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다문화 공존의 미학을 느끼며, 텍사스거리를 걷다
[헤럴드경제=윤정희(부산) 기자] 왕복 8차선, 부산역 앞을 가르는 도로가엔 저마다 일상의 분주함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대로변을 벗어나 좁은길로 몇걸음 들어서면 거짓말처럼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한때 부산의 이태원으로 불리던 초량동 텍사스거리. 이국적 내음이 물씬 풍기는 텍사스거리와 마주하면 잠시 당황스런 마음이 앞선다.
국내 최대 항구도시 부산은 언제나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이다. 텍사스거리는 구한말 중국영사관을 중심으로 청관거리로 조성됐지만 청일전쟁 이후엔 일본상인들이 이곳을 지배했다.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하고 이땅에 들어온 주한미군들의 해방구가 된 곳도 텍사스거리였다. 80년대 이후 주한 미군의 숫자가 급속히 줄어들면서 한때 이곳도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러시아와의 수교로 러시아 선원들이 대거 부산을 찾으면서 이곳은 러시아거리로 변모했다.
2013년의 텍사스거리는 어떤 모습일까? 5m 남짓 좁은 폭의 골목길을 따라 직선거리 300여m 좌우에는 이국적 풍경의 상점과 환전소, 주점들이 늘어서 있다. 동북쪽 끝 텍사스거리 입구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자 처음에는 알 수 없는 내용의 러시아어로 표기된 간판들이 줄줄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쯤부터는 러시아어로 된 간판 외에도 영어로된 간판들이 겹쳤다. 곧이어 나타난 붉은색 아치형 문에는 차이나 타운이라는 선명한 글귀가 쓰여있고, 이후로는 대부분의 간판은 붉은색 바탕에 중국어로 쓰여 있다.

텍사스거리는 중간지점을 두고 남서쪽으로는 대만과 중국 사람들이, 북동쪽에는 러시아와 우즈벡, 카자흐스탄 사람들로 양분돼 있다. 이곳 상점들의 주인은 러시아 사할린에서 온 고려인들과 중국에서 온 화교들이 대부분이다.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한국어 구사도 능숙한 사람들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곳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미군의 대형 군함이 들어오거나 러시아 상선들이 많이 들어온 날에는 텍사스거리가 과거의 모습을 되찾는다. 다시 이어질 선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사기위해서, 고향이 보고싶은 마음에 때로는 술 한 잔 기울이기 위해서 선원들은 이곳을 찾는다. 또 해마다 6월초엔 차이나타운 축제가 개최돼 거리를 가득 메운다. 온통 붉은색으로 치장하고 폭죽으로 화려함을 더한 텍사스거리는 마치 중국 거리를 옮겨 놓은 것으로 착각될 정도다.
해거름 무렵 거리 곳곳에는 지나가는 손님을 부르는 소리가 높아진다. 이국땅에서 낯선 밤을 지내야하는 외국인 여행자 뿐만 아니라 타국 생활의 기억을 되살리고픈 내국인들도 호객의 대상이다. 다양한 국적과 문화가 어우러져 텍사스의 밤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곳 텍사스거리에서 40여년 동안 식당을 운영해온 강순자(70) 할머니. 그의 일상도 이곳 텍사스의 또다른 풍경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식사와 안줏거리를 만들어 팔아왔다.

"40년동안 변한게 하나도 없다아이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만 쪼매 달라졌제. 언제나 여기는 딴나라 사람들 거리다아이가"
저녁 장사를 준비하던 강 할머니는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시절을 좇아 찾아오는 손님들의 국적은 달라졌지만 서로의 문화와 관습이 어울려 텍사스거리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저녁무렵 아이들 둘을 데리고 텍사스거리에 나타난 타티야나(29ㆍ러시아)는 단골 러시아식당을 찾았다. 조선업체에 다니는 남편의 퇴근시간에 맞춰 외식을 즐기기 위해서다. 부산에 정착한지 6개월 남짓. 아직은 모든게 낮설지만 이곳 텍사스거리는 타향생활의 향수를 달랠 수 있는 고마운 공간이라며 웃어보였다.
cgn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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