뽁뽁이 집 건축가들의 좌충우돌 생존기

취재 정사은 인터뷰 사진 김호근 작품 사진 황효철 2015. 7. 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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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인터뷰_ 제이와이아키텍츠 조장희•원유민•안현희 소장

안정된 직장, 어렵게 자리 잡은 외국 설계사무소를 마다하고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그늘지고 소외된 현장을 택한 제이와이아키텍츠(JYA-RCHITECTS). 2013년 젊은건축가상을 받으며 건축계의 슈퍼루키로 등장한 그들이 들려주는 '젊은 건축가 생존기'다.

JYA가 사무소를 연 지 1년도 채 안 되어 2013년 젊은건축가상을 받게 되어 건축계가 떠들썩했어요

사실, 그 상을 받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때 저희가 서른 둘이었으니, '앞으로 열세 번은 더 도전할 수 있겠네' 하는 마음으로 지원했는데 덜컥 돼버린 거죠(하하). 대학 동기인 저희 둘이서 먼저 사무실을 열었고, 안현희 소장이 뒤늦게 합류해 제이와이아키텍츠(JYA-RCHITECTS)를 만들었지요.

각자 독립을 꿈꾸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 소장님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대학을 졸업하고 네덜란드로 유학을 갔어요. 공부를 마치고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설계사무실에서 일하는데, 거기는 설계자가 자기가 시작한 프로젝트를 설계부터 시공, 마무리까지 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죠. 사무실에 아시아 사람은 저밖에 없었고, 네덜란드 말을 못하는 사람도 저밖에 없었어요. 소통이 쉽지 않으니 현장에 못 나가고 2년 가까이 디자인 초기 단계만 참여했어요. 왠지 반쪽짜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별히 자극받은 사건이 있었나요

같이 일하는 동료 중에 동년배가 있었는데, 함께 설계공모를 준비하게 됐어요. 그런데 이 친구는 저와 레벨이 다른 거예요. 유럽에서는 설계안을 제출할 때 예산에 합당한 재료와 구조, 디테일과 시공방법을 함께 내야 해요. 이 친구는 그런 것들을 다 고려하면서 설계하는데 저는 그때도 그림만 그리고 있더라고요. 제가 보기에도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았고, 그런 부분에서 좌절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한국 가서 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한국에 있던 친구 조장희 소장과 이야기하며 고민을 나누게 됐죠.

조 소장님은 어떻게 독립을 결심하게 됐나요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는 대형 설계사무소에 들어가 나름 불만 없이 다니고 있었는데, 4, 5년쯤 흐르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앞으로 10, 20년 후의 모습이 거기 다 있는 거예요. 사실 5년쯤 되면 계속 머무를지, 아니면 건축사 자격증을 따서 나갈지를 선택해야 해요. 그때를 넘기면 소위 '야성'을 잃고 건축가라기보단 직장인으로 살게 되죠. 원유민 소장이 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에 저도 그 때가 왔고, 지금이라도 한번 해 봐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사무실을 차리고는 얼마 안돼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안현희 소장도 파트너로 합류했어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둬야 하니 세 분 모두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네요

아이러니하게도 저희는 독립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비슷한 연령대에 독립해서 성공한 롤모델이 딱히 없었거든요.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가슴으로는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제각각 있던 자리에서 일하는 게 더는 즐겁지 않았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과감하고 무모하고, 정신 나간 짓이긴 했죠(하하).

처음 맡은 프로젝트가 뭐였는지 궁금해요

사무실을 시작하려니 할 일이 있어야 하잖아요. 학생 때 봉사했던 기억으로 해비타트를 무작정 찾아갔죠. 그때 해비타트에서는 저소득층 지원을 위한 주택을 짓는 활동을 했는데, 저희가 봤을 때는 집이 너무 못생긴 거에요(웃음). '우리가 이 집을 설계해준다고 하자. 그럼 이네들이 좋아하겠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자만심을 가지고 접근했죠. 실무진들이 저희의 제안을 보고는 프리젠테이션할 기회를 주었는데, 처음엔 그대로 까였어요(하하).

근데 그 일이 계기가 되어 해비타트에서 울릉도에 짓는 소셜하우징 설계를 맡게 되었고, 그때 알게 된 SBS 사회공헌팀 관계자가 태풍으로 공부방을 잃은 강진 아이들을 위해 짓는 '강진 산내들 아동센터' 건립팀과 저희를 연결해주셨어요. 결과적으로 울릉도 소셜하우징 프로젝트는 건립 자체가 무산됐지만, 그게 저희의 시작인 강진 산내들 아동센터 일을 만들어준 셈이죠.

