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 기자의 빅 페이스] K리그 2부팀 만든 변석화 험멜코리아 회장.. 코흘리개 모임서 프로팀까지 축구사랑 40년

이영민 기자 2013. 4. 2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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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축구서 K리그까지.. 월계동 축구의 전설

1974년 봄날이었다. 서울 월계동 한 골목에 동네 남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인근 국민학교(초등학교), 중학교 축구부에 소속된 몇몇과 "동네에서 공 좀 찬다"는 아이들이었다. 모임 속에서 누군가 제안을 하나 했다.

"우리 같이 모여서 축구 하자. 일요일 같은 때 놀러다니며 술이나 담배 배우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성공할 때까지 서로 감시도 하고 지켜주기도 하는 거지."

그때부터 월계동의 축구 좋아하는 아이 20여명이 매일 아침 동네 공터나 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한 시간가량 삼삼오오 나름의 훈련을 하고 학교로 갔다. 수업이 없는 일요일에는 동네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과 시합을 했다. 어떤 아이는 왼쪽 가슴에 사인펜으로 태극기를 그려넣었다. "언젠가는 국가대표가 될 거야!" 흙먼지 풀풀 이는 맨땅을 달린 아이들은 땀범벅이 된 셔츠를 입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축구 모임에 '월계축구회'라는 이름이 붙었다. 누가 언제 낸 아이디어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는 없다.

지난 3월 개막한 한국 프로축구(K리그) 2부 리그 소속팀 충주 험멜은 월계동 공터에서 공을 차던, 이 '사커 키드'들의 꿈으로 시작됐다. 지난 2일 만난 변석화(51) 험멜코리아 회장(충주 험멜 구단주)은 "이 모임이 만들어졌을 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또래 축구팀이 없어서 대학생 형이나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과 시합을 했다. 당돌하게 덤볐고 당당하게 깨졌다"고 말했다.

동네 축구: "져도 좋아. 우리와 경기만 해줘요."

변 회장은 말했다. "그래도 즐겁기만 했어요. 열심히 연습한 게 조금씩 효과를 발휘할 때의 짜릿함도 있었고 축구를 통해서 다양한 사람과 인연을 쌓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기는 것도 중요했지만 최대한 많은 팀과 경기하고 싶었죠."

아이들은 빠르게 자랐다. 코 흘리던 초등학생들은 어느새 고등학생이, 중학생들은 성인이 됐다. 약 5년 사이, 20여명으로 시작된 초기 멤버 중 2~3명이 이사를 하며 팀을 떠났다. 그래도 월계축구회는 끄떡없었다. 월계동 인근에 사는 새 회원들이 빈자리를 채우며 연습 경기를 할 때마다 꾸준히 30명 넘는 회원이 모였다.

팀의 몸집도 커졌다. 대학생·아저씨 팀들과 붙어 이기는 횟수도 조금씩 늘어갔다. '열심히 하는 내공 있는 팀'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인근 고등학교 소속 축구 선수들도 월계축구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선수이자 코치'로 뛰며 훈련을 주도했다. 변 회장은 "아무리 그래도 월계축구회의 핵심 기술은 오랜 세월 발을 맞추며 쌓아온 '전설의 패스 실력'이었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조직력을 배운답시고 옥상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상대팀도 있었다니까, 하하."

조기 축구: 고등학생 하석주, 한 수 배우러 오다

1980년대 중반, 창단 회원 대부분은 성인이 됐다. 일요일마다 광운전자공고 등 인근 학교 운동장에 모여 게임을 하는 정식 '조기 축구회'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매달 1만원 정도 회비를 걷어 인근 중·고교의 형편이 어려운 축구 선수를 돕기도 했다.

그 무렵 월계축구회는 '아마추어 축구 세계'에서 차곡차곡 명성을 쌓아갔다. 변 회장은 빛바랜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일렬로 선 선수들 앞 현수막엔 '1986년 양지축구클럽 주최 직장축구대회 우승', '1987년 새마을화천조기청년회 주최 축구대회 우승'이라고 쓰여 있었다.

월계축구회는 성적도 성적이지만 시합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나타나는 '홍길동 같은 팀'으로 더 유명했다. 포항이든 울산이든, 가리지 않고 출몰했다. 변 회장은 "당시 대부분 회원은 별도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를 쓰고 전국 대회를 다니는 우리를 보고 '축구를 교주로 모시는 종교 집단'이라며 다른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이 혀를 내둘렀다"고 했다.

월계축구회의 패기와 열정이 축구 동호인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월계동 부근에 사는 실력 좋은 선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표적인 선수가 '왼발의 달인'으로 이후 국가대표 축구 선수가 된 하석주(현 전남 드래곤즈 감독)였다. 하 감독은 월계동에 살며 광운전자공고를 다니던 1984년 월계축구회에 가입했다. 그는 "당시 월계축구회는 동네에서 준(準)실업팀급 실력을 갖췄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축구 하는 선배를 따라 고등학교 때 주말에 몸도 풀 겸 월계축구회에 들어가고 나서 프로 입단(1990년) 때까지 때때로 경기도 뛰었다"고 했다."

