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3x3계의 다윗, 심장으로 농구하는 남자 한준혁

민준구 2019. 9. 15. 14:58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점프볼=민준구 기자] 대한민국 171cm 중 가장 큰 남자. 한준혁은 최근 3x3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됐다. 대한민국 남성 평균 키(173cm)에 조금 못 미치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 190cm가 넘는 거구들을 상대로 돌진하고, 점수까지 뽑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프로 3x3 선수이자 유명 유튜버로 활동 중인 한준혁. 그의 작은 몸에 담긴 파란만장한 농구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아버지를 통해 맛본 농구의 매력
한준혁과 농구의 첫 인연은 아버지를 통해 이어졌다. 아버지와 함께 관람한 대구 오리온스의 농구를 보면서 김승현을 알게 됐고, 이후 그와 같은 선수가 되고 싶어 엘리트의 길을 걷게 됐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아버지와 함께 대구실내체육관을 찾았는데, 그때 김승현 선수의 플레이에 빠지게 됐어요. 플레이가 정말 엄청났거든요. 모든 관중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역시 ‘김승현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열정만으로 정상급 선수가 될 수는 없었다. 신체적인 한계가 한준혁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또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주로 사용하게 되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

한준혁은 “농구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 코치님께서 슛을 한 번 던져보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김승현 선수처럼 왼손으로 멋지게 던지려고 했었죠(웃음). 사실 오른손잡이였던 제가 왼손으로 농구를 시작한 것 자체가 잘못된 거였는데…. 그걸 깨닫는 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죠. 하하. 코치님도 제가 오른손잡이인지 모르셨어요. 그렇게 잘못된 시간이 흘러흘러 동국대까지 이어지게 된 거죠. 평소 생활을 하던 손은 오른손인데 농구는 왼손으로 하다 보니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라며 회상했다.

잘못된 습관, 더불어 더 이상 자라지 않은 신장에 의해 한준혁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2012년 4월 5일, 연맹회장기 명지중과의 경기에서 27득점 11리바운드 11스틸로 트리플더블을 기록했음에도 ‘빠른 단신가드’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더 좋은 환경, 그리고 경쟁을 위해 상주중에서 용산중으로 전학을 갔을 때도 그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았다.

“용산고로 진학한 후, 좋은 멤버들과 함께 운동하면서 많이 발전할 수 있었어요. 특히 (허)훈이 형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죠(웃음). 야간 연습을 할 때마다 음료수 내기를 했었거든요. 당시 훈이 형은 고교 최고의 선수였고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어요. 그만큼 배울 점도 많았고, 같이 운동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또 용산고가 당시만 하더라도 경복고와 함께 고교 최강이었거든요. 같이 운동하면서 이런저런 플레이도 해보고 여러 가지로 정말 많은 도움이 됐던 시절이었어요.”

▲ 동국대의 슈퍼 식스맨에서 일반인으로
“그때만 생각하면 후회가 돼요. 조금은 거만했던 시절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만큼 많이 기회를 받았고, 좋은 선수들과 뛰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더 후회되는 시기예요.”
한준혁에게는 예민할 수 있는 시기, 그건 바로 용산고에서 동국대로 진학했을 때였다. 용산고 2학년 시절부터 주전으로 뛰었던 그는 박규훈 코치의 집중 조련으로 고교에서도 수준급 가드로 평가받았다. 작은 신장은 여전히 약점으로 꼽혔지만, 용산고가 고교무대에서 강자로 군림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해냈다. 당시 대학무대에서 다크호스로 꼽힌 동국대 역시 그를 눈여겨 봤고, 스카우트에 성공한다. 동국대에는 이미 ‘초고교급 가드’ 변준형이 버티고 있었기에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지만, 슈퍼 식스맨으로 팀의 한 축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 선수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준혁은 돌연 농구공을 놓게 된다.

“농구를 너무 사랑했어요. 좋은 지도자분들에게 도움도 받았고, 기회 역시 많이 받았죠. 근데 점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어요. 농구 인생에 있어 꼬리표처럼 달라붙은 ‘슛 없는 선수’라는 평가가 지워지지 않았던 거죠. 팀내 불화설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제 능력에 대한 정체가 더 문제였어요.”

