파트타임 사륜구동 대신, 중소형급 크로스오버에 사용되고 있었던 상시사륜구동(AWD)을 전격 채용했다.



엔진은 베라크루즈를 위해 새롭게 개발한 ‘S엔진’을 채용했다. S 엔진은 2006년 현대자동차가 내놓은 첫 승용형 V6 디젤 터보 엔진이다. 총 배기량 2,959cc(3.0리터)에 밸브트레인은 실린더 당 4밸브의 DOHC 방식을 사용하며 터보차저는 전자식 가변 지오메트리 터보차저(Variable Geometry Turbocharger, VGT)를 사용한다. 압축비는 17.3:1이며, 연료는 1,600 bar의 압력으로 분사 가능한 피에조 인젝터를 사용했다. 실린더 헤드는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한다.


베라크루즈에 사용된 S 엔진은 국내 자동차 업계 최초로 실린더 블록에 컴팩트 흑연 주철(Compacted Graphite Iron, 이하 CGI)을 적용한 엔진이다. 컴팩트 흑연 주철은 기존의 주철과는 다른 물성을 가지는데, 특히 디젤 엔진에 요구되는 ‘강성(Stiffness)’과 ‘인장강도(Tensile Strength)’, ‘내구성(Durability)’, 그리고 ‘피로강성(Fatigue Strength)’ 면에서 유리한 점들이 있다. 이 중에서도 강성과 내구성이 특히 우수하다. 이러한 덕분에 기존의 동급 디젤엔진에 비해 가볍고 컴팩트한 설계가 가능했다. S 엔진은 같은 배기량의 주철제 디젤엔진에 비해 실린더 블록 중량은 20% 이상 절감하면서 높이와 폭은 각각 5%가량, 엔진의 길이는 10%이상 줄어들어 엔진의 체적 또한 소형화되었으며, 정숙성마저 우수했다. 베라크루즈에 탑재된 S 엔진은 240마력의 최고출력과 46.0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했다.


2006년 출시된 가볍고 탄탄한 일체형 차체구조와 승용 세단에 준하는 질감을 가진 서스펜션, 그리고 강력한 엔진까지 탑재한 베라크루즈는 뛰어난 가속성능과 우수한 고속주행 안정성, 그리고 승용 세단에 준하는 우수한 승차감까지 갖춰, 본격적인 고급 SUV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베라크루즈는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전형적인 고급 대형 크로스오버 SUV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대형급 SUV는 여전히 바디-온-프레임 차체구조와 파트타임 사륜구동이 상식에 가까웠던 시절이었다. 크로스오버가 통하는 카테고리는 중소형 모델들에 해당하는 사항이었고, 여전히 대형급에서는 고전적인 방식의 SUV가 더 선호되고 있었다. 베라크루즈는 당시 기준으로 꽤나 선진적인 내용을 가진 차였지만 시장에서는 상당히 생소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게다가 2년 뒤인 2008년에는, 기아자동차에서 새롭게 내놓은 SUV, ‘모하비’가 등장하면서 베라크루즈는 더더욱 기를 못 펴게 되었다. 모하비는 당시 대형 SUV 시장에서 선호되고 있었던 바디-온-프레임 방식의 차체구조와 파트타임 사륜구동, 그리고 베라크루즈 못지 않은 다양한 편의사양을 만재하여 국내 대형 SUV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베라크루즈는 그 후로도 꽤나 오랫동안 현재자동차 SUV 라인업의 플래그십으로서 기능했다. 2012년에는 성능 개량이 이루어진 S-II 엔진을 새롭게 적용했다. S-II 엔진은 기존 S 엔진에 비해 더욱 향상된 255마력의 최고출력과 48.0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했다. 그리고 동년에 싼타페(DM)의 연장형 모델로 만들어진 맥스크루즈(Maxcruz)가 등장하면서 수출 시장에서 베라크루즈를 대체했지만 내수시장에서는 여전히 베라크루즈가 플래그십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는 엔진과 체급 등 모든 면에서 베라크루즈가 중형인 싼타페 기반의 맥스크루즈보다 우위였고 같은 엔진을 공유하는 모하비와의 경쟁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베라크루즈는 데뷔 9년차를 맞은 2015년까지 생산이 이어졌다. 그리고 베라크루즈는 지속적인 판매 부진과 함께 S-II 엔진의 유로-6 대응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아 2015년을 끝으로 단종을 맞았다. 베라크루즈는 ‘대형 SUV의 크로스오버화’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시도를 했지만 그로 인해 시장에서는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 받지 못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베라크루즈의 컨셉트를 어느 정도 잇고 있는 팰리세이드가 밀려드는 주문량을 감당하지 못해 출고 지연에 시달리고 있는 오늘날에 비춰 보면 베라크루즈는 확실히 시대를 앞서갔던 차였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