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동네야구 131구 완투승, 이치로의 메시지

                                 사진캡처=일본 데일리스포츠 홈페이지

한적한 일요일 오후다. 햇살도 나른하다. 어지간한 게으름도 용서될 날씨다. 그래도 부지런한 걸음들은 꼭 있다. 하나 둘. 고베 구장에 유니폼 차림들이 모인다. 12월에 웬 야구? 보나마나 뻔하다. 동네 야구다. 아니나 다를까. 면면이 푸근하다. 희끗희끗한 머리, 넉넉한 뱃살들이다.

‘오죽 야구가 고팠으면.’ 뭐, 여기까지는 그렇고 그랬다. 그런데 잠시 후. 분위기가 묘하다. 삼삼오오. 인파가 생긴다. 관중석도 제법 찼다(추정 인원 3000명). 그뿐이 아니다. 카메라와 마이크도 보인다. 두리번두리번. 사방을 살피는 눈길들도 등장했다. 신문사, 방송국의 ‘보도진’들이다.

대진팀이 소개됐다. 홈 팀은 고베 치벤(CHIBEN), 상대는 와카야마 치벤이다. 치벤은 학원 이름이다. 특히 와카야마는 교직원들로 이뤄진 팀이다. 고베는 좀 다르다. 야구 좀 하던 사람들이 얼핏 보인다. 타순표에는 깜짝 놀랄 이름이 있었다. 스즈키 이치로라고 적혀 있다. 포지션은 투수였다.

3월까지는 엄연한 메이저리그 현역이었다. 은퇴한 지 1년도 안된다. 여전히 직함도 가졌다. 시애틀 매리너스 회장 특별보좌역이다. 그러니까 고베 치벤은 그가 만든 ‘동네야구’ 팀이다. 스스로 오너, 감독, 선발 투수의 역할까지 맡았다. 나머지는 지인들이다. 선출도 있지만, 상당수는 초짜들이다.

   9번타자 투수 이치로의 이름이 새겨진 전광판              교도통신 SNS 캡처

51번 대신 에이스 넘버 1번을 달고

이날은 51번을 달지 않았다. 백넘버는 1번이었다. 에이스의 번호다.

46세 우완(우투좌타) 정통파의 폭격은 1회부터 시작됐다. 강력한 패스트볼은 난공불락이었다. 예리한 슬라이더까지 구사했다. 비록 연식구였지만 손댈 수 없는 공이었다. 이닝이 거듭될수록 삼진만 쌓였다. 9회까지 16K, 무실점 완투였다. 타석에서도 4타수 3안타였다. 승부는 뻔했다. 고베의 14-0 완승이었다.

상대 팀 감독은 치벤 학원 이사장이다. 후지타 키요시(65)였다. 경기 후 완패를 시인했다. “1점이라도 뽑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레벨이 완전히 다르더군요.” 그는 지명타자로 타석에도 들어섰다. 상대 선발의 느낌을 이렇게 전했다. “이치로상의 공은 제가 칠 수 있는 게 아니죠. 130㎞가 넘는 것 같았어요. 그냥 상대해봤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죠.”

와카야마 팀은 6개의 안타를 뽑았다. 첫 안타의 주인공은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타마키 선생(31세)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그냥 무의식중에 휘두른 배트에 맞은 게 운 좋게 2루타가 됐죠. 평생의 기념이 될 겁니다.”

  타석에서도 특유의 루틴은 변함없었다.                                아사히신문 SNS 캡처

자청해서 배팅볼 투수가 되다

미국에서는 직함도 그럴듯하다. 매리너스 구단 회장보좌역이다. 하지만 말뿐이다. 은퇴 후 실제 업무는 배팅볼 투수다. 타자들 공 던져주는 일 말이다. 현장 스태프 중에 가장 고된 일이다. 물론 누가 시킨 건 아니다. 설마 프랜차이즈 레전드에게 그런 걸 맡길 리 없지 않은가.

