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이우중 2015. 6. 14.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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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았다. 매번 서둘러 내려갔다 돌아오기를 되풀이했지만 이날은 여유가 있어 편안하게 주변 풍경을 돌아봤다.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지칠 줄 모르고 하루 종일 뛰놀아도 끝이 없어 보이던 해수욕장 백사장은 천천히 산책하기에도 짧은 거리로 변해 있었다. 어머니도 많이 늙으셨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내가 양손에 들기도 벅찬 장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나머지 한 손은 내 손을 잡던 억센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같은 길을 빈손으로 걸으면서도 "잠시만 쉬었다 가자"며 몇 번이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우중 사회부 기자

내가 생각하던 고향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에로의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이 세상의 지도로는 돌아갈 수 없다"던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르며 잠시 비감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생각해 보니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이 바뀌었을 뿐, 변한 것은 고향이 아니었다. 고향의 해수욕장은 원래 국내 해수욕장 중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늙었고, 나는 자랐다.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여운이 짙었다. 혼자 산 지 꽤 됐지만 군 시절을 제외하고 고향집 생각이 이처럼 계속 머리를 맴돈 적은 없었다. 다음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먹고살기 바쁜 세상의 눈으로 보며 쓸데없는 고향 걱정도 했다.

문득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갓 시작했을 때 사감선생님의 훈화가 생각났다. 3월의 어느 토요일 새벽, 사감선생님은 이례적으로 기숙사생 전원을 바깥에 소집해 점호를 치렀다. "오늘은 주말이니 모두들 집에 내려가 부모님을 뵙고 오라"며 "반드시 집에 다녀온 다음에 보고하라"고 당부했다. 선생님은 "지금이 매주 고향집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갓 중학생 티를 벗었고 집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들떠 있기만 했다. 게다가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터라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쌀쌀한 바람에 새벽잠을 빼앗긴 원망은 고스란히 사감선생님에게로 돌아갔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뜻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됐다. 죄송스럽게도 선생님의 존함마저 기억 나지 않지만 그 말만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그날의 훈화는 오랜 시간을 꿰뚫어 제대로 작용한 셈이다.

부모님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쯤 남았을지 헤아려 보았다. 아마 어머니 배 속에 들어 있던 시간보다도 짧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서글퍼졌다.

더 늦기 전에, 그리고 부모님이 더 늙기 전에 자주 연락을 드려야겠다는 당연한 생각을 새삼스레 하며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한때는 가장 익숙했던 번호, 그래서 굳이 '우리집'이라고 저장할 필요도 없던 번호를 누르다가 국번이 헷갈려서 잠시 멈칫했다. 그 순간 또 다시 서글퍼진 까닭은 기억력 저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우중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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