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팔래치아산맥 웨스트 버지니아주 웹스터 카운티의 정상제거채굴 현장. 산이 평평하게 ‘제거’됐다. 사진 셔터스톡.
오늘날 지구촌 산촌은 낙후됐다. 사방으로 고립됐고 살림은 대부분 열악하다. 히말라야나 안데스의 고산족은 문명의 이기와 단절돼 있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나 중동의 산악지대, 중국 서부 변방, 동남아 산악지대는 산골주민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공공연하다. 선진국인 유럽 알프스와 피레네, 미국 애팔래치아 산골도 경제적, 사회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미국에서는 최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역’ 353곳을 꼽았는데 이 중 85%가 시골이었다. 서부의 인디언 보호구역, 텍사스의 히스패닉 밀집 지역, 남부 미시시피강 하구 흑인 밀집 지역 등이며, 백인들이 주를 이룬 애팔래치아 산지도 있었다.
19세기 애팔래치아산맥으로의 이주자를 그린 ‘컴벌랜드 갭으로 이주자를 안내하는 대니얼 분’. 가족주의와 독립심이 잘 표현돼 있다. 조지 케일럽 빙엄 작품(1851~1852년).
폭발사고로 악명 높은 애팔래치아 탄광촌
이번 연재에서는 애팔래치아산맥 탄광촌의 역사를 인류학적으로 분석해 본다.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 미국이지만 그 뒤안길에는 자본 앞에 인간의 존엄이 무참히 파괴되는 현장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다. 자본에 모든 것을 방임하는 자유주의의 폐해는 산악지대처럼 취약한 곳으로 집중된다.
애팔래치아는 총 길이 2,400km로 웨스트버지니아, 켄터키, 테네시 등 13개 주를 관통하는 거대한 산맥이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산군 중 하나로 4억5,000만 년 전 북미대륙이 유럽·아프리카와 충돌하면서 솟아올랐다. 오늘날 미국인 2,500만 명이 애팔래치아 기슭에 살고 있으며, 특히 미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탄광촌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2010년 4월 5일, 웨스트버지니아주 어퍼 빅 브랜치탄광 지하 300m 갱도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갱도 내에 있던 광부 31명 중 29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조사 결과 메탄가스를 배출하는 환기구를 설치하지 않은 탓으로 드러났다. 사전에 ‘갱도 폭발 우려가 있다’는 경고가 수차례 있었다. 그런데 탄광회사 대표가 경고를 무시하고 “채굴을 강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사고를 예감한 현장 관리자가 책임을 모면하고자 이 지시문을 보관해 둔 탓에 전모가 드러났다. 지역사회 출신 배심원들은 이 대표에게 유죄평결을 내렸다. 그러나 처벌은 겨우 징역 1년형에 벌금 25만 달러였다. 심지어 이는 미국에서 산업안전 기준 위반으로 기업인이 처벌받은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총 길이 2,400km에 달하는 애팔래치아산맥은 미국 13개주에 걸쳐 있다.
메탄가스는 냄새나 색깔이 없는데 휘발성은 크다. 재래식 헤드램프로도 점화되어 폭발한다. 대기가 저기압이면 새어 나온 메탄가스가 갱도를 가득 채운다. 애팔래치아 주민들은 저기압의 가을을 ‘폭발철’이라 부를 정도다.
최초의 대규모 탄광사고는 1839년 3월 버지니아주 블랙히스탄광에서 발생했다. 메탄가스가 폭발해 53명이 한꺼번에 사망했다. 이후 오늘날까지 애팔래치아에서 탄광 사고로 죽어간 광부들은 수천 명에 이른다.
잦은 탄광사고가 단순히 우연이고 운명일까? 역사적으로 악명 높고 처절한 애팔래치아 탄광 사고는 분명 그 이유가 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가난 시찰Poverty Tour’이라는 명목으로 1964년 애팔래치아 산골 마을을 방문했다. 사진 N&O.
