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견문기 2] '마성의 구장' 올드 트래포드를 가다

(베스트 일레븐=맨체스터)
프리미어 인(영국의 대중 숙박 시설)에서 바라본 창밖의 하늘은 비교적 청명하다. 숙소를 나와 퍼거슨길을 5분 정도 걸으니 올드 트래포드가 당당하게 그 덩치를 드러낸다. 광장에 서서 올려다보니 겨울 햇살이 경기장 전면 유리 외관을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간다. 지금은 박지성의 숨결을 느낄 수 없지만 과거 그가 무수히 많은 발자국을 찍은 곳, 올드 트래포드다.
올드 트래포드는 한 단어로 규정 지을 수 없는 다양한 매력을 지녔다. 겉모습만으로 투박하다고 생각하면 편견이다. 전혀 올드하지 않다. 외려 영국 경기장 중 가장 현대적이다. 웅장하면서 세련미까지 갖췄다. 건축 디자인도 상당히 독특하다. 경기장 상단엔 트레이드 마크인 하얀 철골 구조물이 자리한다. 새가 날개를 접은 형상을 한 육각 철골은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외관에 포인트를 준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소복히 내려앉은 이 날개 뼈대가 없었다면 올드 트래포드는 컨벤션 센터처럼 사무적이고 평범한 건축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그 밑엔 매트 버스비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감독 동상이 있다. "날 좀 보소" 하고 서 있는 자태가 위풍당당하다. 오른쪽엔 라이언 긱스 현수막이 세로로 길게 걸려 있다. 황갈색 동상과 비비드한 포스터, 과거형 레전드와 진행형 레전드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버스비 동상 수십 미터 맞은편엔 세 청년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우정을 뽐낸다. 더 유나이티드 트리니티(The United Trinity). '맨유 레전드 3인방' 조지 베스트·데니스 로·보비 찰튼이다. 이중 베스트는 작고했고, 현재는 로와 찰튼만이 살아 있다.
스타디움 바깥 울타리엔 맨유 선수들의 맥주 광고 포스터가 병풍처럼 띠를 두른다. 그 앞엔 목재로 된 책상과 의자가 있다. 빨간색 테이블 프레임이 뚜렷함을 더한다. 경기장 앞에 조그만 비석 같은 것들이 바닥에 박혀 있다. 거기엔 암표상 등 불법 판매업자 등에 대한 팬들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문구가 한국어·중국어·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팬들이 경기장을 쉽게 순환할 수 있도록 전면에 매표소·출입구·메가 스토어 등이 일렬로 나란히 배치돼 있다.

올드 트래포드의 자태를 한껏 느낀 후 건물 동쪽 하단에 난 길을 따라 들어갔다. 동쪽 스탠드로 향하는 길이다. 이곳을 따라 3분가량 걷다 보면 뮤지엄 투어 입구와 레드 카페가 등장한다. 가는 길 곳곳에 붉은색 미니 콘테이너 건축물이 안구에 콕 들어와 박힌다. '유나이티드 리뷰'라는 공식 매치데이 프로그램 책자를 파는 곳이다. 경기장 동편서 큰 도로로 난 길이 바로 '알렉스 퍼거슨 웨이'다. 원래는 '워터스 리치'라 불렸다.
투어 입구와 레드 카페는 입구가 동일하다. 실내 오른편에 레드 카페가 있다. 입장에 앞서 경기장 측면 전경을 찍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입구 위에 퍼거슨 경이 팔짱을 끼고 있다. 이곳이 북쪽 스탠드다. 위로 올려다보니 '써 알렉스 퍼거슨(Sir Alex Ferguson) 스탠드'라고 쓰여 있다. 경기장 한쪽 스탠드에 개인 이름이 붙는 건 극히 이례적이라고 한다. 양쪽으로 퍼거슨이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25년간 맨유서 헌신한 퍼거슨의 노고를 기린 공간이다. 시선을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면 맨체스터 스위트·플래티넘 라운지·살포드 스위트 입구가 나온다.
투어 입구 로비는 멀티플렉스 매표소의 축소판 같다. 두 명의 검표원(?)이 조촐하게 손님을 맞는다. 투어의 정식 명칭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뮤지엄 & 투어 센터'다. 일일 방문객 수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한 직원이 "주말 같은 때는 2,000명 이상이 찾는다"라고 말했다. 입장료는 12파운드(2만 1,000원)다. 주말같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날엔 입장 수익만 약 5억 원이 넘는다. 얇은 가이드 북 한 권도 3.75파운드(약 6,550원)다. 게다가 각종 기념품과 레드 카페 등서 사람들이 소비하는 돈까지 계산하면 맨유의 투어 수익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레드 카페는 음식을 즐기면서 경기장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 햄버거는 너무 높아 입이 안 닫힐 정도다. 꾹꾹 누르다 지쳐 빵 따로 고기 따로 먹었다. 의자 뒷면은 선수들 이름과 등번호가 프린팅돼 있다. 장사 수완도 과연 명문답다.