진짜 할 일은 인스트럭터였다. 덕아웃보다 실내 연습장에 있는 시간이 많다. 그러다 보니 뭔가를 깨달았다. “배팅볼 투수가 사정이 생기면 누군가 그 일을 해줘야할텐데.” 그래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했다. ‘만일에 대비하는 일, 그건 이치로가 평생 해왔던 일이다.’

그냥 마음 속으로만 준비하는 게 아니다. 좋은 배팅볼 투수가 되려고 개인 훈련도 했다. 시애틀 외야수 미치 해니거의 얘기다. “스트라이크 던지는 능력이 뛰어나다. 템포도 적당해서 타자에게 잘 맞춰준다. 팔의 각도도 다양하게 변화를 준다. 아마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 매일 200개씩은 따로 연습하는 것 같더라.”

또다른 팀 동료 오스틴 놀라의 경험담이다. “하루는 변화구를 던져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뭘 원하느냐고 묻더라. 포심 외에도 투심, 커터, 슬라이더, 커브를 던져주더라. 모두 스트라이크 존으로 정확하게 들어왔다.”

                                             사진제공 = 게티이미지

12-0 패배에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다

일본에서는 쿠사야큐(草野球)라고 부른다. 동네야구, 아니면 사회인야구 정도의 의미다. 거기서 9회를 완투했다. 무려 131개의 공을 던졌다. 메이저리그 레전드급 선수가 말이다.

얼핏 이해가 안된다. 아니 말도 안되게 모양 빠지는 일이다. 심지어 손가락질 받을 지 모른다. 애들 손목 비틀기라는 수군거림도 걱정된다.

그런데 왜 그런 무자비한(?) 기록을 남겼을까. 바득바득 9회까지 버텼을까. 멀쩡한 몸도 아니었다. “왼쪽 종아리가 조금 불편했지만, 어깨와 팔꿈치는 괜찮았다.” 그런 해명을 하면서 경기를 마쳤다. 던지는 것 뿐만이 아니다. (9번) 타자로도 전력질주했다. “느린 공을 치는 게 어려웠다.” 1루 땅볼로 잡힌 첫 타석을 아쉬워했다. (4타수 3안타)

작년 11월이었다. 고교야구 고시엔 대회 지역예선 때였다. 와카야마 치벤 학원이 무참하게 패했다. 0-12로 5회를 넘기지 못했다. 이치로는 마침 그곳에서 개인훈련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게 있었다. 패한 팀의 응원단이다. 수 백명의 재학생과 밴드, 치어리더들의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짐 없었다. 콜드게임이 목전인데도 개의치 않았다. 열정을 다해 박수치고, 목청을 높였다. 마지막 아웃 카운트까지 선수들과 함께 했다.

그날 이치로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것.’ 바로 자신이 평생을 해왔던 일이다. 그것이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였다. 바로 동네야구 이벤트가 이뤄진 배경이다. 전 타석 삼진을 당한 패장 후지타 이사장은 이렇게 밝혔다. “최후의 최후까지, 이치로상이 진검승부를 해주셔서 정말로 기뻤습니다.”

주최자의 마지막 인사가 있었다. 3루쪽 관중석이다. 작년 고시엔 때와 마찬가지였다. 0-16에서도 목청이 터지도록 응원하고 있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한 와카야마 학생들을 향해서였다.

                                                 일본 닛칸스포츠 홈페이지 캡처
   경기 후 와카야마 치벤 응원단과 환담하는 모습.                            아사히신문 SNS 캡처

에필로그

치벤(智辧) 학원은 1964년 간사이 지역에 설립된 사학재단이다. 와카야마, 나라 등 지역에서 8개 초중고교를 운영한다.

설립자는 고인이 된 후지타 테루키요 씨다. 그는 1975년부터 줄곧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한국을 택했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 통치를 속죄하는 마음’과 ‘일본문화의 원류는 한국(신라와 백제)’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이후로 40년 이상, 총 2만 명 넘는 학생이 경주를 다녀갔다. 한일관계가 악화된 올해도 변함없이 지속됐다.

현재는 아들 후지타 키요시 이사장이 선친의 유지를 잇는다. 이날은 감독 겸 지명타자로 고베(이치로) 팀과 상대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