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수 시절 71] 김호, 60년대 아시아를 호령한 수비수

지금은 감독으로 더 익숙한 김호(68)는 60년대의 명수비수였다. 수비수는 막연히 수비만 전담하던 시대였지만, 그의 지능적인 플레이는 공격에도 영향을 끼쳤다. 시대를 앞서간 멀티 플레이어. 특히 김정남(현 프로연맹 부회장)과의 호흡은 '아시아 최고의 수비 듀오'로 명성이 자자했다.

통영에서 축구를 시작해 부산 동래고를 거쳐 성인축구에 뛰어든 그는 제일모직, 해병대, 양지, 상업은행, 포항제철을 거치며 파란만장한 선수 생활을 했다. 국가대표팀에는 1965년부터 73년까지 8년간 활약했으며, 이 기간 동안 메르데카컵 4회 우승 등 수 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은퇴 이후에는 동래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한일은행, 울산 현대, 수원 삼성, 대전 시티즌의 사령탑을 지냈다. 1994년에는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미국 월드컵에 출전해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현재는 모교인 통영중학교에서 후배 양성에 여생을 보내고 있다.

고향인 통영에서 유망주 양성에 매진하고 있는 김호 전감독ⓒ손춘근

부유했던 유년기, 라디오 들으며 꿈 키워

그의 고향은 아름다운 절경이 펼쳐진 통영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두룡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에 소질을 보여 달리기 선수로 활약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운동은 단연 축구였다.

 "축구에 소질이 있었지요. 축구를 하면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달리기도 잘 했습니다. 형들이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축구를 시켰어요. 형들이 윗 동네랑 시합을 하면 저도 같이 했지요."

"그때는 레프트윙, 레프트 인사이드, 센터포워드, 라이트 인사이드, 라이트윙 같은 포지션이 있었어요. 5학년때는 레프트윙, 6학년때는 레프트 인사이드, 중학교 때는 라이트 인사이드를 봤지요. 빵 내기를 많이 했습니다."

"나는 해방 전에 태어나서 학생수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다 전쟁터에 가서 사람이 없었지요. 5학년 때는 선배들하고 같이 운동을 했는데 통영시 국민학교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합니다. 6학년 때는 내가 주장을 맡아서 또 우승을 했고, 내 밑에 후배들이 우승을 했어요. 3연패를 하면 우승기를 줬는데, 그 우승기가 아직도 학교에 있습니다.(웃음)"

상당히 개화됐던 부모님 덕에 김호는 집안의 반대 없이 운동을 시작했다. 부모님께서 아들의 자질을 일찌감치 알아보셨던 것. 자연스럽게 운동을 시작한 김호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당시에는 자유중국(대만)이 축구를 잘했어요.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결승에 올랐는데 자유중국에 2-3으로 지는 거예요. 그때 라디오로 중계를 들으면서 축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요."

65년 메르데카배에 참가했을 당시의 김호(아랫줄 가장 왼쪽) ⓒ한국축구백년사

인생의 스승님을 만난 동래고 시절

이후 통영중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통영중에는 축구부가 있었는데 감독이 없어 체육 선생님께 배워야 했다. 더 큰 문제는 고등학교였다. 당시 통영고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었던 것. 김호는 잠시 축구를 그만둔다.

"축구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기로에 섰는데 가정 환경이 안 좋아지면서 축구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러자 주변에서 내 재능이 아까우니까 자꾸 추천을 해요. 가까운 진주를 왔다 갔다 하면서 축구를 했는데, 1년을 쉬다 하니까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선배들이 재능을 썩히지 말라며 부산 동래고등학교를 추천해줬어요. 거기서 안종수 선생님을 만나게 된 거지. 지금 KFA 전무이사인 안기현 씨의 아버님인데, 그 분을 만나면서 내 인생이 바뀌었지. '축구를 이렇게 해야 되는구나'라고 많이 느꼈어요."

故 안종수 선생은 동래고 출신 축구선수로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했던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1961년 동래고 감독을 맡아 후배를 양성했으며 이후 제일모직 사령탑을 맡으며 한국 축구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1912년에 창단한 동래고 축구부의 전성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故 안종수 감독이 기틀을 마련하고 김호가 3학년이 되는 해에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지방 팀이 서울 팀을 이기는 것이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동래고가 반란을 일으켰다.

