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출' 한선태가 소환한 기억 속의 선수 ③ 슈퍼스타 감사용

돌팔매질이 취미인 소년, 야구 선수가 되는 꿈을 꾸다
어릴 적 돌팔매질이 취미였다. 돌멩이를 손에 쥐고 있는 힘껏 뿌리면 목표를 향해 날아가 꽂히는 그 맛이 짜릿했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집 뒤 냇가에 나가면 물수제비도 뜨고, 강둑 너머까지 던지기도 했는데 늘 또래보다 앞섰다. 학교에서는 멀리 던지기 대표 선수였다. 그는 왼손잡이였다. 경상남도 김해 진영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친구들은 '짝배'라고 불렀다.
어릴 시절 또래 친구들이 흔히 그랬듯, 친구들은 그의 이름을 두고도 '감사'라고 앞 두 글자만 부르거나 '사용, 안 사용, 뭘 사용' 하며 놀렸다. 진영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소년은 야구를 하고 싶어 진해로 전학시켜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랐고, 진해중학교 2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가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야구에 대한 열정은 차고 넘쳤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전문적인 투수 코치가 없었다. 혼자 공을 던져보면서 투구를 연마했다. 달릴 장소만 있으면 달리고, 던질 것만 있으면 공이든 돌멩이든 던졌다. 운동하다 배가 고프면 물을 마시고 배를 채웠다. 먼 훗날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불린 그의 어린 시절 회고다.
프로야구 출범 첫해 선수를 소개하는 프로필에 감사용의 체격 조건은 키 171cm에 몸무게 72kg으로 평균보다 작은 체격이었다. 프로야구 원년 한 시즌 한 팀당 경기 수는 80경기였고, 홈과 원정 경기를 소화하고 훈련까지 하다 보니 체력이 금세 바닥나 자신의 한계와 프로야구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고 한다.

진해중 2학년 때 야구 시작해 마산고에 진학
인천체전 2학년 때 어깨 다쳐 선수 생활 위기
21살에 봉황대기대회에 최연소 감독으로 출전
환경은 녹록지 않고 자신의 야구 인생도 순탄치 않았다. 좌절과 실패의 연속일 수도 있는 시절이었지만, 감사용은 '나 자신과 남을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살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 열심히 한 덕에 마산고등학교에 특기생으로 진학하게 됐지만, 전국대회 성적이 변변치 않았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전국대회 4강 안에 들어야 했는데,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75년 2년제인 인천체육전문대학에 입학해 리그전에 출전했지만 역시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려웠다. 2학년 때는 동계 훈련을 하다가 어깨 부상을 당했다. 병원에 일주일 입원했다 퇴원했는데, 구속이 현저하게 떨어져 이전 같은 공을 던질 수 없었다.
그 시절 감사용 감독은 21살에 국내 야구 최연소 감독이라는 직함을 달았다. 체육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인천 체고에 교생 실습을 나갔고, 거기서 야구를 좋아하는 인천 체고 학생들을 모아 봉황대기 고교 야구대회 인천 지역 예선에 출전했다. 단 1승도 못하고 좌절했지만, 대회 출전과 도전이라는 값진 경험을 얻었다.
군 복무 마친 뒤 낙향해 직장 생활 시작
삼미특수강팀으로 직장인 야구대회 출전
이듬해 삼미슈퍼스타즈 팀 동계훈련 합류
이후 군에 입대한 감사용은 1사단 최전방 GOP에 배치돼 33개월의 군 생활을 꽉 채우고 전역 후 고향인 진해로 낙향해 삼미종합특수강에 입사했고, 여기서 야구와의 인연을 다시 잇게 된다. 당시 창원 지역 공단에서는 직장인 야구대회가 활발하게 펼쳐졌는데, 삼미특수강 팀은 5년 동안 대회에 나갔지만 단 한 차례도 우승을 못 했다.
직장인 야구 대회에 나간 '선출' 감사용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가 출전하자마자 삼미특수강은 직장인 야구대회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사장님의 특별 상금 100만 원으로 막걸리 회식을 벌인 그 해는 1981년이었고, 이듬 해 프로야구가 출범한다고 나라 전체가 들썩이던 때였다.
구매 관리와 통관 업무를 맡고 있던 감사용은 프로야구 개막을 앞두고 삼미가 진해로 동계훈련을 내려오자, 파견 근무를 자청해 삼미가 훈련하는 내내 매일 배팅 공을 400개 정도씩 던졌다.
동계 훈련이 끝나가던 즈음 OB와의 연습 경기에 나간 감사용은 3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코치진 눈에 들었다. 투수코치가 '박현식 감독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우리와 함께 인천으로 올라가자'고 전했다. 옷 가방 한 개와 이불 보따리 하나만 들고 구단 버스에 동승했다. '슈퍼스타 감사용'의 탄생은 이렇게 이뤄졌다.