자본의 논리로 조직된 탄광촌
18세기부터 미국 동부와 유럽의 이민자들이 애팔래치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고향의 높은 세금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만 년 이상 살고 있던 체로키, 쇼니 원주민들을 연이은 전투로 몰아내, 19세기부터 애팔래치아는 완전히 백인들의 땅이 되었다. 정착 초기 산은 외부의 착취로부터 주민을 보호해 주는 성벽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애팔래치아 남부, 중부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풍부한 목재, 철, 원유 그리고 수자원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탄광이 개발되고 철도가 놓이면서 농부들은 애팔래치아를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여기게 됐다. 당시 애팔래치아 석탄 채굴 면적은 한반도만큼 넓었다. 1930년대엔 미국 전체 석탄생산량의 80%를 담당했다. 해외로도 수출됐다. 석탄 산업은 애팔래치아 지형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크게 바꿔놓았다.
산골 농부들은 탄광촌으로 계속 모여들었다. 남부에서 올라온 흑인, 이탈리아, 헝가리, 러시아, 그리스, 폴란드 출신의 이민자들, 애팔래치아 토박이들이 석탄 노동자로 합류했다. 갱부는 혼자 갱도 끝에서 구멍을 파고 다이너마이트를 넣은 뒤 얼른 밖으로 나오고, 폭발 뒤에 다시 들어가 흩어진 석탄을 화차에 실어 밖으로 날랐다.
탄광촌에서는 법이나 생명보다 돈이 제일 위에 있었다. 이는 탄광촌 역사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탄광촌의 학교, 교회, 민간주택, 보안관서, 병원시설 모두 석탄회사 소유였다. 임금은 식권, 상품권, 쿠폰으로 지급했다. 전기세, 난방료는 아예 월급에서 공제됐다.
1920년대 웨스트버지니아의 산골마을 와이든Widen에 형성된 탄광촌 전경. 탄광업체에서 발전소, 숙소, 철로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장해 건설했다. 사진 시어도어 그리피스.
일은 많았지만 벌이는 형편없었다. 생활수준은 열악했다. 작업환경은 고되다 못해 살인적이었다. 임금인상과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노사 간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에서는 1931~1941년 사이 격렬한 시위가 벌어져 이를 ‘10년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때까지 할란 지방 탄광에서 죽은 광부는 1,300명 남짓이었다.
노동조합을 만들려던 시도는 번번이 사측의 강압적인 반대로 무산됐다. 탄광회사 사장이나 땅 주인은 애팔래치아가 아닌 미 동부 대도시에 살았다. 이윤은 고스란히 외지로 갔다. 회사는 직원에게 무심했고 끊임없는 로비로 사측에 유리한 법률만 제정됐다. 애팔래치아의 미국인들은 정착 초기부터 착취의 굴레에 종속돼 있었던 셈이다.
세계 석탄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애팔래치아 탄광은 차차 기울어갔다. 미국 내 환경규제가 심해졌고, 화력발전이 석유 등 다른 에너지원으로 대체됐다. 탄광은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탄광도 채굴량은 줄어들었다. 신기술을 도입해 효율성을 높인 채굴법으로 실업률은 늘었다. 가난은 더해졌다. 탄광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겼다. 무기력한 노조에 대한 불신도 팽배했다.
1960년대 존슨, 케네디 대통령은 ‘가난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제1호 퇴치 지역은 애팔래치아 산골이었다. 저소득층 의료보험, 학교 무상급식 등을 지원했다. 그러나 쇠락해 가는 탄광촌을 되살리는 근본책은 아니었다. 정권이 바뀌고 지원이 끊기자 가난은 더 매몰차게 찾아들었다.
정상제거채굴은 드래그라인 등의 신형 중장비를 사용해 가능해졌다. 사진 애팔래치아 보이스.
산을 통째로 없애는 ‘정상제거채굴’
1950년대 이후 탄광은 지하채굴 대신 노천채굴법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 광산의 40% 정도를 차지하는 기법으로 지하채굴보다 효율적이다. 그러나 환경오염은 더 크다. 지표면의 풍부한 생태계를 직접 파괴하기 때문이다. 탄광촌이나 산 아래 주민에게도 피해를 준다.
대표적인 노천채굴법이 정상제거채굴Mountaintop Removal Mining이다. 산 전체를 위에서부터 깎아내리면서 석탄을 채굴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산을 통째로 깎아 없애는 방식이다.
