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 꽃다운 나이에 스러진 '한국 최초 여성 올림피언' 박봉식 [김경호의 스포츠gogo학]

김경호 선임기자 jerome@kyunghyang.com 2019. 7. 2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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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중 5학년 박봉식이 1948년 런던 올림픽 개막일 다음날인 7월 30일 오후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여자 투원반에 출전해 힘차게 원반을 던지고 있다. 연한 하늘색의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박봉식은 1차 파울, 2차 33m80, 3차 파울에 그치며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한체육회 제공

“영국 런던에서 열릴 세계 올림픽을 목표로 조선의 운동계는 일즉이 없던 맹렬한 활기를 띠어 출중한 선수가 수없이 발견되고있는데 그 중에 하나로 서울 이화여자중학교 5년 박봉식(19)양은 원반 던지기에 37m 8이라는 신기록을 내었다 한다. 이는 국내에서 신기록일 뿐 아니라 구라파 기록인 33m 8에 비기어도 4m나 초과하였으며 베를린 올림픽 때에도 37m 밖에 되지 못하였든 만치 박양의 런던 올림픽 대회 참가는 틀림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1948년 4월 28일자 경향신문은 이화여중 5학년(현재의 고2) 박봉식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넘는 세계적인 기록을 세웠다고 전했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는 “처녀의사 유관순 양을 길러낸 이화여자중학의 또 하나의 보배이며 조선체육의 자랑인 동교 5학년생 박봉식양”으로 소개하고 “박 양의 올림픽 파견문제는 조선 여성체육 발전의 앞날을 위하여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2년여 짧은 경력에도 그는 출중한 성적으로 이미 ‘조선체육의 자랑’이 되어 있었다. 박봉식은 그해 7월 29일 개막한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한국 대표 52명 중 유일한 여자선수로 출전했다. 59개 참가국 중 33개국 여자선수 390명 가운데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국가 출범을 앞둔 ‘코리아’의 홍일점 선수라서 현지 언론의 집중취재 대상이 됐다.

1948년 6월 이화여중 교정에서 열린 제14회 런던 올림픽 출전선수 환송식에서 농구 대표선수로 출전하는 이화여중 농구부 이상훈 코치와 나란히 포즈를 취한 박봉식. 농구원로 박정숙 네이버 블로그 mystoryhistory 제공

박봉식은 6월 20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환송회에서 장도에 오르는 각오와 자신감을 비쳤다.

“여자가 저혼자이기 때문에 좀 섭섭해요. 압흐로는 이런 대회에 우리 조선 여성도 만히 참가하도록 해주기를 미리 부탁해요. 그러나 오빠 선수들이 저만큼이라도 가게 되니 퍽이나 마음이 든든해요. 조선여성을 대표하야 아니 전조선민족을 대표하야 나가느니 만큼 조선사람도 이러타는 것을 뽐내도록 힘을 다할 작정이요. 기록이라고요? 과히 뒤떠러진것갓지 안해요. 우리가 다녀올 동안 안녕히들 게서요.”(동아일보 1948년 6월 20일)

사실 출발 전까지 외국 선수들과의 기록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20일 넘는 고단한 원정길로 현지에 도착했을 땐 너무 지쳐 있었고, 국제경기 경험이 없는것은 큰 약점이었다.

박봉식은 올림픽 개막 다음날인 7월 30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육상 경기 첫날 큰 기대를 받으며 출전했으나 1차 시도에서 실격했고, 2차 시도에서 개인기록에 못미치는 33m 80에 그쳤다. 3차 시도 마저 파울이 되면서 그는 우승자 스텔마이어(프랑스)의 41m 92에 훨씬 못미치는 기록으로 18위를 차지했다. 앞서 38m, 39m를 가볍게 던지는 경쟁자들을 보고 22명 중 12번째 던진 박봉식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 6월 제14회 런던 올림픽 출전선수 환송식에서 대표선수들과 나란히 꽃다발을 받은 박봉식(오른쪽). 농구원로 박정숙 네이버 블로그 mystoryhistory 제공

대표 선수단과 동행한 서울중앙방송 민재호 아나운서는 당시 상황을 상세히 묘사했다.

