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물인지 모르고 받았는데..' 아청물 유포자로
'교복물인지 모르고 받았는데…' 아청물 유포자로
'아청법' 해석은 어떻게 해야 해?
둘리는 몇 살일까? 아기 공룡이라는 수식어와 올망졸망한 생김새는 둘리를 아동으로 보이게 한다. TV 애니메이션 속 설정은 다르다. 둘리는 1억 년 전 태어났다. 경기 부천시가 발급한 명예 주민등록증에는 만화가 만들어진 1983년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둘리가 '아동·청소년으로 인식될 수 있는 표현물'인지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처럼 캐릭터는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고 명징하지도 않지만, 2011년 개정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은 주관적 인식을 기준으로 처벌해 논란이 되어왔다.
2012년 6월, 당시 22세이던 김민수씨(가명)는 인터넷 파일 공유 사이트 에이드라이브에 파일 하나를 올렸다. 제목은 '[19금][북미no모] 바이블 블랙 온니 HD'. 남자 주인공이 바이블 블랙이라는 마법 도서를 활용해 여자 캐릭터들을 유혹한다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이다. 온라인에서 '야애니(야한 애니메이션의 은어)'계의 바이블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문제는 캐릭터들이 교복을 입고 나온다는 점이다. 김씨는 아청법상 음란물 제작·배포 등의 혐의로 경찰·검찰 조사를 받았다. 아청법 제2조5항은 '아동·청소년으로 인식될 수 있는 사람이나 표현물이 등장해 성교 등 성적 행위를 표현하는 화상·영상 등'을 적용 대상으로 규정한다. 이 법에 따라 애니메이션 속 남녀 캐릭터가 옷을 벗고 성관계를 하는 장면이 불법이라는 게 수사기관의 주장이다.

ⓒYou Tube 갈무리 2011년 개정된 아청법은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어왔다. 사진은 2012년 아청법 개정 촉구 시위.
김씨의 변호를 맡은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캐릭터의 나이 개념에 의문을 표했다. 캐릭터는 사람처럼 생물학적 연령을 똑 부러지게 명시할 수 없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가 아동·청소년으로 보인다는 기준은 작가의 설정과 시청자의 느낌에 따라 달라진다. 수사기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처벌하면 국가의 형벌권이 모호해지고 약화된다고 지적했다.
양 변호사는 아동·청소년의 성을 보호한다는 법의 목적과 교복 애니메이션 처벌 사이의 인과관계가 제대로 증명된 바도 없다고 봤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취향이 그렇게까지 처벌받아야 하는 문제인지 반문하게 되었다. 게다가 음란물은 이미 형법상 음화반포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다. 아청법을 적용해 취업 제한·신상 정보 등록을 하는 건 지나치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청법 해당 부분의 위헌 여부를 법원이 헌법재판소에 심판 제청해달라고 신청했다.
만화가들도 나섰다. 이들이 그린 만화 탄원서가 법원에 답지했다. '처벌 조항의 모호성'을 가장 큰 문제로 보았다. 아동·청소년의 성을 보호하자는 뜻에는 이견이 없으나, 아청법 제2조5항은 그 목적과 상관이 없다고 봤다. 오히려 창작자의 상상력을 옥죄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반발했다. 드라마로까지 제작된 만화 <풀하우스> <메리는 외박 중> 등을 그린 원수연 만화가는 2조5항을 독소 조항이라고 딱지를 붙인 불도저 그림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인 박재동 만화가는 청소년 성 문제를 다루는 만화가를 징역 5년에 처하려고 하는 수사기관의 모습을 그려 법원에 보냈다. 사건을 맡은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형사7단독 문형주 판사는 2013년 8월 위헌 법률 심판 제청을 했다. 비슷한 사건 두 개가 더 합쳐져 헌법재판소로 갔다.
제작자보다 잡기 쉬운 공유자가 표적
결과는 2년 만에 나왔다. 공개 변론은 없었다. 지난 6월25일 헌법재판소(헌재)는 아청법 제2조5항 등에 합헌 결정을 내렸다. 다만 '아동·청소년으로 인식될 수 있는 사람이나 표현물' 조항은 두 갈래로 나눠 결정문을 명시했다. 헌재는 사람과 표현물을 나눠서 판단했다. 실사물에 대한 부분은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헌법재판관 9명 모두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아청법' 해석은 어떻게 해야 해? 기사 참조).

만화가들이 그린 탄원서. 이들은 아청법 제2조5항이 창작자의 상상력을 옥죄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표현물 부분은 5대 4(합헌 대 위헌)로 팽팽히 나뉘었다. 다수 의견(이정미·안창호·강일원·서기석·조용호 재판관)은 '표현물도 실제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경우와 마찬가지 또는 그 이상의 폐해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라고 봤다. 표현물의 묘사나 외관뿐 아니라, 줄거리와 등장인물 사이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수 의견조차 '표현물 의미가 지나치게 광범위해 처벌되는 행위가 예측 가능성이 없다는 의심을 줄 수 있다'라는 점은 인정했다.