하석주 감독 외에 안종관 전 여자축구대표팀 감독, '박지성의 스승' 이학종 수원공고 감독 등도 월계동과 가까운 대학에 다닐 때 월계축구회를 거쳐 갔다. 안 감독은 광운대, 이 감독은 고려대에서 축구 선수로 뛸 때 월계축구회에서 운동을 했다.

월계스포츠: 서른두 살 변석화 '월계스포츠'를 열다

월계축구회가 만들어진 지 꼭 20년이 지난 1994년 3월. 중소기업에서 일하던 변석화 회장은 회사를 그만뒀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축구인의 꿈'을 월계축구회와 함께 더 키워가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매주 일요일 월계축구회에서 축구를 하는 것으로 모자라 아예 축구 관련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가족은 물론 친구들도 "왜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느냐"며 말렸다.

"제가 월계축구회 살림꾼이었거든요. 하하. 축구 선수는 못 됐지만 유니폼 맞추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어요. 사업도 하고 돈도 벌고 축구와도 가까워지고 싶어서 동대문운동장 옆에 한평 반(약 5㎡)짜리 스포츠용품점을 냈죠. 이름요? 물으면 뭐해, 당연히 '월계스포츠'지."

변 회장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모아둔 3000만원이 밑천이었다. 변석화 회장은 학교 축구부나 동호회를 직접 찾아다니며 운동복과 축구공을 팔았다. 1998년, 덴마크에 본사를 둔 스포츠의류 브랜드 '험멜'을 한국으로 들여오는 독점 계약을 맺으면서 회사 이름은 월계스포츠에서 험멜코리아로 바뀐다. 변 회장은 "당시 월계축구회는 여전히 쌩쌩한 조기 축구팀이었고, 월계동 일대 학교에서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모여 축구를 했다. 20대 젊은 선수들도 계속 들어왔다"고 말했다.

외환 위기: "갈 곳 없는 축구 선수, 험멜로 모여라"

1998년 외환 위기가 전국을 강타했다. 기업들은 운동팀을 '구조조정 1순위'에 올렸다. 국민은행·한일은행·기업은행 같은 실업 축구팀이 2~3년 사이 해체됐다.

"어느 날 식당에 갔는데, 아는 얼굴이 서빙을 하는 거예요. 월계축구회랑 경기했던 실업축구팀 소속 선수였던 걸로 기억해요. '너 왜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 '팀이 없어졌어요'라고 하더라고요. 축구 하다 실업자 된 애 중에 동대문에서 배달하는 애들도 몇 있었죠. 월계축구회 회원 중에도 실업자가 된 선수가 몇몇 있었어요."

변 회장은 우선 실직한 축구 선수나 월계축구회에 소속된 선수들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이들은 유통을 담당하거나 재고관리도 하면서 회사원으로 일했다. 이듬해 봄. 사무실에서 축구선수 출신 직원들과 자장면을 시켜 먹던 변 회장은 직원들이 밥은 안 먹고 TV에서 하는 축구 중계만 보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나라 프로 축구 경기였어요. 자장면은 퉁퉁 붇는데…. 밥보다 축구가 좋았던 거죠. 나도 그랬으니까, 맘을 알 것 같았죠."

며칠 뒤 변 회장은 축구 선수 출신 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렀다.

"일도 하고 축구도 하는 실업팀을 만들면 같이 할 생각 있나?" 선수들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축구만 계속 할 수 있으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실업 축구: "조기 축구회 출신이 웬 실업팀?"

1999년 12월 실업 축구팀 험멜코리아가 태어났다. 월계축구회 소속으로 험멜코리아에서 유통과 재고관리를 하던 9명이 주축이 됐다. 공개 테스트를 거쳐 11명을 추가로 뽑았다. 실력이 같다면 '가급적 형편이 어려운 선수를 우선으로 뽑는다'를 원칙으로 삼았다.

"월계축구회에서 회비 모아 어려운 축구 선수들 도와줬던 생각이 났어요. 외환 위기 때문에 축구의 꿈을 접었던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만든 팀이기도 해서, 그런 원칙을 세웠죠."

골수암으로 쓰러진 홀어머니를 돌보려 대학 때 축구를 접은 센터포워드, 실업팀에서 뛰다 무릎 연골을 다쳐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날개 공격수, 형편이 어려워 운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축구부 보조 코치를 하던 수비수 등이 '험멜' 유니폼을 입고 월계축구회 출신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이들 역시 낮에는 '회사원'으로 일했다.

생업과 축구를 병행해야 했던 선수들은 매일 오전 5시 30분에 회사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새벽 운동을 하고 나서 재고 창고와 영업점으로 출근했다. 변 회장은 "더 축구를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선수들이라서 다들 피곤한 기색도 없었다"며 "오후 시합이 있는 날도 오전 근무를 하고 경기장으로 갔다"고 했다.

