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녹찻물에 밥 말아 보리굴비 한 점 얹으면, 더위 끝

2014. 7. 1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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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전라도 평야지대에 만석꾼지기 선비 집안이 있었다. 77간 기와집 행랑채에는 마름과 종들로 들끓었고, 사랑채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안채에는 찬모와 침모까지 거느렸을 정도로 이 지역 명문거족이었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젊은 집 주인은 아마 일찍 개명했던가 보다. 어느 날 종들을 불러 모아 그간 노고를 치하하고 한 살림씩 재물을 지워 내보냈다. 고왔던 그 집 마님은 몸에 밴 교양에 재주가 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노년의 마님은 영광 법성포로 시집간 딸네 집에 의탁하게 된다. 마님의 예술적 소양, 그리고 화려했던 시절에 접했던 고급 음식들은 고스란히 외손주들에게 스며들었다. 서울 명일동 < ;엄마의 밥상 > ; 박인숙 씨가 그 외손주들 가운데 한 명이다. 외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배웠던 솜씨로 밥상을 차려낸다.

저장성 높인 보리굴비, 기름 빠져 담백한 맛 일품

박씨도 예전 외할머니의 연배에 차츰 다가서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말투며 음식이 부지불식간에 외조모를 닮아간다. 송곳은 자루에 숨겨도 삐져나오게 마련이다. 공공기관 주방에서 10년 동안 음식 봉사를 했던 터라 주변 지역 사람들은 박씨의 빼어난 손맛을 익히 안다. 한편으로는 그 실력이 아깝다며 좀 더 널리 발휘해볼 것을 은근히 부추겼다. 결국 몇 달 전에 식당을 차렸다. 이순(耳順) 언저리의 그녀에겐 다소 늦은 감도 든다. 조금 힘에 부치지만 젊은 아들이 도와주고 있고, 흡족한 얼굴로 밥상에 앉은 사람들을 보면 희열이 생긴다고 한다.

< ;엄마의 밥상 > ; 주 메뉴는 보리굴비정식(1만5000원)이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식재료의 저장시설이나 수단이 보잘것없었다. 보리굴비도 그런 시대의 산물이다. 서해안에서 잡은 조기가 법성포에 모이면 염장해 두름으로 엮는다. 이것을 해풍이 부는 곳에 내다 널어 말린다. 덕장에서 황태를 말리듯 조기도 낮에는 바람, 밤에는 이슬을 맞으면서 굴비가 된다. 2~3주 정도 말리면 보통의 굴비가 완성된다.

보리굴비는 좀 더 장기간 보관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미리 잘 말려둔 통보리와 굴비를 항아리에 한 켜씩 차례로 재워둔다. 그러면 보리의 미강 성분이 굴비의 숙성을 이끌어내면서 맛이 좋아지고 굴비 속의 기름이 거죽으로 배어 나온다. 이렇게 만든 보리굴비는 누런 색을 띠면서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았다.

이 집에는 박씨의 고향 법성포에서 올라온 굴비를 보관하는 커다란 굴비 창고가 있다. 여기서 꺼낸 굴비는 소주를 부은 쌀뜨물에 4시간 동안 담가둔다. 물속에 담근 채로 비늘을 제거한 후 초벌로 쪄서 냉동실에 넣었다가 다음날 판매한다. 이렇게 해야 잡내가 나지 않고, 두벌 찌기 시간이 짧아 손님대기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작업은 매일 쓸 만큼의 분량만 해 제 맛을 유지한다. 보리굴비용 조기는 본래 참조기를 썼다. 그러나 참조기가 워낙 귀하고 비싸 지금은 조기의 일종인 부세를 쓴다.

씹을수록 짭조름한 감칠맛, 손맛 살린 반찬도 푸짐

< ;엄마의 밥상 > ; 보리굴비는 짭짤한 듯 담백하면서 단단한 살집이 꼬들꼬들하게 씹힌다. 이 맛을 더 도드라지게 해주는 장치는 녹찻물이다. 녹차 향이 진하지 않도록 녹차를 매우 엷게 탄 물을 차갑게 얼렸다 녹인 물이다. 여기에 밥을 말아 굴비 살점 얹어 먹으면 더위에 달아났던 입맛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와 배시시 웃는다. 잘 숙성된 생선살의 감칠맛과 차갑고 짭조름함이 뒤섞인 쾌락이 입 안에 머문다. 이건 넉넉지 못한 살림에 여름날 어쩌다 호강 삼아 먹어봤던 예전의 그 맛 그대로다.

