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포로학대' 고발자에서 美 아시아계 청년들 '멘토'로

김태훈 2019. 10. 1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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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필리핀계 미국인 육군 장성이었던 타구바 /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내 폭력 심각해" / 지적했다가 '내부고발자' 몰려 퇴역 요구 받아 / 미국 내 아시아계 젊은이들 위한 '멘토'로 변신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오른쪽)가 안토니오 타구바 PPALM 회장과 함께 찍어 트위터에 올린 사진. 해리스 대사 트위터 캡처
2004년 전 세계를 충격과 분노 속에 몰아넣은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사건을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이 사건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뜻밖에도 미 육군의 현역 장성을 통해서다. 어느덧 15년 세월이 흐른 가운데 당시의 ‘내부고발자’가 미국의 아시아계 젊은이들을 위한 멘토(조언자)로 활약 중인 사실이 전해져 눈길을 끈다.

◆원래 필리핀계 미국인 육군 장성이었던 타구바

15일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의 트위터에 따르면 미국 워싱턴을 방문 중인 그는 미 육군의 안토니오 타구바(69) 예비역 소장과 찍은 사진을 올렸다. 2007년 1월 미 육군에서 퇴역한 타구바 장군은 현재 ‘범태평양 아메리칸 리더&멘토’(PPALM)라는 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다.

해리스 대사는 사진과 함께 게재한 글에서 “워싱턴에서 열린 PPALM 연례 모임에서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며 “PPALM을 위해 애쓰시는 안토니오 타구바 장군께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PPALM은 ‘범태평양’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미국에 살고 있는 아시아계 젊은이들이 장차 미국 사회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멘토링(조언)을 제공하는 단체다. 타구바 회장 본인이 1950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태어나 11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주한 필리핀계 미국인이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은 타구바 회장을 잘 모르겠지만 그는 2004년과 2008년 미국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경험이 있다. 특히 2004년에는 미국을 넘어 세계 각국 언론을 뜨겁게 달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2003년 타구바 회장은 미 육군의 현역 소장으로서 쿠웨이트에 주둔하며 미국·영국 연합군의 전투 수행을 지원했다.

2004년 미군 병사가 바그다드 교외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 수용된 이라크인 포로들을 학대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은 세계인의 공분을 자아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내 폭력 심각해"

이듬해인 2004년 그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교외에 있는 아부그라이브(Abu Ghraib) 교도소에 갇힌 이라크 전쟁 포로들이 교도소 경비를 맡은 미군 헌병들에 의해 끔찍한 학대와 고문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타구바 회장의 눈에 비친 아부그라이브 수용소는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미군 병사들은 가혹한 심문으로 포로들을 질식사시키는 한편 여성 포로를 상대로 성적 학대를 자행했다. 또 여러 명의 남성 포로를 발가벗겨 바닥에 쓰러뜨린 것은 물론 알몸인 포로 머리 위에 두건을 씌운 채 문이나 침대에 손을 묶는 등 온갖 잔혹한 짓들을 일삼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런 끔찍하고 수치스런 고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고향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한테 자랑스럽게 이메일로 전송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타구바 회장은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수많은 전쟁범죄가 자행됐음을 발견했다”는 내용의 보고서, 일명 ‘타구바 보고서(Taguba Report)’를 작성해 미 국방부에 제출했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그만 언론에 유출돼 그 내용이 상세히 보도됨으로써 전 세계에서 미국과 미군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미 육군 소장 시절의 안토니오 타구바 PPALM 회장. 미 육군
◆미국 내 아시아계 젊은이들 위한 '멘토'로 변신

타구바 회장을 보고서 유출의 장본인으로 지목한 미 국방부는 그를 워싱턴 펜타곤으로 소환, 여러 형태의 압박을 가한 뒤 결국 “스스로 제대하라”고 요구했다. 타구바 회장은 2007년 1월 약 34년간의 군복무를 마감하고 육군 소장을 끝으로 퇴역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8년 타구바 회장 이름이 다시 미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그가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이라크, 쿠바 관타나모,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끔찍한 전쟁범죄가 자행됐고 그 배후에는 부시 대통령 본인이 있다‘는 취지의 글을 발표함과 동시에 부시 대통령의 처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군을 떠난 뒤 타구바 회장은 본인이 필리핀계 미국인의 핸디캡을 딛고 미 육군 장성에까지 오른 경험을 토대로 미국에 사는 아시아계 젊은이들한테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질을 조언해주고 있다. 해리스 대사가 “PPALM을 위해 애쓰시는 타구바 장군께 감사드린다”고 찬사를 바친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타구바 회장은 한국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그는 육군 중위 시절인 1974∼1975년 경기 동두천에서 주한미군 부대의 박격포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중령 때 다시 주한미군에 배치, 미 2사단 대대장과 한·미연합사령부 행정장교 등으로 일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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