대회에 처음 나간 2000년. 험멜은 대통령배 축구대회에 나가서 8강에 올랐다. 변 회장은 "'조기 축구회 출신들이 웬 실업팀' '한물간 애들 모아 놓은 팀'이라던 말이 쏙 들어갔다. 더 신이 나서 열심히 했다"라고 했다.

험멜은 2003년부터 시작된 실업 리그에선 대부분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연고지도 못 구해 경기도 의정부에서 경기도 이천, 서울 노원구를 거쳐 충북 충주로 3차례나 둥지를 옮겨야 했다. 변 회장은 "축구 하는 목적이 꼭 우승만은 아니다"라며 "월계축구회에서 싹터 자란, 축구에 대한 열정을 꺼트리지 않고 이어가는 게 더 중요했다"고 했다. 저조한 성적과 상관없이 험멜은 13년간 꾸준히 실업팀으로 남았다. 월계축구회 소속으로, 실업팀 창단 선수로 뛰었던 이들은 그 사이 현역 선수에선 은퇴하고 험멜코리아의 '배 나온 과장님'이 됐다.

실업팀 험멜이 생기고 월계축구회에 속한 전문 선수들이 실업팀에 합류했다. 하지만 월계축구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초기 멤버와 현역을 은퇴한 선수들은 'OB 월계축구회'로 형식으로, 꾸준히 조기 축구회 활동을 했다.

프로 축구: 2부 리그 출범…"월계가 나서야지"

변 회장은 지난해 축구계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프로축구연맹에서 2부 리그 창단한다고 팀을 모으는데, 반응이 미지근해서 2부 리그가 출범도 못 하고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 그는 즉각 실업팀 험멜의 임원들을 모았다. 분위기가 사뭇 비장했다.

"임원 여러분. 저는 동네 축구 출신이지만, 40년 동안 축구를 따라다니며 살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처럼 작은 팀이 먼저 나섭시다. 우리가 나서면 다른 팀도 생각을 달리하지 않겠습니까. "

월계동 공터를 누비던 열두 살 '슛돌이' 변석화는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임원들은 변 회장의 미소에서 그가 꿈을 접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난 2월 프로팀 '충주 험멜'이 출발했다. 실업팀 험멜 출신 5명을 포함해 총 33명으로 팀을 구성했다. 월계축구회 출신들은 이제 선수가 아닌 지도자가 되었다. 구단주인 변 회장, 한규정 단장, 이재철 감독 등이 월계축구회 출신이다. 한 단장은 험멜 실업팀 시절부터 단장을 맡아왔다. 이 감독은 프로팀인 수원 블루윙즈에서 뛰다가 2000년 변 회장이 만든 험멜 실업팀으로 옮긴, '월계축구회가 배출한 축구 선수' 출신이다. 충주 험멜의 소속 선수 평균 나이는 24.6세. 프로 축구 1·2부를 합쳐서 가장 어리다. 변 회장은 "이미 검증된 선수보다는 젊은 선수를 뽑아 프로에서 뛰는 맛을 보여주려고 대학 졸업반 위주로 선수를 뽑았다"고 말했다. "어릴 때 대학생 형들에게 덤볐던, 질 줄 알지만 아저씨 축구단에 도전하던 월계축구회의 패기를 이어갔으면 하는 거죠."

충주 험멜은 지난달 24일, 창단 후 두 번째 경기에서 광주FC를 상대로 첫 승리를 거뒀다. 현재 성적은 1승1무2패. 순위는 8개팀 중 6번째다. 변 회장은 "월계축구회는 프로팀과 별도로, 조기 축구회로도 아직 살아 있다"고 했다. 30여명 정도가 아직 활동한다. 작년 마카오에서 열린 국제 동호인 축구 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일요일, 충주 험멜의 홈경기가 열리는 충주에 가면 다른 조기 축구회와 '한판 대결'를 벌이는 월계축구회 선수들을 만날 수 있다. 팀 이름은 그대로인데, 선수들은 40년 전보다 몸이 좀 굼뜨다. 다람쥐처럼 뛰어놀던 꼬맹이 축구단 선수들이 반백(半白)의 '어르신 축구단'이 된 것이다. 이들은 오전 경기를 마치고 축구 경기장으로 몰려가 충주 험멜을 목 터지게 응원한다.

"월계축구회나 충주 험멜이나 똑같은 게 하나 있어요. 운동장에서 가장 멋진 모습은 골을 넣고 환호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는 믿음이죠. 동네축구, 조기 축구, 실업에서 프로 축구까지…. 우리는 참 많이도 졌어요. 그래도 실망한 적 없어요. 대충 뛰고 이기는 날보다, 최선을 다하고 지는 경기가 우리는 훨씬 더 좋거든요."

18일 충북 충주 탄금대 축구장에서 프로 축구팀'충주 험멜'선수들이 공중에 뜬 공을 헤딩으로 받기위해 뛰어오르고 있다. / 신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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