왼손투수 이점 살려 경기 가리지 않고 출전
원년 41경기에 나와 133과 3분의 2이닝 소화
첫해 1승 14패 1세이브…. 1승은 롯데전에서.
선발과 중간 계투, 마무리 투수라는 분업 체계가 없던 시절, 그는 경기를 가리지 않고 출전했다. 상대적으로 희소가치가 있던 왼손 투수라는 점도 한몫했다. 프로야구 원년 감사용은 80경기의 절반 이상인 41경기에 나와 133과 3분의 2이닝을 던졌다. 첫해 성적은 1승 14패 1세이브였다.
그의 유일한 1승은 1982년 롯데전에서 나왔다. 구덕 구장에서 6과 3분의 1이닝을 던지는 동안 1실점 하고 마운드를 구원투수 김동철에게 넘겼다. 팀이 5대3으로 이긴 뒤 "형님, 1승 축하합니다."라는 김동철 선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승리 투수가 됐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투수 감사용의 기억에 가장 깊이 새겨진 경기는 이후 OB 전에서 거둔 무승부다. 감사용은 4대2로 끌려가던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나갔고, 양승관 선수의 홈런으로 4대4 무승부가 되면서 15회 연장까지 접전을 펼쳤지만, 결국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1986년까지 5시즌 뛴 뒤 OB를 끝으로 은퇴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삼미에서 뛰었던 감사용은 팀이 청보로 넘어가면서 1985년 한해 청보 소속으로 있다가, 1986년 OB 베어스로 이적해 1시즌 동안 활동한 뒤 은퇴했다. 생애 통산 1승 15패 1세이브가 투수 감사용이 남긴 성적이다.
1986년에 은퇴한 그는 2005년 말 국제디지털대학교 팀의 감독을 맡았지만, 그의 현역 시절처럼 단 1승만 거두고 1년 6개월 만에 팀이 해체되었다. 불모지에서 야구 저변을 확대하는 일이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감사용은 "경험이 없다 보니 잘 안 됐을 뿐이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경남 진해에서 12년째 야구 꿈나무 육성 중
전용구장 마련 + 리틀야구협회 등록이 목표
감사용 감독은 현재 경남 진해에서 유소년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슈퍼스타 감사용 진해 리틀 야구단'감독을 맡아 야구 꿈나무 선수를 육성한 지 올해로 12년째다. 야구를 위해 인생을 건 '야구 바보 감사용 감독'의 꿈은 두 가지다. 리틀야구단 전용구장 마련과 리틀야구협회에 정식으로 등록하는 것이다.
아직은 리틀야구단이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장이 없어 풋살경기장에서 유소년을 지도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3차례 경기를 해야 정식 팀으로 등록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감사용 감독은 프로야구 중계에서 그가 등장할 때마다 그를 '패전 처리 투수'나 '패전 전문 투수’로 불렀던 한 해설가의 말이 몹시 거슬리고 듣기 거북했다고 밝혔다. "야구에 패전 전문 투수가 오데 있어요? 나는 팀이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이기려고 나가는데, 왜 저를 '패전 처리 전문 투수’라고 불렀는지 모르겠심더. 세상에 지려고 던지는 투수가 어디 있어예? 야구에는 그저 구원 투수만 있을 뿐입니더" 영남 특유의 억양과 사투리가 담긴 감사용 감독의 항변이다.
그 증거로 선발로 나간 경기도 20경기 정도는 된다고 강조했다. 1982년 감사용 투수의 기록엔 선발로 나가 경기를 끝까지 책임진 완투 경기도 1경기 있다. 원년에는 팀의 에이스로 꼽히던 인호봉 보다 더 많은 경기에 출전했고, 더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감사용, '비선출(非選出)' 아닌 '선출(選出)'
'슈퍼스타 감사용'의 야구 인생은 현재진행형
"야구에 패전 전문 투수는 결코 없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감사용은 LG의 한선태처럼 '비선출(非選出)'이 아닌 '선출(選出)'이다. 앞서 말한 대로 학교 야구부를 거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도전의 길은 비선출과 많이 닮았다. 선수 출신이냐 선수 출신이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도전하고, 결국엔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야구가 그를 버린 때에도 그는 끝까지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큰 점수 차로 지고 있던 경기조차 쉽게 놓을 수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1승을 거둔 롯데전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등판해 혼신의 역투를 던져 일궈낸 것이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좌절해도 다시 도전하는 자세를 잃지 않고 걸어왔기에 감사용의 야구 인생은 여전히 패전이 아닌 승리를 향해 전진하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여전히 '슈퍼스타 감사용'이다.
많은 팬이 프로야구 원년의 그를 오늘까지 회고하고 추억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김인수 기자 (andreia@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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