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126> 미그기 몰고 귀순한 이웅평 대위

1983년 2월 25일 오전 10시 58분, 서울 등 수도권에 갑자기 대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공습경보 사이렌이 5분간 계속됐다. 당황한 시민들은 전쟁의 악몽을 떠올리며 생필품 사재기를 위해 슈퍼로 몰려갔고 방송국과 신문사에는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정오를 넘기면서 사건 진상을 알리는 호외가 거리에 뿌려졌다.
이날 오전 10시 30분쯤,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미그기 1대가 편대를 이탈해 기수를 남으로 돌렸고,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고도를 낮춘 채 시속 920km의 최고속도로 북방한계선을 통과했다. 우리 공군은 즉시 요격태세를 갖춘 F5 전투기를 발진시켰고 연평도 상공에서 이와 맞닥뜨린 미그기는 양 날개를 흔들어 전투 의지가 없음을 밝혔다.
남으로의 귀순의사를 확인한 F5 전투기 편대가 미그기를 유도해 수원비행장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서울 등 수도권 일대에 공습경보가 발령돼 커다란 혼란을 빚은 것이다.
미그 19기를 몰고 온 사건의 주인공은 북한 조선인민군 공군 조종사 이웅평 상위(대위)였다.
1954년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비행사였던 그가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동해안에 떠내려온 삼양라면 봉지에서 "파손이나 불량품은 교환해 드립니다"는 문구에 충격을 받아 남하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북한 최고 존엄이었던 김일성 사진을 실수로 훼손한 후, 비판에 시달려 귀순을 결심했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한국의 환영 열기는 대단했다. 쿠데타로 집권해 체제 선전에 열을 올리던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이런 좋은 기회가 따로 없었다. 미그기를 몰고 온 대가로 10억 원이 넘는 보상금이 주어졌으며 폭우 속에 열린 여의도 시민환영대회에서는 13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북한 실상을 전하는 그에게 분노와 함성을 함께 쏟아냈다.
북한에서의 조종사경력과 미그기의 군사학적 가치를 인정받은 이웅평은 그해 5월 '빨간 마후라'와 '서울의 찬가'를 부르며 대한민국공군 소령에 임관돼 제2의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군 생활은 14년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결혼과 함께 한국 사회에 적응하며 정보부서와 공군대학 교수직을 맡아 대령 계급까지 올랐지만, 북에 남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심적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그를 짓눌렀다.
두 벌의 군복이 가져온 부담 때문이었을까. 1997년 간 경화 판정을 받고 쓰러진 그는 5년여의 투병 끝에 2002년 5월 48세의 나이로 병상에서 생을 마감했다.
1983년 2월 25일, 전쟁을 알리는 공습경보 소동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웅평씨의 삶과 죽음은 분단국가의 현실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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