강진 산내들 아동센터에서 JYA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저희가 합류했을 때 확보되어 있던 예산은 3천만원이었어요. 예상 공사비가 3억인데 말이죠. 그래서 저희가 설계를 마치고는 기업의 사회공헌팀 담당자들을 만나 프리젠테이션하며 후원을 받아내고, 방송사 제작발표회, 강진군 관계자 모임에 가서도 프로젝트를 설명하며 지원책을 얻어냈어요. 설계만 한 게 아니라 기획, 모금에서부터 시공, 현장 감리까지 대부분의 일에 참여했죠.

건축가 이름이 프로젝트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많은 건물이나 구조물은 설계자를 찾으려 해도 찾기가 어려워요. 전부 다 세팅을 해두고는 돈 주고 맡길 사람을 찾아 설계시키고, 나중에 그 이름은 뒤에 숨기기 일쑤죠. 근데 강진 건의 경우, 거의 백지상태에서 저희를 끌어다 놓고 같이 만들어갔기 때문에 저희 이름이 드러났던 것 같아요.

이후 대중들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진 건 '뽁뽁이 집'으로 불리는 벌교 저비용 주택이지요

사실 저희도 그 건으로 이렇게까지 유명해질 줄은 몰랐어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서 진행하는 '저소득층 주거 개선 프로젝트'는 저희가 하기 전부터 원래 진행하던 프로젝트였어요. 마침 강진 산내들 아동센터에서 저희를 눈여겨본 전남지역본부 관계자가 이 프로젝트를 맡겼고, 첫 집 지붕에 뽁뽁이를 넣은 아이디어가 주목받으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 같아요.

주거개선 프로젝트에 건축가가 투입된 건 이례적이었어요

클라이언트 측에서 저희에게 처음 원했던 업무는 투명한 공정 관리와 일률적인 품질 관리 정도였어요. 이전에는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건축업자를 불러서 보일러 고치고, 도배, 장판을 새로 하는 정도로 예산을 집행했는데, 업자에 따라 같은 4천만원으로 할 수 있는 게 천양지차이였다더라고요. 당연히 대상자의 주거 만족도도 편차가 크고요. 어떤 문제를 얼마 들여 어떻게 고치는지, 공사 과정과 예산 집행의 투명함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 프로세스를 정리하기 위해 건축가를 투입하자 결정하고 저희가 적합하다 판단한 것으로 보여요.

예산이 적으니 활동에 제약도 많았을 것 같아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서는 주택 개선비용 4천만원과 대상지, 대상자만 정해주고는 설계안과 공사방식, 시공 일정 등 전 과정을 일임했어요. 모든 걸 건축가가 결정하고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책임도 저희가 지는 방식이었죠. 벌교의 경우, 12월 말에 프로젝트를 주고는 설날 입주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여관방에서 설계해서 바로 작업자를 구한 뒤에 시공에 들어갔죠. 공사비나 이런 것들을 조율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어요. 왜냐면 대상자들은 집도 없이 추운 겨울에 집만 지어지길 기다리는 상태이니 마음이 급했죠.

진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요

'어깨에서 힘을 빼는' 게 어려웠어요. 적은 예산안에 맞추는 건 어떻게든 되긴 돼요. 인건비가 부족하면 저희가 삽이라도 뜨면 되니까요. 여러 단체의 후원과 기부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라 저희 뜻대로 컨트롤이 안되는 것들이 많았어요. 창호도 기증받았더니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고, 마감도 이쪽과 저쪽이 다르고, 창호 윗선을 맞춰 달아야 하는데 그것도 안 맞고요. 디자인적으로 욕심을 버려야 하는데, 그걸 버리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웃음).

현장에서 배운 것도 많을 것 같습니다

사실 프로젝트의 공익성이나 설계비 유무와는 별개로 저희에게도 많은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된 프로젝트였어요. 각자 사무소 내에서 설계는 했지만, 현장에서 발로 뛰어본 경험은 별로 없거든요. 근데 이 프로젝트는 최대 25일 이내에 건물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압축적으로 볼 수 있어요. 기한을 넘기면 공사비가 늘어나 감당이 안 되니 어떻게든 그 안에 끝을 내야 하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저희 또래 젊은 건축가들이 저희와 비슷한 경험과 연륜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과정을 경험해보는 건 도리어 돈을 내고라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른 젊은 건축가들과도 그런 경험을 나누고 싶어서 다섯 번째 저비용 주택은 또 다른 젊은 건축가가 전체를 총괄하고, 저희는 코디네이터 역할만 하고 있어요.