“7월 30일(금), 청. 오늘부터 경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오늘 우리 첫 경기는 박봉식 양의 투원반이었다. …(중략)… 박양은 런든에서도 우리선수 일행 중에 누구보다도 널리 소개가 되었다. 그것은 도대체 올림픽에 처음 참가하는 우리나라의 단 한 사람인 여자선수인 것과 또 우리가 런든에 갔을때까지 아직껏 외국서 온 여자가 박봉식양 밖에는 없었던 때문에 더욱 그랬다. 여러 신문사에서 우리 팀을 찾았는데 그들은 반듯이 단 하나인 여자선수 박 양을 찾아서 사진을 찍어 신문에 발표했다. 몇살이냐, 키가 몇 척이냐, 무슨 학교냐, 운동년조는 몇해냐, 시시콜콜이 물었다. 박양이 이렇게 소개가 많이 되었던 만큼 우리 선수 외의 다른 나라 사람들도 박양에 대해서 관심이 컸다. …(중략)… 투원반 예정시간은 오후 3시 30분부터였는데, 한참만에 오후 4시가 아주 썩 지났을 때 여자 투원반 선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멀리서나마 목을 뽑아가지고 박양을 찾아도 얼핏 뵈지 않더니 한참만에 목 하나가 작은 선수가 보이기에 자세히 보니 그가 박양이었다. …(중략)… 그것은 참으로 이상했다. 본국에서는 물론이오, 영국에 가서도 그랬고, 오늘 아침 식탁에서 마주봐도 분명히 키가 큰 선수였는데 국제선수들 틈에 모여 선 박양을 보니 목하나는 작은 아주 어린 소녀 같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았다. 사람이 바지랑대가 아닌 이상 키로만 우열을 가릴 것이 아니니 다음 순간에 버러질 실력의 싸움을 보자고 기다렸다.”(런든 올림픽 기행·1949년 수로사)

선수단 자료집에 실린 박봉식의 키는 160㎝. 국내에선 큰 키였지만 경쟁자들에겐 형편없이 처졌다. 최근 개인 블로그를 통해 이화여중 시절 친구 박봉식을 회상한 농구원로 박정숙(90) 전 어머니 농구회 회장도 “봉식이는 키가 컸다. 한 170㎝쯤 됐을 것”이라고 회상했지만 조선올림픽위원회가 발간한 ‘ⅩⅣ 올림픽 경기대회 조선대표선수단명부 1948’에는 박봉식, 160㎝, 60㎏으로 소개돼 있다.

“박양은 열두 번째로 던졌다. 여자 투원반에 출전한 전 선수가 22명이었으니 거이 중간쯤 해서 던졌다. 밖에 있는 우리들은 박양이 나와 서는 것을 보고 과연 얼마나 던질는지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중략)… 다름이 아니라 이미 박양보다 앞서 던진 선수들이 39m, 38m를 훨훨 손쉽게 던지기 때문이었다. …(중략)… 던졌다. 박양이 던진 원반은 꽤 높이 솟았다가 떨어졌는데 아깝게 반칙이었다. 반칙이므로 해서 재지를 않아서 몇m를 던졌는지 알 수 없으나 39m, 38m를 알리는 표식에는 훨신 미치지 못했다. 박양은 다시 던졌다. 이번의 기록은 뜻밖이었다. 너무나 줄었다. 나가다가 멎는 것 같았다. 33m 80 밖에는 던지지를 못했다. 이에 우리는 관중석에서 우정환 군의 선창으로 ‘플레이, 플레이 박봉식, 플레이 플레이 박봉식!’을 외쳤다. 박양은 우리의 응원소리를 알아들었다는 듯 용기를 새롭게 해서 다시 던졌으나 아깝다 마지막은 그만 파울이 되고 말았다. 세번 던진 성적의 두 번이 반칙이고 겨우 살아남은 기록은 33m 80이었다.”(런든 올림픽 기행)

민재호는 경기 결과를 두고 “유럽에서는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도 스포츠 속에서 산다”면서 여성 스포츠가 낙후된 우리의 현실을 반성했다.

