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1200명이 만들었다, 과잉진료 없는 치과

김강한 기자 2014. 12. 17.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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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초 주부 송모(42·서울 노원구)씨는 초등학교 6학년 둘째 딸(12)의 치아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멀쩡해 보이는 치아를 두고 한 치과에선 "눈엔 보이지 않지만 엑스레이 사진상 충치 소견이 있어 6개를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상 치료비는 50만원. 다른 치과는 "치아 3개를 금으로 씌워야 한다"며 100만원을 불렀다. 송씨가 "치과마다 말이 달라 믿을 수가 없다"고 하자 한 이웃이 "주민들이 만든 치과가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세운 병원이라 믿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름도 '마을치과'였다. 그곳에서 만난 의사는 "당장 치료할 필요가 없다. 3개월간 지켜보자"고 했다.

병원마다 다른 치료비, 과잉 진료에 넌더리가 난 주민들이 직접 병원을 세우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서울에는 은평·마포·노원·영등포·성동구에 치과·한의원·의원 등 주민이 만든 병원이 7곳이나 문을 열었다. 노원구 마을치과도 그런 곳 중 하나다. 하루 평균 10여명이 진료를 받고 2주치 예약은 꽉 찼다. 치과 의사가 한 명이라 시간당 평균 1.5명밖에 진료할 수 없지만 환자들은 기꺼이 30~40분을 기다렸다. 스케일링을 받으러 온 7호선 지하철 기관사 김모(42)씨는 "양심적으로 진료하는 병원이라는 말을 들어 믿고 왔다"고 했다.

마을치과의 주인은 장애인·회사원·가정주부·떡집 주인·수퍼마켓 주인 등 평범한 시민 1200여명으로 구성된 '함께걸음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함께걸음)이다. 그 모태가 1993년부터 노원구에서 장애인 가정 방문 진료 봉사를 해온 의사·한의사 등 의료인 10여명이었다. '뜻있는 소수의 활동만으로는 비싼 의료비, 과잉 진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은 "장애인과 지역 주민, 의료인이 함께 병원을 만들자"며 동참자를 구했고 2005년 초대 조합원 300명으로 함께걸음을 만들었다. "치과를 만들자"고 뜻을 세운 것은 그로부터 다시 7년 뒤인 2012년이었다. 그해 의료사협 형태로 병원을 세우는 것이 법적으로 가능해졌다. 조합원들의 60%가 치과를 원했다. 설문 결과 "진료비도 비싸고 과잉 진료도 많다"는 의견이 많았다.

치과에는 5억원이 필요했다. 조합원이 700~800명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벅찬 돈이었다. 조합원들은 거리로 나섰다. '주민 1000명이 직접 만드는 마을치과. 함께해요'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여름, 겨울 가리지 않고 지하철역·버스정류장에서 홍보물을 돌렸다. 한 주민은 조합원 가입 홍보 현수막만 보고 그 자리에서 100만원을 보내왔다. 한 회사원은 "돈은 이런 곳에 써야 가치가 있다"며 500만원을 내놨다. '장애인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치과'를 만든다는 소식에 장애인들도 지갑을 열었다. 지체장애인 홍모(48)씨는 의류 실밥을 제거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3개월간 번 30만원을 냈고, 중증장애인 김모(48)씨는 기초생활수급비를 모아 150만원을 냈다. 병원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진료 순서가 뒤로 밀리는 설움을 맞본 사람들이었다. 조합원은 목표했던 1000명을 훌쩍 넘겨 1200여명이 됐다.

개원 비용을 마련했지만 '진료비가 싸고 진료의 질도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없잖았다. 조합원들은 그런 우려를 없애기 위해 실력 있는 의사를 직접 찾아 나섰다. 지난 8월 치과 의사 구직 사이트에 모집 공고를 냈다. 6명의 지원자를 심층 면접한 끝에 8년차 치과 의사를 초대 원장으로 뽑았다. 같은 연차 치과 의사들이 받는 연봉을 보장했다. 진료비는 다른 치과와 비슷하지만 진료비 원가를 공개하고 환자가 치료 방법을 선택하게 해 애초에 과잉 진료 가능성을 없앴다. 대신 치과 재료는 조합 위원회에서 사전 회의와 검증을 통해 시중 제품 중 가장 품질이 좋은 것을 쓴다는 원칙을 세웠다.

지난 9월 1일 마침내 마을치과가 문을 열었다. 장애인 봉사를 하던 의료인들이 뜻을 세운 지 21년 만이었다. 함께걸음 강봉심 상임이사는 "병원 벽지 한 장, 대기실 의자 하나에도 환자를 위한 병원을 만들어달라는 주민들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 시행으로 병원 개설이 가능해진 이후 현재 전국 15개 의료사협이 병원 31곳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달 말에는 주민 700여명이 돈을 모아 성동구에 '건강한 마을치과'를 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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