입구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본격 투어에 돌입했다. 경기장 내 에스컬레이터 시설은 그 어떤 프리미어리그 구장에 뒤처지지 않는다. 뮤지엄 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은 3층이다. 각 나라 환영 문구가 반갑게 방문객에게 인사를 건넨다. '환영합니다'란 한국어가 눈에 띄었다. 첼시 스탬포드브릿지에도 환영 문구가 있었지만 한국어는 없었다. 카운터에 비치된 박물관 소개 팜플릿은 총 8개국(독일·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벨기에·한국·중국·일본) 언어로 번역돼 있다. 역시 한국어 버전이 있다. 박지성의 영향력이 이렇게나 크다.
박물관 운영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다. 맨유박물관은 국립 축구박물관과 무척 닮았다. 그러나 맨유만 집중적으로 조명해 밀도는 한층 높다. 첫 번째 테마는 데이비드 베컴이다. 벽면에 베컴을 상징하는 수많은 단어들이 박혀 있다. 처음엔 단순 나열이거니 했는데 멀찍이 떨어져 카메라 뷰 파인더로 들여다보니 베컴의 얼굴이다. 중앙엔 베컴의 연대기와 데뷔 시절부터 파리 생제르맹서 은퇴하기까지 입고 신었던 모든 축구 용품들이 전시돼 있다.
다음은 맨유가 수집한 모든 트로피를 모아 놓은 방이다. 맨유는 트로피만 한데 모아도 하나의 큰 테마가 된다. 그 개수가 카메라 앵글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많다. 트로피가 자아내는 찬란한 금은빛 향연에 눈이 시릴 지경이다.
트로피룸을 나오면 레전드룸이 있다. 보비 찰튼·조지 베스트 등 전설들의 발자취를 복원한 곳이다. 전설들의 흉상과 < 데일리 익스프레스 > 등 과거 신문 스크랩들이 쭉 나열돼 있다. 흑색 그라운드 도판에 새겨진 1958년 뮌헨 참사 피해자 이름들은 가슴 한쪽을 아리게 했다. 이밖에 유나이티트를 거친 역대 레전드들의 얼굴도 빠짐없이 녹아 있다. 레전드에 대한 예우가 가히 명문 클럽답다.
발걸음을 옮기니 스페셜 전시장이 나온다. 특정 주제 없이 다양한 테마로 구성했다. 버스비의 아이들, 유럽 무대 개척사, 시대의 종말 등 나선형 쇼윈도를 돌다 보면 흩어진 맨유의 기억들이 다시 조각 모음 되는 기분이 든다. 이곳을 한 바퀴 돌고 왼쪽으로 빠지면 '맨유-넷'이란 검색 기계가 있다. 과거 경기들과 선수들의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검색 박스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이름을 입력하니 그의 맨유 시절 각종 기록들이 나온다. 호날두와 가장 발을 자주 맞춘 수비수는 리오 퍼디난드가 아닌 존 오셰이였고, 박지성과는 108회 경기서 같이 뛰었다. 역대 맨유 출신 선수들을 모은 유나이티드 영건이란 코너를 거치면 3층을 한 바퀴 다 돈 거다.

그런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맨유 전시관은 마치 양파 같다. 껍질을 벗겨도 또 다른 껍질이 나온다. 지하로 내려가면 유나이티드 키트(Kit)란 섹션에 들어서게 된다. 여기선 맨유 역사상 모든 유니폼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밖에 글로벌 클럽답게 국제 무대 행보 및 홍보 활동 등을 인터내셔널 섹션서 소개한다. 그간 해외서 맞붙은 클럽들의 유니폼도 전시돼 있다. 물론 FC 서울의 유니폼도 걸려 있다.