이 채굴방식이 가능한 건 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1960년대에는 불도저, 포크레인, 덤프트럭으로 언덕 표면을 걷어내는 정도였다. 이제는 드래그라인(장거리 궤도 굴착기), 셔블(지렛대형 자주식 굴착기)에 대형 폭탄까지 동원한다. 두말할 필요 없이 지형과 생태계는 완전히 바뀐다. 애팔래치아의 500여 산봉우리가 정상제거채굴로 사라졌다. 경기도 면적의 3분의 2가량에 해당하는 지역이 평평해진 것이다.
정상제거채굴이 무조건 환경에 해로운 것은 아니다. 캐나다 로키산맥의 정상제거채굴은 환경오염이 적은 사례다. 이곳의 석탄은 해발 3,300m 지점에 매장돼 있다. 춥고 건조해 농사지을 만한 땅도 아니다. 수목도 적고 지형도 가파르다. 산성 오염물질도 적게 분포한다.
그러나 채탄 규모는 애팔래치아보다 훨씬 크다. 작은 언덕이 아니라 큼직한 산을 없애 버리는 수준인데도 부정적인 인식은 별로 없다. 무엇보다 저지대 생태계나 주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채굴이 끝난 땅의 식생 회복, 수질오염 방지, 소음 및 먼지 억제 등의 엄격한 규제가 뒤따른 결과다.
애팔래치아는 그러지 못했다. 심각한 환경문제가 연이어 터졌다. 홍수, 수질오염, 탄광 잔해 범람, 석탄 분진 공해, 폭파에 따른 가옥 파손이 일상이 됐다. 집이 석탄 분진에 뒤덮여 집값이 10분의 1로 떨어지기도 했다. 주민들은 선천적 결손증, 암 등 만성질환에 시달렸다.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정상제거채굴을 금지하라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사진 애팔래치아 보이스.
웨스트버지니아주에 건립된 어퍼 빅 브랜치 광산 사고 희생자 추모비. 사진 릭 바르베로 연합통신.
심지어 고가의 마약성 진통제 처방 남용이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1990년대 말 제약회사들은 탄광촌에 마약성 진통제 옥시콘틴을 공격적으로 홍보했다. 고된 육체노동으로 쇠약해진 광부들은 부작용을 알면서도 강력 진통제를 마다하지 못했다. 옥시콘틴은 그렇게 ‘두메산골Hillbilly 헤로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약을 서로 사고팔기까지 했다. 마약중독은 재취업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되돌아왔다.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가장 가난하고 미국에서 가장 높은 마약 소비율을 보이는 맥도웰 지역이 대표적이다. 200여 년 전에 맥도웰 지구는 주에서 석탄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석탄 산업이 쇠퇴하면서 주민은 하나둘 떠나갔다. 1950년대 10만 명에 달했던 인구가 2014년에는 2만1,300명으로 줄었다. 주민 소득의 절반가량이 정부보조다. 마을의 유일한 관심은 마약이다. 마약 밀매로 많은 이들이 범법자가 됐고 가족은 흩어졌다. 학생 절반가량은 부모가 감옥에 있거나 이미 사망했다. 최근 유일하게 마을을 활기차게 하는 사업이 있는데 바로 교도소 건설공사다.
애팔래치아 산골의 당면 과제는 지역사회 재건이다. 주민들은 공연, 대중예술, 문학, 박물관, 마을축제 등으로 공동체를 활성화하려 애쓴다. 풀뿌리 환경단체도 조직됐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는 나무심기 운동도 확산됐다. ‘그린 포레스트 워크’의 나무심기 사업에 자원봉사자 1만 5,000명이 참여해 2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었다.
이토록 생활이 열악해도 남은 주민들은 탄광촌을 떠나지 않는다. 대를 이어 터전으로 삼은 지역사회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이 지역 출신 여성 환경운동가 로렐리 스카보로는 “이 애착은 단순히 집이나 땅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간직된 추억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한 삶,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인류는 산에서 나왔지만 산을 잊고 살고 있다. 애팔래치아의 사례는 산을 잊은 사회는 건강과 환경, 가정과 마을, 몸과 마음의 파괴만이 있다고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