"(동래고 전성기가) 우리 때부터 시작됐지. 이전에는 지방 팀이 서울 팀을 이겨본 적이 없는데, 내가 있을 때 처음으로 동북고를 2-0으로 깼어요. 그때 내가 센터포워드를 봤지. 그때부터 지방 팀이 좋아지는 변화가 왔지요. 그 이후로 동래고가 전국대회를 8년 동안 휩쓸지요."

동래고는 1965년 4관왕을 비롯해, 1967년에는 전대미문의 8관왕 기록을 작성했다. 김호는 지금도 故 안종수 선생의 산소를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그 분이 존경스럽고 우리들을 정말 잘 키워주셨지요. 평생 그 분을 잊지 못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김호 전 감독 ⓒ손춘근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실업무대로..

故 안종수 감독은 1963년 제일모직 사령탑으로 옮긴다. 이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호 역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제일모직에 입단했다.

"대학에 가서 축구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승님을 따라갔지요. 직장팀을 선택해서 가족도 살려야 했습니다. 그때도 연, 고대를 안 나오면 절대 성공을 못한다고 했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절대 따라야지요."

당시 제일모직에는 당대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갓 성인무대에 데뷔한 신인은 전혀 주눅들지 않고 기회를 잡는다. 김호는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故 조윤옥 씨는 당대 최고의 선수였지요. 그 분이 제일모직에 있었는데 나 하는 걸 보고 큰 선수가 있다고 했어요. 나는 몰랐는데 대표 선수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테스트 했다고 들었어요. 청소년 대표팀은 무조건 된다고 했는데, 왜 떨어진 건지 모르겠어요."

김호는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된 기록이 없다. 실제로 선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청소년대표팀을 건너 뛰고 곧바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된다.

"그때 제일모직이 상당히 강했어요. (임)영국이 형님이 나랑 같은 방을 썼는데, 시합 전에 무릎을 다치게 돼요. 그래서 내가 베스트로 나갔는데, 첫 골을 잡습니다. 그때는 센터포드도 보고 수비도 보고 그랬어요. 내가 골을 넣은 것이 계기가 돼서 그 대회를 우승한 거지. 그래서 내가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제일모직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고, 훈련할 때 선배들한테 배우는 과정을 겪으면서 청소년대표팀이 안되고 바로 대표 선수가 됐지요."

1972년 한일전을 앞둔 양팀 (김호는 상단 오른쪽에서 두 번째) ⓒ한국축구백년사

지능적인 수비로 아시아 최고 수비수 등극

성인무대에 발을 들인 김호는 이듬해인 1965년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된다. 여기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는데 당시 故 안종수 선생은 '보따리 들고 다닐거면 대표선수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후보 선수를 할 바에 대표팀에 가지 말라는 뜻이다. 이에 김호는 세 번이나 대표팀 합류를 고사했다.

"'김종필배 축구대회'가 있었어요. 국내에서 열린 대회였는데 일본과의 경기에 뛰었던 게 데뷔전이지요."

"'메르데카배'가 제일 큰 대회였고, 그 다음에 올림픽이나 월드컵이었지요. 그때는 이스라엘과 호주, 터키 같은 팀이 잘 했어요. 동아시아는 많이 못했는데, 우리 때부터 강해지기 시작한 거지요."

이 무렵 '아시아 최고의 수비 듀오'도 결성된다. 김정남과의 만남이다. 대표팀에서 만난 두 선수는 해병대, 양지 등에서 함께 생활하며 아시아를 호령하는 수비수로 발전했다.

"(김)정남이는 레프트백과 미드필더를 봤고, 나는 라이트백을 봤어요. 처음에는 김정석 씨가 최고의 센터 수비수였지요. 그때는 4-2-4 전술을 썼는데, 브라질이 월드컵 우승을 하니까 그걸 받아들여서 쓴 거지요."

"정남이와 내가 부동의 대표선수로 중앙수비수가 된 것은 양지가 형성되면서부터예요. 故 김용식 감독님이 이탈리아의 리베로 시스템을 했는데, 그때 스위퍼(김정남)와 스토퍼(김호)가 있었지요. 둘이 숨 소리만 들어도 느끼는 정도의 수비를 한 것 같아요."

