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알' 조슈번 후예 아베 신조, 우익 DNA의 비밀과 안중근 의사(종합)


[뉴스엔 이민지 기자]
요시다 쇼인에서 시작된 죠수번의 후예 아베 신조의 야옥이 충격을 안겼다.
8월 10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지난 2014년 선보였던 '조슈번의 후예들, 왜 안중근을 죽이는가'를 특별편성했다.
2014년 1월 20일 일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안중근은 일본의 초대 총리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이다"고 말했다. 일본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는 우리에게 위인이고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해외에서도 높이 평가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 관방장관이 나서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폄하했다.
그러나 당시 안중근 의사는 법정에서 여러차례 재판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도망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거 현장에서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치고 스스로 잡혀갔다. 그의 법정 투쟁을 잘 살펴봐야 하는 이유이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을 통해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자 했다.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 연행돼 조사 받은 안중근 의사는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일본 영사관으로 끌려갔다. 확인 결과, 러-일간 범죄인 인도협정은 1911년, 사건 1년 뒤에 체결됐다. 러시아가 관할 구역에서 국빈격으로 온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를 제대로 호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중근 이사를 넘겨줬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안중근 의사는 "일본법에 의해 재판 받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에 양도한 것은 보호조약이었으며 주권을 넘어준 것이 아니기에 한국사람에게는 한국법을 적용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 사람에게 일본 법을 적용하기 시작한건 안중근 의사 사형집행 열흘 후였다.
일본 변호사 우츠노미야 겐지 역시 "(한일보호조약은) 외교상의 권리문제에 대해 규정한 것이므로 사법권에 대해 규정한 조약은 아니다. 이 조약을 근거로 재판권이 일본에 있다고 확대해석한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형법은 전후에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당시 형법에서는 외국인이 일본인을 외국에서 살해한 경우 일본의 살인죄를 적용해 처벌할 수 없다. 외국인을 재판할 법률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취재 중 구라치 데츠키치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에 대해 알게 됐다. 1910년 기록에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대한 부분이 있었다. "여순 법정에서 이 사건을 처분하고 되도록 작게 취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일본 외교사료관을 찾아 구라치 데츠키치가 직접 작성한 문서를 발견했다. 이토가 살해됐을 때 그는 관련 내용을 모두 보고받고 본국과 의견을 주고 받았다. 사건 발생 열흘 뒤 구라치 데츠키치는 외무성 차관에게 안중근을 일본법으로 처벌할지, 한국법으로 처벌할지 의견을 물었다. 본국에서는 일본의 형법을 적용하라 지시했다. 다시 열흘 뒤, 구라치 데츠키치는 사형에 처할 것인지 아닌지 물었다. 일본 정부는 "중한 범행임으로 극형에 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다. 행정부에서 법원에 사형을 지시한 것이다. 일본 스스로도 사법권 독립을 해친 재판이었던 셈이다.
당시 재판을 받은 여순 법원 측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구라치 데츠키치 기록에 '고등법원장이 당황하며 정부의 희망에 난색을 표했다'는 내용이 발견됐다. 이후 구라치 데츠키치는 여순 고등법원장과 면담을 갖고 상관에게 "검찰관이 사형을 구형하고 무기징역 판결이 나오면 검찰이 항소해 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언도하도록 한다고 타협했다"고 전했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을 정해놓고 시작된 재판이었다. 안중근을 위한 국제 재판 변호인단이 만들어지고 있었으나 일본은 이를 받아주지 않고 일본인 관선 변호사를 선임했다. 결과적으로 구라치 데츠키치는 안중군의 불법재판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이었다.
일본은 당시 한국인들이 일본의 통치를 좋아한다고 선전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 확대되면 한국이 일본 통치에 반발하고 있음이 알려질 수 있었다. 특히 안중근 의사는 "나는 의병 중 장 자격으로 죽인 것으로 결코 자객으로서 한 일이 아니다. 전쟁포로로 여기 있기 때문에 국제법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다"고 주장했으나 기각됐다. 제대로 절차를 받았다면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을 것이고 사형이 아닌 포로 수용소로 갔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명백한 불법재판이자 사법살인이다.
살해 당할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최고의 실권자였다. 안중근 의사가 오랜 기간 그의 처단을 준비한 것도 그의 잔혹한 행위들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전범이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총리를 네번이나 역임할 정도로 신망이 두터운 정치인이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사람으로 절대적으로 존경 받는 사라이었다. 특히 조슈번 출신 사람들에게는 이토 히로부미가 이상형이었다"고 말했다.
일본 조슈번, 현재의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난 이토 히로부미는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이후 하급 무사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성이 이토로 바뀌었다. 공부를 하며 꿈을 키운 그는 영국에서 유학했고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메이지 유신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이후 조선 침략과 식민지화를 주도했다. 조슈번에서 동문수학하던 절친한 사이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 역시 하층 무사 출신으로 강제 점령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조슈번 출신의 미우라 고로 을미사변 주도자 중 한명으로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한일병탄 당시 총리 가츠라 타로 역시 조슈번 출신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일본군 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는 경복궁 기습을 주도했다. 이토를 비롯한 조슈번 출신들이 한국 침략의 선봉에 섰던건 우연일까.