동국대 시절까지만 해도 한준혁은 여전히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슛을 던졌다. 잘못됐음을 깨달았지만,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한준혁은 “당시 모비스 선수들이 슛감을 기르기 위해 야구공으로 캐치볼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동국대에 야구부가 굉장히 유명한데 그 선수들과 캐치볼을 해보니 제구가 전혀 안 되는 거예요. ‘슛 없는 선수’라는 평가가 왜 지금까지 있었는지 제대로 깨달은 때였죠. 근데 바꾸기가 쉽지 않았어요. 대학리그에서는 식스맨으로 뛸 수밖에 없었고, 실전에서 오른손을 사용할 기회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회의감이 심해지면서 농구를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생기더라고요. 결국 10년 가까이 해왔던 농구를 손에서 놓게 된 계기가 됐어요”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엘리트 선수의 길은 포기했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한준혁은 영남대 체육학부로 편입했고, 진정한 오른손잡이가 되기 위해 ‘경남농구의 아버지’ 장석구 선생님을 찾아갔다. “농구는 그만뒀지만, 일반인으로서의 농구는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슛을 더 잘 던지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고, 연습도 더 많이 했죠. 그러던 중에 장석구 선생님을 찾아갔고, 3주간 합숙을 하기도 했어요. 3~4개월 동안은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요. 손목도 붓고 열도 나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죠(웃음). 근데 점점 슛 거리가 길어지고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서서히 프로 선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죠.”



▲ 운명처럼 찾아온 3x3 농구
교직 이수를 위한 공부, 그리고 농구까지 병행하고 있던 한준혁은 운명처럼 찾아온 3x3 붐에 동참하게 된다. 빠르고 강했던 한준혁에게 안성맞춤이었던 3x3. XTM에서 방영한 농구 프로그램 「리바운드」에 출연해 인지도를 쌓기도 했다. 당시 한준혁은 자신의 우상이었던 김승현과 하하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박민수, 전상용, 방덕원, 김상훈 등을 제치고 전체 1순위로 지명됐다. 한준혁은 “저를 전체 1순위로 뽑아서 우승을 못 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때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꾸고 있었는데 외곽에서 슛을 전혀 던지지 못했었거든요.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았죠. 지금은 친했던 (박)민수 형과의 라이벌 관계도 있었고, (이)케빈 형과의 신경전도 있었으니까요. 특히 케빈 형에게는 지금도 많이 미안해요. 너무 동안이셔서 결혼하신 줄도 몰랐어요. 그런 형에게 그렇게 도발을 했으니…. 지금은 서로 안부를 물을 정도로 친해요”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리바운드」를 시작으로 한준혁의 3x3 사랑이 시작됐고, 코리아투어 3x3 대구대회는 3x3 슈퍼스타로 올라서는 신호탄이 됐다. 당시 한준혁은 김동우, 노형래, 전재우와 함께 영남대에서 열린 대구대회 정상에 섰다. 이후 여섯 번째 코리아투어 3x3 대회였던 광주대회에서도 정상에 서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 출전 기회를 얻었다.

한준혁이 버틴 ‘창원 어시스트’는 23세 이하만 출전할 수 있었던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다. 그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상대는 없었고, 한준혁 역시 생애 첫 국가대표의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갑자기 등장한 ‘KBL 윈즈’는 한준혁을 당황케 했다.

“깜짝 놀랐어요. 저희는 당연히 아시안게임 대표로 선발될 줄 알았거든요. 실제로 U23부와 일반부가 함께 경기를 치렀는데 저희가 예선 전승으로 결선 토너먼트에 올랐잖아요. 근데 갑자기 나타난 KBL 윈즈 때문에 걱정이 많았죠. 이런 일도 있었어요. 예선에서 2승을 거두고 난 후, 고민이 많았어요. 마지막 예선 경기를 이기면 4강에서 민수 형이 있는 NYS를 만나게 되고, 지면 KBL 윈즈와 붙게 됐죠.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어요. 신장적인 면에서 (방)덕원이 형이 있는 NYS보다 KBL 윈즈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죠. 근데 예선에서 1패라도 하면 강적인 남일건설을 8강에서 만나야 했어요. 자칫 잘못하면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 마지노선이었던 4강에도 못 갈 가능성이 생긴 거죠. 또 4강에 직행하면 상금이 두둑했어요. 여러 생각을 하다가 결국 전승을 하게 됐고, NYS를 만나게 된 거죠.”

아쉽게도 창원 어시스트는 NYS와의 4강전에서 20-21로 셧다운 패배를 맛보고 만다. 마지막까지 추격전을 벌이며 20-20 동점을 이뤘지만, 김민섭에게 파울을 범했고, 결승 자유투로 패하고 말았다. 기대했던 KBL 윈즈와의 결승은 성사되지 못했고, 한준혁의 꿈이었던 국가대표 역시 물 건너갔다. 한준혁은 “정말 아쉬웠죠. 물론 4강에 올랐기 때문에 국가대표 자격은 있었어요. 그래도 프로 선수들끼리 나가는 게 더 그림이 좋으니까 이해할 수 있었죠. 그래도 NYS 형들을 넘길 수 있었는데…. 정말 아쉬워요(웃음)”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 이후 한준혁은 박민수와 함께 3x3 스타로 자리했다. 우후죽순 불어난 3x3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모두 제2의 박민수, 한준혁을 꿈꾸며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김선형, 오세근, 이대성보다 박민수, 한준혁을 아는 어린 학생들이 더 많아진 세상이 된 것이다. 이른바 ‘한스타’라는 멋진 닉네임과 함께 한준혁의 삶에 전성기가 찾아왔다.