"나도 정남이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헤딩 미스해서 빼주고, 공을 뒤로 뺏다가 다시 가기도 하고..수비수로서 둘 다 공격력이 있었지. 그때는 수비수가 킥만 많이 했지 우리처럼 다양한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어요. 지금도 축구를 해보면 정남이와 잘 맞는 것 같아요."

1967년 양지 축구단(당시 김호는 잠시 전역한 상태였다) ⓒ한국축구백년사

105일간의 유럽 원정, 현대 축구의 기반이 된 양지 축구단

당시의 축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팀이 양지 축구단이다. 북한이 1966년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자 이에 자극 받은 정부가 67년 1월 창단시킨 축구팀이다. 군인 팀인 양지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모두 모인 사실상 대표팀이었다.

"나는 65년에 해병대를 갔어요. 해병대에서 전국체전 우승시키면서 대표팀 친구들한테 해병대로 오라고 해서 친구들이 다 왔지요.(웃음)"

"양지는 해병대에서 파견을 간 거지요. 故 최정민 감독님이 계셨는데 해병대 선수가 9명입니다. 1969년에는 양지에서 처음으로 유럽 원정을 갑니다. 105일 동안 26게임을 하게 돼요. 처음으로 세계 축구의 눈을 뜨게 됐지요. 70년도에는 남미를 갔고요."

"나는 군대를 제대했는데, 영장을 다시 받는 식으로 갔어요. 내가 양지에서 1호로 제대를 했는데, 규정에 보면 국가가 세 번까지 부를 수 있는 것 같아요. 나이를 불문하고 필요한 선수를 차출할 수 있었지요."

"양지가 대표팀의 주축이었고, 선수를 육성해서 한국 축구의 발전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됐지. 축구 발전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지금은 군 팀이 한 팀 밖에 없는데, 육해공 3군이 하나씩 축구팀을 운영해야 축구가 발전한다고 봐요."

양지 축구단은 1971년 해체되기까지 국가대표팀의 자양분 역할을 했다. 대표팀은 메르데카컵에서 최강팀으로 군림했고, 킹스컵 3연패에 1972년에는 아시안컵 준우승을 차지했다. 병역 문제를 해결한 젊은 선수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아시아 최강의 자리에 올라섰다.

서독월드컵 아시아예선을 준비할 1973년 당시의 대표팀(아랫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호) ⓒ한국축구백년사

선수 생활 염증 느껴 은퇴..지도자로 새출발

 김호는 금융 축구단이 생기는 1970년 상업은행으로 둥지를 옮긴다. 제일모직에서 일어난 내분에 휘말리기 싫어 일찌감치 팀을 옮겼다.

"금융 축구단이 생겼을 때 6차 리그를 하는데, 우리가 네 번을 우승했지요. 그때 신탁, 외환은행에는 대표 선수가 7~8명씩 있었어요. 상업은행에는 나와 김삼락 씨가 은퇴 무렵에 있었지만 그런 멤버로 우승 많이 했어요."

이 무렵 김호는 은퇴를 계획하고 있었다. 축구 선수에게 있었던 홀대와 막막한 미래에 염증을 느낀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당시 축구협회장이던 장덕진 씨의 만류로 은퇴가 미뤄지며 은행일을 배우려는 계획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는 포항제철로 이적해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966년도에 경기를 하는데 당시 아시아 올스타에도 뽑혔던 선수가 내 다리를 부러뜨렸어요. 부서진 뼈 조각을 제거하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신경을 건드려서 디딜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1973년에 수술을 하고 은퇴를 한 거지요."

포항제철에서 현역을 마친 김호는 한홍기 감독의 권유로 모교인 동래고등학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아마르(말레이시아)한테 한 골 먹고 진 경기가 가장 생각납니다. 일방적인 경기였는데, 말레이시아는 초토화될 정도로 맞으면서도 살아있는 게임이었어요. 그때 워커힐 호텔에서 한달 동안 열심히 훈련했는데 0-1로 져서 올림픽 예선에서 탈락했지요. 아직도 그쪽만 보면 늘 가슴이 아픕니다."

"(선수 시절을 돌아본다면?) 축구를 정말 사랑하고 축구가 더 발전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가졌지요. 대표선수나 지도자 할 때도 생활은 어려웠지만, 꿈을 향해 나아갔어요. 지금도 다시 태어난다면 축구를 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글=손춘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