한성민 연구원은 "조슈번은 정한론 생각이 깊은 지역이다"고 말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조선을 침략해야만 아시아로 나갈 수 있고 일본이 미국같이 큰 나라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요시다 쇼인의 조선침략사상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요시다 쇼인은 사무라이이자 교육자였다. 메이지 유신의 토대를 만든 것으로 평가 받는 그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고 자유로운 토론을 했다. 요시다 쇼인은 아편전쟁 후 서구 열강의 위협 앞에 중국처럼 지배 당하지 않기 위해 일본 스스로 단결해 서구 열강에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정한론이 나왔다. 호사가 유지 교수는 "요시다 쇼인은 미국을 목표로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조선이나 중국이나 아시아 남쪽에 있는 동남아를 다 일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조슈번의 사상 중심에 요시다 쇼인이 있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 패전 후에도 요시다 쇼인의 정신은 계속됐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야스쿠니 신사의 모체도 조슈번이 만들었다. 에도 막부와 싸우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슈번에서 위령제를 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생애는 위대한 것이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특히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요시다 쇼인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을 드러내왔다. 오시마 요시마사는 아베 신조의 조상이다. 쇼인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을 침략하고 경복궁 기습을 주도한 오시마 요시마사가 아베 신조의 고조부였던 것. 이 집안의 사상적 뿌리 역시 쇼인을 향한다.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은 아베 총리를 통해 150년 넘게 일본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자민당은 일본 우익의 중심이자 대표적인 보수 정당이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그가 자꾸 언급하는 말이 있다. 그의 좌우명으로 알려진 '지성(최고의 진심)'이다. 요시다 쇼인이 강조하던 말이다. 강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빗나간 애국심이기도 하다. 쇼인과 아베처럼 이를 되새기던 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던 아베가 좌절했던 시절이 있다. 당시 그는 고향 조슈번에 머무르며 채향정을 찾았다. 2007년 국정운영 실패와 자민당의 참의원 선거 참패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절치부심하며 찾은 이곳은 조슈번에서 100년 넘게 운영된 요정이다. 채향정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번 정치인들의 사진과 직접 쓴 글들이 걸려있다. 조슈번의 유력 인사들에게 특별한 장소였던 이곳에서 절치부심한 아베는 3년 후 생애 두번째로 총리가 됐다.
재기에 성공한 그는 일본에 미래상을 제시했다. "강한 일본으로 만들어 일본인으로 태어난 행복을 느끼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베는 총리 취임 1주년을 맞아 야스쿠니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현직 총리로서는 7년 4개월만이었다. 아베는 분명 그 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베 신조는 2012년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영령을 위해 애도하는 것은 다른 나라 지도자도 하는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땅에 있다. 총리가 가서 안 될 일본 땅이 있냐"고 말했다.
그는 헌법 개정도 주장했다. 과거 아베와 같은 주장을 하던 또 한명의 총리가 있었다. 아베 신조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였다. 그는 국민들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과거 때문이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침략의 전진기지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극치인 만주국을 만든 인물이다. 전쟁에 대해 반성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인물로 평가 받는다. 특히 아이치현 순국7사묘를 세우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의 핵심 전범 7명의 유골이 묻힌 곳이었다.
전쟁에 대한 개념은 손자 아베 역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베는 "침략이라는 정의는 학계에서나 국제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인도 팔 판사의 동상이 있다. 팔 판사는 도쿄 전범 재판에서 일본 전범들에 대해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아베는 팔 판사의 손자를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다. 작은 미국 같은 나라를 만들겠다. 개헌으로 일본군 재편, 재무장을 목표로 달리고 있다"고 아베의 목표를 공개했다. 아베는 "우리는 역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말했고 이후 역사 교육 문제에 손을 대고 과거사를 부정했다. 이후 일본에서는 위안부, 난징대학살을 부정하고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등 발언이 쏟아졌고 과거사를 인정한 담화들을 재검토 해야한다고도 주장했다. 아베가 1990년대 중반 활동했던 역사교육위원회 핵심 멤버들은 지금 아베 내각에서 주요직을 맡고 있다. 아베는 도덕을 정식 교과 과목으로 채택했고 교과서에는 요시다 쇼인, 지성, 애국심을 강조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강했던 메이시 시대 일본으로 돌아가려 하는 야욕이 담긴 것이다.
한편 안중근 의사는 항소를 포기했다. 일제의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편지 때문이었다. 그는 남은 시간 글을 남겼다. 그의 생각은 100여년 후 우리에게 전해졌다. 안중근 의사는 약육강식의 침략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동양 3국이 평등하게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위해 사형일자를 미뤄주길 부탁했지만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미완으로 남겨졌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장으로 가기 직전까지 동양 3국의 화합을 통한 아시아 평화를 염원했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캡처)
뉴스엔 이민지 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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