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트렌드] 가업 승계 덫에 걸린 아시아 대기업들


경영에서 아시아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유달리 아시아권 기업의 성장이 빠르다는 점 외에도 아시아의 가치와 문화가 서방과 다르다는 사실은 각 분과 학문의 이론에서도 많이 다뤄져 왔다. 그러나 해외여행만 가 봐도 아시아와 비아시아의 문화적 차이는 확연히 체감할 수 있다. 거래 위주의 사회인 서구 문화는 거래에 관련한 조항들과 관련 절차들이 중시된다. 이에 따라 손해에 대한 복구 절차와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법적 제도가 발달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계약에 문제가 없다면 낯선 사람과도 비즈니스가 가능하며 계약 조건에 따라 거래 파트너도 얼마든지 교체한다.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는 기업 간 경쟁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에 비해 아시아에서는 계약보다 관계가 중시돼 왔다. 아시아의 정신문화로 대변되는 유교·불교·도교는 모두 자기가 속한 사회 및 시스템에서 조화를 중시한다. 특히 대인 관계의 규범으로 작용했던 유교는 사회 내의 위계를 분명히 규정했다. 계약을 중시하는 서방과 비교해 볼 때 아시아는 관계가 중시되고 그 관계도 보통 반복적이고 지속된다. 손해에 대한 복구 절차로서 법적 제도는 덜 발달됐다. 네트워크는 한 번 생성되면 소멸 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아시아권에서 많은 비즈니스들은 손해를 보더라도 법원으로 직행하기보다 장기적으로 멀리 보는 경우가 많다. 제도가 불완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관계 사회에서는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제도보다 분쟁 당사자 양자를 잘 아는 제삼자가 개입하는 등의 방식을 사용해 해결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법적 제도로 해결하는 것은 곧 네트워크의 단절을 의미한다.
관계 중시 사회…혼맥으로 얽힌 태국 재계
관계적 사회에서는 양자 간의 관계도 중시되지만 다자간의 관계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자간 관계는 지역·학교·결혼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예를 들면 중국 후난성의 대기업은 각각 다른 기업들이 상호간 채무 관계로 연결돼 있다. 지역 네트워크의 한 예다. 관계의 효과는 공기업보다 사기업에서 훨씬 두드러지는데, 실제로 중국에서 국유기업보다 민영기업에서 오너가 특정 종교를 믿거나 기업인 모임에 가입하는 정도가 훨씬 높았다. 반면 여성의 참여는 민영기업보다 국유기업에서 현저히 높았다.
관계 사회의 가장 좋은 예는 기업집단(business groups)이다. 기업집단은 '정치적·문화적·지리적 혹은 혈연으로 엮어진 관계를 바탕으로 법적으로 독립된 기업들이 모인 집합'으로 정의하며 기업집단의 자회사들끼리는 타 회사와 구별되는 강한 친밀감과 소속감이 존재한다. 공기업이나 국유기업이 아니라면 오너가 지향하는 가치를 향해 기업집단 간의 문화적 유대가 형성된다. 집단 내부의 네트워크는 계열사가 아닌 독립적 외부 기업까지 확장돼 특정 대기업의 부품 업체들은 고정된 대기업 고객사와만 협력하기도 한다.
만약 기업집단, 채무 관계나 결혼 등 법적으로 공식화된 네트워크가 아니라면 다자간이든 양자간이든 그 관계는 상호간 도움을 주고받는 메커니즘(reciprocality)으로 유지된다. 내가 상대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표시로서 접대와 선물이 관계의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물건이나 서비스의 가치가 선물 받는 상대방이 알아보기 쉽게 드러날수록 선물로서 선호된다. 현실적으로 선물과 뇌물의 경계선은 매우 불분명하다.
분칸와니차 등의 2008년 연구에 따르면 태국 기업인 집안은 다른 기업인 집안과 자녀를 혼인시키는 예가 가장 많고 정치인 집안이 그 뒤를 이었다. 실제로 주식시장에서 특정 기업이 2세나 3세의 결혼 발표를 알리면 불확실성 때문에 주가가 떨어지다가 결혼식이 열린 당일부터 주가가 계속 상승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혼이 더 이상 결혼당사자 간의 개인사가 아니라 기업 간 제휴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홍콩의 미심집단(맥심그룹)은 한국의 SPC그룹 같은 제과·제빵을 생산하는 기업인데 결혼을 통해 계속 거래처를 확장해 왔다. 최근에는 홍콩의 항공사인 캐세이패시픽과 사돈 관계를 맺음으로써 캐세이패시픽의 기내식을 담당하고 있다.
아시아 기업들은 오너의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며 이들 오너의 문화적 가치가 기업의 문화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기업 문화는 기업의 독특한 경쟁력을 구성한다. 이에 따라 아시아 기업의 미래는 이들 오너의 2, 3세들이 이러한 가치를 잘 이어갈 것인지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관계 중심의 동아시아 기업은 설립자의 가치가 가장 잘 반영돼 있다. 아시아 기업집단의 창업 1세대들은 사실 고등교육이나 전문적 경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별로 없다. 아시아 제일의 갑부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도 학교를 중퇴했고 대만 포르모사 플라스틱 그룹의 왕융칭 회장은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창업 1세대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방향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 가장 부자인 와하하집단의 쭝칭허우 회장은 가장 닮고 싶은 인물로 마오쩌둥을 주저하지 않고 꼽는데, 그 이유는 마오쩌둥이 '합리적 독재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오처럼 강하게 자신의 의사결정을 밀어붙이는 그의 경영 방식은 프랑스 기업 다농과의 합작에서 갈등을 야기해 결국 양사는 합작에 실패했다.
