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단 모르면 "학원서 안 배웠어?" 묻는 초등학교

심현정 기자 2013. 6. 11.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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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교육연구원 조사.. 입학 첫주에 "왜 한글도 몰라 " 학부모에 학원·학습지 권유

서울 강남에 사는 학부모 A씨는 최근 초등학교 1학년 자녀의 담임교사를 만나고 고민에 빠졌다. 교사가 A씨에게 "아이가 한글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 입학해 지도하기 어려우니 학습지를 시키든가, 학원에 보내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라"고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자녀와 해외에서 살다 온 A씨는 "입학 첫 주부터 알림장을 쓰게 시키는데, 우리 애는 한글을 쓸 줄 몰라 헤매는 걸 보고 담임이 나를 부른 것"이라며 "한글을 읽는 정도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다른 아이들을 보니 국어·수학 학습지 하나씩은 하고 있더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는 선행 학습을 금지하는 법까지 만들겠다지만, 취학 전부터 사교육에 노출된 우리나라 아이들은 이미 초등학교 입학 시점부터 선행 학습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 바람에 교사들이 학부모에게 학원에 다녀서라도 또래보다 뒤처진 진도를 보충해 오라고 권유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취학 전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은 물론 덧셈·뺄셈·곱셈·나눗셈 등 사칙연산을 이미 다 익힌 상태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생긴 현상이다.

경기도교육청 산하 경기교육연구원이 지난 3~4월 경기 지역 교원 1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초등학교 문화와 관행으로 인한 문제점 및 개선방안'에 따르면,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초등학교 저학년이 구구단도 모른다"면서 학부모한테 전화를 걸어 "공부 좀 시켜라. (자녀의) 지적 수준이 의심되니 학교로 상담받으러 오라"고 말했다.

입학 전 아이들이 당연히 선행 학습을 했을 것으로 가정하고 진도를 앞서가거나, 배우지 않은 범위의 숙제를 내기도 한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는 교과과정상 한 자릿수 덧셈·뺄셈을 배워야 하는 1학년생들에게 두 자릿수 계산을 가르치고, 교사가 특정 학습지를 정해 모든 학생에게 주말 동안 20~30페이지씩 풀어오라는 숙제를 내기도 했다. 선행 학습을 하지 않은 학생은 부모가 대신 문제를 풀어서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학부모들은 이같이 사교육을 권하는 학교에 적잖이 당황한다. 초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B씨는 "배우지 않은 범위의 문제를 숙제로 내주길래 '우리 아이는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더니 그 교사는 학원 보내지 않는 나를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더라"고 말했다.

교사들도 할 말은 있다. 지난해 1학년 담임을 맡았다는 서울의 한 초등교사 C씨는 "반 전체 학생 25명 중 2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학생이 전부 한글을 읽고 쓸 줄 알아서 오히려 한글 모르는 두 학생을 배려해 진도를 늦추는 게 반 학습 분위기를 더 흐리더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1학년 교육과정에 '한글 익히기'가 있지만, 입학할 때 대부분 아이가 한글을 깨치고 들어오기 때문에 교사들도 수업을 어찌 진행해야 할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교사 D씨는 "학년부장 등 보직을 맡은 경우 업무가 많아 학업이 부진한 학생들까지 일일이 챙기기가 어렵다"며 "이런 경우 가격이 싼 학습지를 권유하기도 한다"고 털어놓았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승훈 간사는 "한글·수학·한자·영어 등은 유치원 교육과정에 포함돼 있지 않지만 거의 모든 유치원이 이를 가르치고 있어 초등학교 저학년의 선행 학습 문제가 제기된 것은 오래된 일"이라면서도 "그렇다 해도 교사가 나서서 사교육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경기도교육연구원 관계자는 "유치원에서 한글과 수학을 배워오는 학생이 평균 60~70%에 이르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당 교육과정을 건너뛰는 것은 선행 학습 없이 입학한 저학년 학생들을 학교 부적응 학생으로 만드는 비교육적인 처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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