여기에 함께 나오는 반찬들 모두 박씨의 손맛이 밴 이른바 홈메이드 음식이다. 도라지나물, 콩나물, 호박나물, 감자조림, 백김치, 고추멸치조림, 배추김치, 방풍장아찌 등 모두 갓 무치고 졸여내 맛의 서슬이 살아있다. 반찬 중 압권은 간장게장과 나라즈케다. 간장게장은 박씨가 젊은 시절부터 즐겨 만들어 먹었던 반찬이다. 비린내 없이 얌전한 감칠맛이 돈다. 무나 울외를 청주 지게미에 담가 만든 나라즈케(ならづけ, 奈良漬け)도 눈길을 끈다. 일제강점기에 전북 지방을 중심으로 퍼진 반찬이다. 아삭하고 새콤하면서 청주(정종) 향이 살짝 풍긴다. 비슷한 맛의 장아찌류가 많지만 예전 맛에 가까운 나라즈케는 만나보기 힘들다.

동치미국수 등 외할머니 마음 담은 엄마 밥상

주인장 박씨는 손맛 못지않게 인심도 후하다. 1만5000원인 보리굴비정식을 시키면 반찬이 푸지다. 보리굴비도 1인당 한 마리씩 준다. 그래서 2인 손님이 오면 정식은 1인분만 시키고 나머지는 다른 저렴한 메뉴로 고르라고 귀띔한다. 손님 측에서 오히려 속보이는 짓 같아 망설인다. '최소 주문 2인분'을 내거는 게 요즘 식당이고 보면 박씨의 태도는 너무 어수룩하거나 신선하다. 반찬이 푸짐하다 보니 식사가 끝나도 조기를 비롯해 반찬이 남는 경우가 많다. 손님이 원하면 남은 반찬을 모두 싸준다. 추가 공깃밥 값을 더 받지 않는 점도 손님을 기쁘게 한다. 식당이 자리한 곳은 아파트 상가 지하 1층이다. 벽 없이 탁 트인 주변 분위기는 마치 전통시장처럼 정겹다.

보리굴비정식 외에도 굴비백반정식(6000원), 굴비 한 마리와 간장게장 한 마리가 나오는 간장게장백반정식(1만원)이 있다. 여름철 계절 메뉴로는 동치미국수(5000원), 메밀전병(5000원), 콩국수(5000원)가 있다. 동치미 국수의 국물은 공장제 육수가 아니라 박씨가 직접 담근 동치미 국물을 살짝 얼려서 쓴다. 백김치를 가늘게 채 썰어 올린 고명은 씹는 맛이 좋고 개운하다. 어떤 메뉴를 선택해도 엄마나 누나의 정이 담긴 집밥 맛이 솔솔 난다. 주변의 지인들은 아직 장사가 서툰 박씨를 염려하기도 한다.

"남들이 '식재료 국산'이라고 써 붙이래요. 근데 그거 당연한 걸 부러 써 붙여놓는 게 우습잖아요. 내가 형편껏 양심껏 대접하면 되는 거지."

외할머니 빼닮은 남매, 요리달인 중견 시인이 박씨 친동생

문인들 가운데 출중한 요리 솜씨로 소문난 중견 시인이 있다. 귀티 나는 외모에다 시 서 화에 음주 가무까지 두루 능통하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그는 못하는 요리가 없다. 탕, 면, 찜, 조림, 김치, 무침, 음료까지 다양하다. 출판사에서 요리책을 내자고 은근히 조르는 눈치다. 어쨌든 종류 불문하고 그가 내놓는 음식은 '먹기 전용'이 아니다. 시인의 음식에는 향이 들썩이고 색이 일어서고 조형미의 꽃이 핀다. 객들은 음식이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에 앞서 카메라를 든다.

그의 시와 산문은 여성적 정조의 섬세한 아름다움이 흥건하다. 시인의 음식은 식재료로 써낸 시이고 산문이다. 그러니 그의 음식은 8할이 예술이고 2할만 식용인 셈이다. 그의 음식을 먹고자 아니, 감상하고자 지금도 지리산 자락 시인의 집에는 문인과 예술인이 줄을 잇는다. 그의 문장을 닮은 음식의 맛과 색과 미는 이미 문단에 정평이 나있다. 그 시인이 바로 마님의 또 다른 외손주이자 이 집 주인장의 남동생이다. 시인의 예술 밥상과 < ;엄마의 밥상 > ;, 그 뿌리는 하나였다. 외할머니의 반듯하고 너른 품이었다.

< ;엄마의 밥상 > ; 서울 강동구 고덕로 210(명일동 15) 삼익 2차쇼핑 지하 1층, 02-426-8826

기고= 글, 사진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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