아들 쫓아내고 회사 차지한 어머니
이들 1세대들은 다들 근면성실하고 뛰어난 현실적 경영 감각의 소유자였다. 대만 포르모사 플라스틱 그룹의 왕융칭 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일한 결과 종잣돈을 모아 남동생과 쌀가게를 차려 자기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왕 회장은 매일 아침 찬물로 샤워를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본인은 찬물로 정신을 깨우고 마음가짐을 단련해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 특허 수에서 에릭슨을 넘어선 중국의 정보기술(IT) 기업 화웨이의 창업자 런정페이 회장은 늑대를 닮은 군대식 기업 문화를 강조해 연구·개발직 종사자들에게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놓고 집에 가지 말고 일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아시아 기업들은 이렇게 오너의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며 이들 오너의 문화적 가치가 기업의 문화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기업 문화는 기업의 독특한 경쟁력을 구성한다. 이에 따라 아시아 기업의 미래는 이들 오너의 2, 3세들이 이러한 가치를 잘 이어갈 것인지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많은 아시아 대기업들이 2세 혹은 3세들의 경영 승계를 앞두고 있다. 2세를 거쳐 3세대가 되면서 초기의 많은 가치들이 퇴색되고 있다. 많은 후계자들은 어릴 때부터 해외로 유학해 교육을 받고 이들은 더 이상 아시아적 가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근검절약하는 생활 방식이 몸에 배었던 창업주 1세대에 비해 이들 2, 3세대 후계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물질적인 풍요에 젖어 이른바 '돈을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남자 자손을 여자 자손보다 더 중시 여기는 전통이 있는데, 한국도 심각한 문제인 남녀 성비의 불균형 이유 중 하나는 남아 선호 사상일 것이다. 청치니엔의 2006년 연구에 따르면 대만에서는 오너 집안의 아들 수와 기업의 크기가 밀접한 관계로 나타났다. 그 이유는 유교 문화인 대만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는데, 아들 수가 많아지면 기존 회사를 쪼개 물려줘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식들끼리 갈등의 소지가 높기 때문에 아들의 수가 많으면 아들끼리 같은 업종에서 경쟁하지 않도록 아예 산업 간 다각화를 추진한다는 해석이다.
이 같은 주장을 입증이라도 하듯 아시아 대기업의 2세 및 3세들 간에 줄소송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생존해 있는 창업주들은 이제 나이가 70세를 훌쩍 넘겨 노년에 접어드는데, 이들의 자손이 가업 승계와 관련해 경쟁을 시작한 것이다. 스탠리 호 회장의 자식들 간 재산 소송 싸움이나 퀑슈힝 선홍카이 회장이 창업주이자 그룹 회장이었던 남편의 사후에 경영을 담당하던 아들을 쫓아내고 스스로 그룹 회장 자리에 취임해 권력을 차지, 쫓겨난 아들과 아직도 서로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싸우는 일련의 사건들은 홍콩에서 발간되는 신문이나 잡지의 경제 기사의 단골이다.
'부자 3대 못 간다'는 아시아 지역의 공통 격언
혹은 아버지에 비해 경영 역량이 부족한 2세와 3세 후계자들은 이들 기업의 앞날에 많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1년 2월 기사에서 홍콩 청쿵그룹의 리카싱 회장, 홍콩의 부동산 개발 그룹인 선홍카이의 여장부 퀑슈힝 회장, 샹그릴라호텔 체인으로 유명한 말레이시아 궉그룹의 로버트 궉 회장, 홍콩과 마카오를 중심으로 쉐라톤호텔을 비롯한 다양한 부동산 개발을 하는 뉴월드그룹의 청위텅 회장, 역시 홍콩과 마카오를 중심으로 부동산 개발을 하며 지역 내 카지노와 MGM을 소유한 순탁그룹의 스탠리 호 회장, 홍콩의 엔터테인먼트, 건설 및 호텔 체인을 소유한 재벌 뤼치우 회장, 홍콩 호프웰그룹의 오너 고든 우 회장 등 아시아의 대표적 슈퍼 부자들을 예로 들며 자산 10조 달러가 넘는 이들 기업이 원만치 않은 기업 승계로 몰락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한편 아시아에서 기업을 경영하는데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던 '관계' 역시 그 윤리적 측면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고 있다. 그룹 내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든 그렇지 않든 홍콩·동남아 및 중국의 대기업들은 다들 부동산 개발 회사를 자회사로 소유하고 있다. 주식시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마땅한 채널이 없기 때문이라는 제도적 설명도 있고 유목민이 아닌 농경문화의 전통 때문에 땅에 대한 가치를 중시한다는 문화적 해석도 있다. 그런데 부동산을 개발하고 이를 상업화하면서 이권을 둘러싼 이들과 관계를 형성해 공존하는 데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국 정부에서 순탁그룹이 미국 MGM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스탠리 호와 홍콩 마피아의 연계를 확인하고 이를 맹비난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을 비롯한 각종 조사에서 이들 오너들이 부자 리스트 상위에 오르지만 비도덕성으로 인해 대중에게서 존경받지 못하는 것도 이들 기업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흥미롭게도 부자는 3대를 가지 못한다는 속담과 비슷한 말이나 격언은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국가에 있다. 부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변화무쌍한 시장 상황과 나날이 격화되는 경쟁에서 장수 기업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야만 가능하다. 아시아의 대기업들은 그래서 요즘 고민이 많다.
참고 문헌
Bunkanwanicha, Pramuan, Joseph P. Fan, and Yupana Wiwattanakantang(2008년). "Why do shareholders value marriage?" ECGI (European Corporate Governance Institute) Working Paper Series in Finance.
Chung, Chi-Nien(2006년) "Beyond guanxi; Network contingencies in Taiwanese business groups." Organization Studies 27(4): 461~489.
곽주영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jooyoung.kwak@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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