▲ 눈물의 드래프트 낙방, 달라진 인생
3x3 대회에서의 성공은 한준혁에게 프로선수라는 꿈을 꾸게 했다. 약점으로 꼽힌 슛을 보완했고, 스피드와 탄력, 그리고 파워 역시 대학시절보다 업그레이드 된 만큼 프로에서도 통할 거라는 평가를 받았다. 운명의 시간은 곧 찾아왔고, 2018년 11월 26일 잠실학생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 기대는 있었어요. 그리고 후회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동안 농구를 해오면서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항상 잊지 않았거든요. 도전도 안 하고 포기하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언론에서도 많이 주목해주셔서 기대도 됐죠. 근데 결과적으로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 됐어요.”

그 해 드래프트에서는 46명의 참가자 중 21명이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 중 한준혁의 이름은 없었다. 놀라운 그리고 가혹한 결과였다. 한준혁은 “공개처형이라는 표현을 해도 될까요? 개인적으로 너무 가혹한 일이었어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제 이름이 불리지 않았고, 한준혁의 농구가 이대로 끝나는 것 같았죠. 모든 지명이 끝나고 나서 사회자가 엔딩 멘트도 하지 않는 걸 보면서 쓸쓸함을 느꼈어요. 어떤 선수는 셔츠를 찢기도 했고, 울기도 했죠. 저 역시 쓸쓸하게 드래프트 현장을 떠났어요. 더 이상 이런 경험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죠”라며 그날의 아픔을 곱씹었다.

기대했던 프로 선수로서의 길은 걷지 못했지만, 한준혁의 농구가 끝난 건 아니었다. 3x3를 통해 최고의 스타가 됐고, KOREA 3x3 프리미어리그 트라이아웃에 참가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를 유심히 지켜본 팀들 가운데 가장 강렬한 러브콜을 보낸 팀은 바로 ‘코끼리 프렌즈’였다. 한준혁을 애타게 원했던 그들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내밀었다.

“사실 세 군데에서 제의가 왔었어요. (한)재규형이 있는 세카이에가 가장 먼저 제의를 했는데 빨리 확정 짓기를 원했어요. 전 다른 팀들의 제안을 더 듣고 싶었고, 기다리던 도중에 코끼리 프렌즈에서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내밀더라고요. 그때도 유튜브를 하고 있었는데 코끼리 프렌즈에서 유튜브 촬영팀을 붙여준다는 거예요. 그리고 선수 구성 권한까지도 제게 줬어요. 그때 (김)철이 형과 (이)정준이 형, (이)강호 형, (김)동현이 형을 선택하면서 저만의 팀을 만들 수 있었죠. 대신 유튜브 촬영팀에게 지급될 비용을 저와 함께하는 (최)광원이한테 주는 걸로 합의를 했어요. 같이 고생했는데 혼자 떠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프로 드래프트 낙방 후,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았지만, 다시 올라설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코끼리 프렌즈는 한준혁과 함께 3x3 프리미어리그 2, 6라운드 우승을 거머쥐었다. 도쿄 다임, 세카이에, 무쏘 등 강팀들이 득실거렸지만, 매 경기 드라마틱한 승부를 연출하면서 환상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한준혁은 2, 6라운드에서 MVP에 선정되면서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3x3 프리미어리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잘하는 팀들이 모인 대회잖아요. 큰 대회에서 정상을 차지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의미로 다가와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하기 위한 동기부여도 되고요. 사람 욕심이 끝이 없듯 앞으로 남은 라운드에서도 우승을 하고 싶어요.”



▲ 유튜버로서의 삶, 마지막 국가대표를 향한 꿈
한준혁은 현재 「한준혁 YouTube」라는 채널을 개설해 유튜버의 삶을 살고 있다. ‘한준혁을 이겨라’부터 3x3 프리미어리그 하이라이트 영상 등 다양한 컨텐츠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어느덧 구독자도 18,076명(7월 22일 현재)에 이르렀다.