건축 외적으로 얻은 것도 많았을 것 같아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우리나라에 그렇게 열악한 주거 환경이 많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절대적인 주거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사람이 통계조차 못 낼 정도로 많다는 거죠. 아마 직접 보지 않으면 상상이 안될 거예요. 화장실이 없는 집이 많고, 아직도 쥐가 나오는 집도 있어요. 그런 곳에 사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이런 주거 현실에 되도록 많은 건축가가 관심을 두고 여러 방면으로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식의 프로젝트로는 사무실을 유지하기 힘들지 않나요

강진 건은 원래 설계비가 있었어요. 근데 관계자 왈, '공사하고 남으면 가져가라' 하시더라고요(하하). 공사가 다 끝나고 돈이 이천만원 조금 안 되게 남기는 했어요. 근데 건물은 다 지었는데 아이들이 공부할 컴퓨터와 책상, 의자 등 집기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쓰시라고 드리고 나왔죠. 저비용 주택 시리즈의 경우는 재능기부 형식으로 참여하되 대신 모든 권한을 건축가에게 줬어요. 앞서 말했듯, 배울 점이 많아서 오히려 돈을 내고라도 가서 경험할 만한 가치가 있었고요. 저희가 재능기부 한다고 하면 누구는 돈 많아서 건축을 취미로 하나 보다 생각하는데요, 아마 또래 젊은 건축가 중에서 저희가 제일 가난할 걸요(웃음).

혹자는 이러한 재능기부가 건축 시장의 정당한 설계비 책정에 혼란을 준다는 이야기도 해요

국내 건축가들이 설계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게 이런 재능기부 때문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에요. 재능기부는 저희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고 베풂으로써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될 때 쓸 수 있는 말이죠. 저비용 주택 건축주들은 심지어 저희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존중해주고 고마워하는 분들에게 하는 것이 재능기부에요.

국내 설계 시장의 기형 현상은 기성세대 건축가들이 만들었지요. 시장에 건축가의 역할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왔기 때문에 초래한 결과에요.

재능기부라는 단어를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 남발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언젠가 자동차 회사에서 폐차를 이용해 문화단지를 만들 거라며 재능기부를 해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들이 버는 돈이 얼만데, 그 사업에 건축가들을 이용하며 재능기부란 말을 쓰면 안 되죠. 우리나라 공공기관도 마찬가지예요. 자본과 권력을 가진 힘센 사람이 이제 막 독립해 스스로 서보려 하는 힘 약한 사람에게 '돈 받지 말고 일해볼래?' 라고 제안하는 것, 이건 재능기부가 아니에요. 또, 재능기부를 하더라도 권한이 건축가에게 있어야 해요. 다 짜놓은 판에 가서 에너지만 쓰고 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후로 주택과 근린시설 등 왕성한 활동을 보입니다. 특별히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서울 부암동에 신축과 리모델링을 함께 한 집이 있었어요. 건축주가 한옥의 지붕을 그대로 갖고 싶어 하셨고, 마당에 있던 나무도 그대로 두고 싶어 하셨어요. 일부 철거를 해야 하는데 포크레인이 못 들어가고, 게다가 북악산 자락이라 파면 바위가 나오는거에요. 철거에만 한 달, 3천만원이 넘게 들어갔어요. 나중에는 예산이 부족해 저희가 가서 땅 파고 페인트칠하며 부족한 인건비를 맞추었어요.

또, 순댓국집을 설계한 적도 있어요. 왜 순댓국집을설계비 내가며 지으려 하시나 여쭤보니, 자신의 가게가 순댓국집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시더라고요. 숲 속에 온 듯한 느낌이 들도록 외피를 180도 회전하는 녹색 패널로 디자인했는데, 이걸 잡아주는 고무 성형 값만 5백만원 든다는 거에요. 현장 소장님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PB관을 거기에 끼워봤는데 딱 맞는 거에요(하하). 게다가 강도도 높아서 고무링을 대신해 쓸 수 있었어요.

많은 프로젝트들이 처음 저희가 계획하고 그린대로 되진 않아요. 상황과 예산에 맞춰 작은 부분들을 수정하고 현장에서 바꿔가며 완성해가는 거죠. 그러면서 배워가고요.

JYA의 행보는 젊은 건축가들도 독립해 충분히 생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저희도 이제 3년 반 됐어요. 아직 살아남았다고 이야기하기는 조금 힘들죠.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인연을 만들고 좋은 반응을 끌어내며 놀라운 인연과 우연이 연결돼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그래도 그동안 더 신경 쓸 프로젝트, 덜 신경 쓸 프로젝트 구분하지 않고 전력으로 질주해 달려왔다고 생각해요. 여기에만 올인해도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자리잡고 성장해가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에요.

운영하는 블로그에 '생존기'를 차곡차곡 쌓고 있는데, 그 일기의 마지막은 무엇이 될까요

저희가 만약 생존해 살아남는다면 집안에 돈이 많아 친인척의 건물이나 부모님의 집을 지어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지금 최선을 다하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굉장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프로세스가 작동하는 걸 증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저희가 쓰고 있는 생존기 마지막 문장이 될 테고, 이게 JYA의 존재 이유와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제이와이아키텍츠 (JYA-RCHITECTS)서울시 마포구 성지길 25-24 2층 070-8658-9912http://jyarchitects.comhttp://jyarchitect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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