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시진핑은 히틀러"..중국 역린 건드리는 포스트잇으로 뒤덮인 홍콩 '레넌 월'

홍콩/김남희 특파원 2019. 9. 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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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면 붙이고 떼면 붙이고. 홍콩의 친중(親中)·반중(反中) 시위대가 ‘레넌 월(Lennon Wall·레넌 벽)’에서 벌이는 싸움이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홍콩의 반중 시위가 16주째 주말을 맞은 21일, 친중 성향의 홍콩 시민들이 몽콕과 완차이, 삼수이포 등에 청소 도구를 들고 나타났다. 이들은 벽면 가득 붙어 있는 ‘쓰레기’를 칼로 긁어 떼어냈다. 시위를 지지하는 문구와 그림이 담긴 종이다. 뜯겨져 나간 종이엔 낙서칠이 된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얼굴, ‘홍콩을 해방시키고 시대 혁명을 이뤄내자(光復香港 时代革命)’는 시위 구호 등이 있었다.

홍콩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육교 유리창에 디즈니 캐릭터 곰돌이 푸 그림 위에 ‘시틀러(#xitler)’라 적힌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곰돌이 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묘사하는 캐릭터이고 시틀러는 시 주석의 ‘시’와 독일 나치 독재자 히틀러의 ‘틀러’를 합친 말이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친중 진영의 레넌 월 정화 작업이 끝나자 이번엔 반중 시위대가 포스터와 풀을 들고 나타났다. 이들은 너덜너덜해진 벽에 자유와 독립을 열망하는 내용의 새 포스터를 붙이기 시작했다.

레넌 월은 원래 영국 밴드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이 1980년 12월 미국에서 암살된 후 옛 체코슬로바키아 수도 프라하에서 레넌을 추모하며 생겨났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 정권의 ‘철의 장막’에 억압돼 있었다. 냉전 시대에 평화를 외치며 반전쟁 운동가로 활동한 레넌은 서구 음악이 금지됐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반전·반공산주의의 상징이 됐다.

홍콩의 한 육교 유리창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독일 나치 독재자 히틀러의 사진을 합성한 포스터가 붙어 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레넌이 사망하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예술가가 프라하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 근처의 외딴 벽에 레넌의 얼굴을 그렸다. 이후 레넌을 기리는 글뿐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의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글들이 끊임없이 벽에 새겨졌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 정권이 무너지자 레넌 월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한 여성이 홍콩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육교 계단을 올라가며 유리창에붙어 있는 홍콩 시위 지지 게시물들을 보고 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레넌 월은 이제 홍콩 민주화 시위의 상징 중 하나다. 2014년 우산 혁명 당시 홍콩섬 애드미럴티역에서 홍콩 정부청사로 이어지는 외부 계단에 처음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올해 6월 9일 홍콩 시민 100만 명 이상이 정부의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추진에 반대해 거리로 나선 이후, 애드미럴티 지역을 시작으로 곳곳에 100여개의 레넌 월이 생겨났다. 육교, 버스 정류장, 지하철역, 대학교, 쇼핑몰 등의 벽면은 어느새 색색의 포스트잇과 포스터, 그림, 사진으로 뒤덮였다. 색의 도시 홍콩에 또 하나의 색이 더해졌다.

홍콩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육교의 유리벽면은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레넌 월로 변신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모자이크 같은 거대한 벽면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이마다 다양한 메시지가 적혀 있다. ‘홍콩인 힘내라(香港人加油)’ ‘5대 요구, 하나라도 빠져선 안 된다(五大訴求缺一不可)’ 같은 대표적인 시위 구호 외에도, 과잉 진압 비판을 받는 홍콩 경찰에 대한 분노, 친중 인사를 향한 적개심 등이 글과 그림으로 표현돼 있다.

홍콩 시민들이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육교를 걸어가며 유리창과 바닥에 붙어 있는 홍콩 시위 지지 게시물을 보고 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그중에서도 중국의 역린(逆鱗)을 정면으로 건드린 글과 그림이 중국 정부의 인내심을 자극하고 있다. 단순히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조롱하고 모독하는 내용이다. 시 주석을 시 황제로 섬기는 중국 입장에선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홍콩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육교 유리창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각각 디즈니 캐릭터 곰돌이 푸와 티거에 비유한 사진이 붙어 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이달 7일 홍콩섬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헤네시 로드와 퍼시벌 스트리트가 교차하는 곳에 있는 육교. 유리창 전체가 레넌 월로 변했다. 유리창 한 켠엔 디즈니 캐릭터 곰돌이 푸(Winnie the Pooh) 그림 위에 ‘시틀러(#xitler)’라 적힌 작은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곰돌이 푸는 시 주석을 묘사하는 캐릭터로, 시 주석을 독일 나치 독재자 히틀러에 비유해 ‘시틀러(시 주석의 ‘시’와 히틀러의 ‘틀러’를 합친 말)’라 쓴 것이다.

홍콩대 캠퍼스의 레넌 월에 홍콩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고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포스트잇과 종이들이 붙어 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육교 위로 올라가는 계단 유리창엔 곰돌이 푸가 왜 시 주석을 의미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한 포스터도 붙어 있었다. 포스터 안엔 곰돌이 푸와 티거(호랑이 캐릭터)가 나란히 걷는 그림과 2013년 시 주석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걷는 사진이 아래위로 배치됐다.

옆에는 "푸의 순진한 성격이 중국 공산당이 소셜미디어와 검색 엔진에서 푸 검색을 차단한 이유로 추정된다"는 설명이 있었다.

홍콩대 캠퍼스의 레넌 월. /홍콩=김남희 특파원

2013년 시 주석과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 때 두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과 푸와 티거가 함께 걸어가는 그림은 소셜미디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중국인들은 시 주석을 푸, 오바마 대통령을 티거에 비유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푸 이미지를 이용한 시 주석 풍자와 패러디가 이어지자 중국 소셜미디어에서 이 그림을 없애버렸다.

홍콩대 캠퍼스에 캐리 람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의 얼굴이 들어간 분홍색 돼지 캐릭터가 곰돌이 푸를 발로 밟고 있는 그림. 곰돌이 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묘사하는 캐릭터이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유리창엔 히틀러와 시 주석의 사진을 나란히 넣은 포스터도 여러 장 붙어 있었다. 히틀러가 나치식 경례를 하는 모습과 시 주석이 한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합성했다. 옆엔 ‘차이나치(CHINAZI·중국을 뜻하는 영어 ‘차이나’와 ‘나치’를 합친 말)에 노(no)라고 말해라’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가운데) 미국 대통령이 홍콩 시위대와 마주앉아 대화를 하라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팔을 끌지만 시 주석이 이를 거부하며 기둥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홍콩=김남희 특파원

대학생 시위의 주축인 홍콩대에서도 시 주석을 조롱하는 글과 그림이 레넌 월 곳곳에 붙어 있었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얼굴이 들어간 분홍색 돼지 캐릭터가 푸를 발로 밟고 있는 그림이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홍콩 시위대와 마주앉아 대화를 하라고 시 주석의 팔을 끌지만 시 주석이 싫다며 기둥에 매달려 있는 모습 등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언론·집회의 자유를 제약하고 사람들을 조종한다는 의미의 그림. /홍콩=김남희 특파원

일요일 시위 하루 뒤인 23일엔 홍콩 정부 소속 근로자들이 홍콩대역 바깥 레넌 월의 포스터에 페인트 칠을 해 시위 지지 메시지를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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