한준혁은 “3x3을 하면서 그리고 어린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면서 농구의 즐거움을 찾았고, 또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사실 금전적인 부분도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데(웃음) 코끼리 프렌즈와 함께 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됐어요. 광원이도 저랑 같이 하면서 고생도 많은데 이제는 코끼리 프렌즈의 영상팀으로 합류했고, 금적적인 부분을 해결하면서 걱정을 덜 수 있었죠”라며 즐거워했다.

프로팀 스카우트의 관심을 받기 위해 시작했던 유튜브는 이제 한준혁의 삶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단순히 돈만 바라본 것은 아니다. 시키는 대로, 누군가 바라는 대로 농구를 해왔던 그에게 있어 스스로 재미를 찾아간다는 자체가 인생의 활력소가 된 것이다. 한준혁은 “여러 대학, 그리고 프로팀 체육관을 찾아다니며 일반인들과 일대일 대결을 하는 컨텐츠가 있어요. 한 번에 수십명과 일대일 대결을 하게 되는데 사실 힘들긴 해요(웃음). 그래도 재밌는 에피소드도 생기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얻는 것도 있어요. 지금 이 순간, 농구를 사랑하는 어린 친구들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제게 있어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에요”라며 흐뭇한 웃음을 보였다.

이제는 3x3 프로 선수와 유튜버로서의 인생을 살고 있는 한준혁. 그러나 10년 가까이 경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한준혁에게 승부사의 피는 여전히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지난해 이루지 못했던 국가대표의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한준혁의 눈은 10월 2일에 맞춰져 있다. 중국 시안에서 열릴 FIBA 3x3 U23 월드컵 2019가 개최되는 날이다. “3x3는 U23 랭킹이 따로 있는데 최근 국내 랭킹 1위로 올랐어요. 코리아투어 서울대회에 참가하면서 선발 자격도 얻었고요. 자신 있어요.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과 경쟁하는 걸 항상 꿈꿔왔거든요. 지금 성적을 유지한다면 충분히 선발되지 않을까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제대로 준비해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특별하지 않은 남자 한준혁. 우리는 평범한 신체 조건을 가진 작은 청년에게 열광하고 있다.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한다’는 앨런 아이버슨의 말처럼 한준혁 역시 작은 키에 굴하지 않고, 수많은 장신 선수들을 쓰러뜨리고 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도 조금씩 밝게 빛나고 있다. 프로농구 선수를 꿈꿨던, 그리고 모든 게 무너졌지만, 다시 이겨낼 수 있었던 한준혁의 인생사는 우리에게 ‘포기’란 단어를 잊게 한다. 이제 그의 핑크빛 인생은 시작점에 있다.



BONUS ONE SHOT.
“우리는 운명” 한준혁과 최광원의 인연

“광원아 내 영상 한 번 찍어볼래?” 프로 선수를 꿈꾸고 있던 한준혁은 자신의 훈련 영상, 그리고 3x3 대회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프로 팀 스카우트에게 어필하려 했다. 일반 대학선수들에 비해 노출될 기회가 적었던 만큼, 그가 선택한 건 바로 유튜브였다.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게 된 최광원은 한준혁의 플레이 영상을 촬영했고, 자연스럽게 그의 인생 역시 달라지게 됐다.

“처음 광원이를 알게 된 건 운명적이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어린 친구들이 농구 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이메일을 보낼 때가 있었는데 광원이도 그중 한 명이었어요. 사실 프로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답장해주기가 어려웠는데 광원이는 15~20줄 정도 되는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고, 읽지 않을 수가 없었죠. 광원이는 아주대 농구 동아리의 회장이었어요. 키가 작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농구를 잘할 수 있을지 물어보더라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졌고, 프로 진출을 준비하던 제가 영상 촬영을 먼저 제안했어요. 광원이는 사실 영상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는 친구였는데 저 때문에 시작하게 됐죠(웃음).”

평소 컴퓨터에 관심이 많던 최광원은 금세 영상 촬영에 익숙해졌고, 지금은 코끼리 프렌즈 영상팀의 일원이 됐다. 지금은 영상 관련 학과로의 전과 또는 복수전공을 알아볼 정도. “유튜브는 저 혼자만 있다고 해서 영상을 올릴 수가 없어요. 물론 혼자 촬영하고 편집할 수는 있겠지만, 퀄리티가 떨어지겠죠. 광원이가 있어서 정말 고마웠어요.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금전적인 부분도 해결됐고, 잘 될 일만 남은 것 같아요. 옆에 있어줘서 너무 고맙고,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었으면 해요.”

# 사진_점프볼 DB
  2019-09-15   민준구(minjungu@jumpball.co.kr)

저작권자 ⓒ 점프볼.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 점프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