기념품 숍엔 별로 살게 없다. 메가 스토어가 따로 있기에 상품 수가 적다. 관광객들을 위해 하나로 완결된 동선을 보자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대형 마트의 의도된 동선이 손님 호주머니를 교묘히 터는 것처럼 박물관 미로에 한 번 걸려드니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잠시라도 시선을 떼면 또 다른 세계가 들이닥친다.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조직된 동선이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스타디움 투어다. 뮤지엄 출구를 나와 철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잠자던 동공이 화들짝 놀란다. 붉은 물결이 눈앞에서 파도 친다. 적과 녹이 이렇게나 잘 어울렸던가? 7만 개가 넘는 붉은빛 좌석들이 초록 대지와 어우러져 청량감을 준다. 시원한 풍광을 보고 있자니 닫혔던 감각이 다시 열린다. 대각선 오른쪽은 그 유명한 스트렛포드 엔드(Stretford End)다. 동쪽 스탠드는 올드 트래포드의 가장 중요한 관람 포인트다. 1958년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은 23명의 영령이 스탠드 상단에 걸린 시계에 서려 있다. 시침과 분침은 정확히 1958년 2월 6일 10시 40분을 가리킨다. 당시 맨유 선수들은 유러피언컵 준결승 진출을 확정하고 조국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시계 뒤편 남쪽 스탠드 방향으로는 뮌헨 터널이 나 있다.
왼편에는 커다란 나이키 로고가 수백여 개 좌석에 걸쳐 수놓여졌다. 이어 인상 푸근한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됐다. 경기장 이쪽저쪽을 가리키며 구장 시설 및 스탠드 유래 등에 대해 설명했다. 간단히 경기장 내부를 살핀 후 다시 계단을 내려가 다른 쪽 스탠드로 이동했다. 사이사이에 베팅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토튼햄전 배당률이 눈에 띄었다. 로빈 반 페르시가 1:3으로 선제골 배당률이 가장 높았다. 가장 낮은 이는 마이클 캐릭으로 1:20이었다.
이동 중에도 베이지와 브라운이 은근한 조화를 이루는 벽돌에 자꾸 눈길이 갔다. 보통 지하는 콘크리트 벽면으로 방치하기 쉬운데, 맨유는 하나하나 예쁜 벽돌을 박아 놓는 세심함을 발휘했다.
동선의 거의 모든 벽면엔 클럽 홍보물이 붙어 있다. 구장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박물관인 셈이다. 그라운드 전경을 살핀 후 프레스 라운지로 향했다. 기자실은 아담했다. 단체로 움직이는 탓에 속속들이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10개 조금 넘는 자리에 랜선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인터뷰실은 고급스러웠다. 나무로 된 벽면과 계단식 바닥은 마치 대학 강의실을 연상케 했다. 공식 인터뷰 석상 쪽으로 경사가 쏠려 있어 주목도가 높았다. 선수 라커룸으로 가는 길 한쪽 벽면엔 과거 맨유서 뛰었거나 현재 뛰고 있는 선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박지성의 이름도 기타 국가(Other nation) 목록에 자랑스럽게 새겨져 있다.
가장 인기가 많은 홈 로커룸에 들어서자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급 우드 소재의 벽면에 선수들 유니폼이 차례대로 걸려 있었다. 루니 자리는 인기 만점이었다. 맞은편 벽면엔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이 작전을 지시할 때 쓰는 보드와 한국산 TV가 걸려 있다. 선수들이 하프타임 후 시원한 음료수를 마실 수 있게 소형 냉장고도 비치돼 있다.
마지막 코스는 선수 입장식 체험이다. 양 팀 선수들이 나란히 도열해 아이들과 손을 잡고 나오는 통로다. 녹음된 관중의 함성 소리를 틀어 놔 진짜 선수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TV서 보던 붉은색 주름 터널을 실제로 걸어 나오니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감독석에 앉으니 퍼거슨의 엉덩이 온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후보 선수들을 위한 자리도 함께 마련돼 있는데, 벽돌이 층층이 쌓여져 마치 벙커 같다.
경기장 투어가 끝나면 메가 스토어를 둘러볼 수 있다.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다. 맨유 메가 스토어는 맨체스터 시티와 첼시의 메가 스토어와 달리 단층이다. 대신 연면적이 넓다. 액세서리부터 차량용 방향제까지 사람이 쓰는 거의 모든 것이 상품화돼 있다.
올드 트래포드엔 과거와 현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초록 잔디 위로 빛나는 붉은 파도에 심장이 벌렁거린다. 역사의 상흔을 담은 뮌헨 시계를 보면 절로 숙연해진다. 구단의 희로애락을 빠짐없이 새기고 복기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명문의 향기를 맡았다. 인생에 초연한 젠틀한 노신사, 바로 올드 트래포드의 얼굴이다.
글, 사진=임기환 기자(lkh3234@soccerbest1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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