“오늘 성적과는 선후되는 얘기지만 구라파는 이미 남자가 그렇듯이 여자도 어떤 층에서만 스포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여자가 모두 다 스포츠를 생활의 일부로 삼고 있는 것이었다. …(중략)…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낱 여자중학교 소녀 중에서 원반을 한 2년 동안 던져보았다고 우리나라 전 여성을 대표시켜서 어려서 스포츠속에 컸고, 커 가지고 본격적으로 기술을 연마해서 그 기술이 이미 극지에 이른 사람들과 싸울 것을 부탁했고, 싸우되 이길 것을 바랬으니 스포츠가 용행이나 투기가 아닌 이상 이 어찌 가능할 일이랴.”(런던 올림픽 기행)

올림픽에선 실망스런 결과를 안고 돌아왔지만 박봉식은 이듬해에도 39m 65의 한국신기록을 내며 성장했다. 1949년 6월 11일 이화여중을 졸업한 그는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급성 맹장염이 발병했지만 수술을 미루고 전국육상경기대회에 나가 39m57을 기록하는 투혼을 보였다. 그를 극진히 치료한 의사가 당대 최고 선수를 위해 특별히 경기장에 대기했다는 미담은 ‘이 기백에 그 간호, 박봉식양 둘러싼 가화’라는 제목의 기사로 전해진다.

“런던 국제올림픽 대회에 여자선수로 단독 출장하였던 박봉식은 지난 10일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던 전국육상경기대회 출전을 앞두고 돌연 급성 맹장염이 발생하여 교통부병원 민외과 의장의 간곡한 치료로 인하여 경기 당일에 신병을 무릅쓰고 출장하여 이날 투원반 경기에 있어 종래의 자기기록 39m 76은 돌파치 못하였으나 39m 57이란 양호한 대회 신기록을 지은후 교통부 병원에 입원하여 13일에 수술을 받았다는 바 민외과 의장은 경기 당일 운동장에 출장하여 박양을 위하여 응급수당까지 가하는 특지를 보인바 있으며 박양은 여자선수로소 최후까지 신병을 돌보지 않고 체육정신을 발휘한데 있어 일반은 칭찬이 자자하다고 한다.”(동아일보 1950년 6월 14일)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통인 1951년 뇌막염을 앓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맹장염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정도로 강건한 체력과 투지를 가졌지만, 의료상황이 최악이었던 전쟁의 혼란 속에서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안타깝게 스러졌다.

너무 일찍 생을 마감했기에 그에 관한 자료나 기록은 거의 없다. 대한육상연맹도, 대한체육회도 그에 관한 자료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 학계의 연구도 없다. 런던 올림픽 당시의 사진 한 장과 신문기사 등이 전부였다가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SBS가 영국 BBC로부터 그의 경기 영상을 입수해 보도한게 수확이었다.

대한육상연맹에서 확인한 박봉식의 여자 투원반 한국신기록은 1947년 32m48, 1948년 39m 57, 1949년 39m 65로 신문보도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그의 기록은 1966년 박영숙(41m39)에 의해 깨졌다.

최근엔 농구원로 박정숙 전 어머니농구 회장(90)의 블로그 ‘mystoryhistory’에 ‘이화여중 친구 박봉식’이 소개되면서 그의 학창시절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새로 발굴됐다. 박정숙 전 회장은 국립체육박물관의 연락을 받고 관련 자료를 기증하기로 했다.

1948년 6월 이화여중 교정에서 열린 런던 올림픽 대표선수 환송식을 마친 뒤 박봉식(아랫줄 왼쪽 3번째)이 함께 대표선수로 출전하는 이상훈 이화여중 농구코치를 비롯한 친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농구원로 박정숙 네이버 블로그 mystoryhistory 제공

박 전 회장은 “봉식이는 수더분하고, 까불지도 않고 무던한 성격이었다”며 “결혼도 하기 전에 병으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안타깝다”고 회고했다. “중국에서 이화여중으로 유학왔는데 자전거, 스케이트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처음엔 농구도 했는데, 자꾸 육상에서 끌어갔다. 서울운동장에서 전국 학교대항 육상대회를 하면 계주에서 내가 먼저 뛰고 강흥업, 박봉식에 이어 장석호가 마지막에 뛰었는데 늘 우리가 1등이었다.” 장석호는 여자 100m 한국신기록 보유자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올림피언’ 박봉식의 의미있는 첫걸음으로 시작된 한국 여성스포츠의 올림픽 도전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배구의 동메달, 1984년 LA 올림픽 양궁 서향순의 금메달로 이어져 결실을 맺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세계 10위권을 지켜온데는 박봉식으로부터 출발한 여성선수들의 기여가 절대적이었다.

김경호 선임기자 jerom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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