소수 의견은 이를 적극 공격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과 김이수·이진성·김창종 재판관이 낸 소수 의견은 '아동·청소년으로 인식될 수 있는 표현물 부분은 다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고 이로 인해 자의적인 법 집행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수사기관의 법 집행 남용을 우려한 것이다. 또 소수 의견은 아청법에 해당하는 표현물을 보는 것과 아동·청소년 상대 성범죄 사이 인과관계가 명확히 입증된 바 없다고 지적했다. 유해성에 대한 막연한 의심이나 가능성만으로 표현물의 내용을 광범위하게 규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2002년 헌재 판례를 인용했다(이에 대해 다수 의견은 2013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보고서를 제시했다. 성폭력 범죄 수형자 28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아동음란물과 성범죄 상관관계'에 따르면, 성범죄를 저지르기 전 일주일 안에 아동음란물을 본 적이 있다고 답한 범죄자가 16%였다).
수사기관의 자의적 법 집행에 대한 소수 의견의 우려는 이미 현장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2011년 아청법 개정 이후 4년째 관련 사건 수십 건을 맡아온 양홍석 변호사는 '박근혜 정부의 4대악(성폭력·가정폭력·학교폭력·불량식품) 기조에 맞춰 일선 경찰서에서는 실적 올리기에 급급한데, 정말 잡아야 하지만 잡기 힘든 아동 포르노 제작자보다는 잡기 쉬운 야동 공유자가 대거 잡히는 상황이었다'라고 말했다.
서울북부지법의 위헌 심판 제청을 이끌어낸 김소영 변호사는 '아청법 토론회에 가면 학부모들은 아청법이 자녀를 보호하는 법이라고만 생각하는데, 현행 아청법은 오히려 호기심에 다운로드받던 자녀들이 당장 처벌받는 법이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선배들에게 받은 야동을 보지도 않고 용돈벌이 목적으로 올렸다가 아청물 유포로 걸린 취업준비생, 업로드와 다운로드가 동시에 되는 토렌트를 이용하다 졸지에 아청물 유포자가 된 대학생 등이 걸렸다'라고 말했다.
'교복물인 줄 몰랐는데…' 떨고 있는 넷심
한동안 멈췄던 아청법 관련 사건은 헌재 결정으로 다시 시동이 걸렸다. 기소유예 처분에 불복해 헌법 소원 심판을 청구한 이들도 무죄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2013년 당시 21세 이성호씨(가명)는 직접 온라인에서 다운로드받은 일본 만화의 대사와 지문을 번역했다. <사랑 예보는 맑음 뒤 맑음(오리지널)>이라는 일본 만화였다. 교복을 입은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주였다. 재미로 번역본을 올렸다가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아동·청소년이 직접 출연하는 매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소유예를 했지만, 죄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여고생이 주인공인 영화 <은교>(위)도 아청법 논란에 휩싸였다.
'넷심'도 들썩인다. 교복만 보면 그냥 지워야 하는 상황이라는 두려움이다. 네이버 카페 '파일공유 웹하드·P2P·토렌트 음란물·아청법·저작권 단속 관련 네티즌 대책토론'은 회원 수가 12만8000명에 이른다. 카페에는 매일같이 아청법 상담 글이 올라온다. '교복물인지 모르고 받은 파일이고, 열어보자마자 삭제했지만 경찰서에서 전화 올 수 있냐. 겁이 나서 잠이 안 온다'는 등의 내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카페 이용자는 '토렌트로 다운받아 교복을 보자마자 지웠지만 찝찝하다. 여태까지 남한테 피해 준 적 없고 불법도 안 했는데 이런 쪽으로 신경 쓰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라고 말했다.
아청법 제2조5항 등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정보 인권단체 '오픈넷'은 이번 헌재 결정의 소수 의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지난해 9월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형사6단독 신원일 판사가 아청법 관련 애니메이션 부분을 무죄로 선고하면서 내세운 가이드라인도 주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신 판사는 '아동·청소년으로 보여지는 표현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했다. '△표현물의 모델 등으로 실제 아동·청소년이 참여한 경우 △컴퓨터 합성 등으로 실제 아동·청소년이 참여한 것처럼 조작된 경우 △애니메이션상 이미지 또는 스토리로 실제 아동·청소년이 특정될 수 있는 경우'에만 아청법 위반 표현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판이 집중되어온 '표현물'의 정의에 대해 구체적 기준이 제시된 최초의 판례다. 오픈넷은 이와 같은 구체적 법률 해석이 있어야만 아동과 청소년의 성이 보호되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김은지 기자 /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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