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재벌총수'.. 어디서 뭘 하나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버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몰락한 재벌 총수는 3년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버틴다. 또 한가지 공통점은 몰락한 재벌총수들은 대부분 고액 세금 체납자로 국세청 '단골손님'이라는 사실이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2225억원 체납),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1073억원), 주수도 제이유개발 전 대표(570억원) 등이 대표적 인물로, 매년 체납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김우중 전 대우회장도 국세청 단골손님이었으나 숨겨 놓은 주식 776만주를 국세청 무한추적팀이 적발, 환수조치 당해 지난해부터 명단에서 빠졌다. < 이코노미세계 > 는 국내 재벌 서열 100위권에 들었으나 IMF 이후 몰락한 재벌 총수들의 근황을 추적했다.
김우중, 김석원, 최원석, 정태수·····등등. 한때 삼척동자도 그 이름을 알던 재벌 총수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IMF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몰락한 총수들은 어디서 뭘하며 지낼까.< 이코노미세계 > 취재 결과 몰락한 재벌 총수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대부분 장수형이라는 것. 둘째, 망했어도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 셋째, '배째라' 형이 많다는 사실이다.
◆전직 총수들의 건강 비결
첫째의 경우는 금새 드러난다. 한때 재계 순위 100위권 내에 들었으나 몰락한 재벌 총수들 중 유명을 달리한 이는 거의 없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1923년생으로 올해 91세이지만 여전히 정정하다. 1936년생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도 78세로 고령에 속하지만 매일 라운딩 할 정도로 건강한 편이다.
올해 82세를 맞은 김선홍 전 기아그룹 회장도 별 아픈데 없이 건강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도 이럴진대 비교적 젊은 축에 드는 김석원(70세) 전 쌍용그룹 회장과 최원석(72세) 전 동아건설 회장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몰락한 총수들은 왜 이렇게 장수형이 많은 것일까. 물론 장수하는 데에는 타고난 건강 체질 덕분도 있겠으나 그만큼 정신적 물질적으로 안정되어 있음을 반증한다. 총수들의 이러한 장수 현상은 최근 들어 고독사하는 노인들이 증가하는 시대적 추세에 반하고,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빚에 쫓겨 자살하는 이가 종종 발생하는 사례에 비춰 봐도 특이한 현상으로 보여진다.
다소 편차는 있지만 몰락한 총수들은 대부분 은둔하며 지낸다. 이는 과거처럼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활동을 하고 싶어도 여러 제약이 따르는데다 그럴 경우 돌아올 불이익을 우려해서다.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조용히 살고 싶은데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사례도 있다. 김석원 전 회장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IMF 후 쌍용그룹이 해체되자 김 전 회장은 미련없이 재계를 떠났다. 그러다 20년이 지난 2007년 신정아 사건이 터지면서 졸지에 검찰에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됐다. 김 전 회장 입장에서는 아닌밤 홍두깨 격으로 그런 날벼락이 없었겠지만 끈 떨어진 전 총수에게 국법은 준엄했다.
김 전 회장은 특별사면 청탁 명목으로 신정아에게 2천만원, 또 다른 명목으로 변양균 정책실장에게 3억원을 제공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으며 자택에 보관 중이던 괴자금 87억원도 몰수당했다. 불구속 기소된 김 전 회장은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으나 정확히 56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나왔다.
김 전 회장이 다시 매스컴을 탄 것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직후였다. 평창올림픽 유치의 숨은 일등공신으로 김 전 회장의 과거 일화가 알려진 것. 김 전 회장은 스키장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최초로 대규모 스키장(용평스키장)을 건설한 장본인이다. 용평스키장을 필두로 국제 규모의 스키장이 여러 개 설립된 점을 감안하면 그 공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싶다.
김 전 회장의 건강은 청년 못지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해병대 출신인 그는 요즘도 체력 단련에 열심이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많이 맞고 자란 그는 여느 재벌 총수들과 달리 엄살은 떨지 않는다. 신정아 사건 여파로 구속됐을 때도 그는 병보석은 신청하지 않았다. 이는 구속된 재벌 총수들이 툭하면 우울증을 호소하며 드러눕는 것과 비교된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몰락한 재벌총수 중 가장 활발하게 외부 활동을 하는 이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초부터 베트남 현지 해외 청년 취업 프로그램인 'YBM(Global Young Businessman for Vietnam)'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명 '김우중 사관학교'로 통하는 'YBM'은 해외 취업과 창업을 꿈꾸는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해준다. 운영 주체는 옛 '대우맨'들의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이지만 김 전 회장의 애정이 각별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우중 전 회장은 한때 한국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그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그는 "세상은 좁고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을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게 만들었다. 실제로 '김우중 신화'가 전해진 후 많은 젊은이들이 회사를 뛰쳐나와 오퍼상으로 세계 곳곳을 누볐다.
대우그룹 몰락 후 김 전 회장은 눈에 띄지 않게 재기를 시도했다. 옛 대우맨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한편 시장에 매물로 나온 대우 계열사들을 눈여겨보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의 한 측근은 "그분의 기업가 정신은 타고난 것이다. 과거처럼 큰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떻게든 재기해 명예를 회복하고 남은 생을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고 싶은 열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 전했다.
김 전 회장의 올해 나이는 78세. 하노이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해 골프장 산책을 즐기고 신문을 열독하는 등 건강한 모습이라는 것. 김 전 회장은 'YBM'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글로벌 시대에 한국이 기댈 곳은 젊은이들 밖에 없다. 앞으로 더 많은 젊은 사람을 해외로 보내, 내가 우리 경제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으면 좋겠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이 한국 경제에 진 빚을 갚으려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줘야 옳지 싶다.
김 전 회장은 2006년 11월 항소심에서 징역 8년 6월과 벌금 1천만원, 추징금 17조 9천253억 원을 선고받고 상고 하지 않아 형이 확정됐었다. 문제는 김 전 회장이 추징금을 내지 않아 검찰이 은닉 재산 추적에 나섰고, 찾아낸 재산 가운데 옛 대우 계열사 차명주식 77만여주를 올해 9월 공매 완료한 것.
김 전 회장은 이에 불복해 지난해 10월 자산관리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유는 자신의 옛 대우 계열사 차명주식 공매대금이 잘못 분배됐다는 것.
김 전 회장은 "형벌로 받은 추징금은 공과금에 해당돼 연체료가 없지만, 국세는 체납하면 돈을 더 내야 하기 때문에 추징금보다 국세에 돈이 우선 배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회장이 공매대금 배분 취소를 청구한 금액은 총 246억 원으로, 서울 반포세무서와 서초구청이 각각 자산관리공사에 분배를 요구했다가 거부당한 양도소득세, 증권거래세 224억원과 지방세 22억원을 합한 금액이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김 전 회장이 차명으로 숨겨놓은 주식은 더 있을 거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하이마트의 경우, 김우중 전 회장의 차명 재산이었으나 선종구 회장이 꿀꺽한 사실이 검찰 수사로 드러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의 하이마트 차명 재산은 국고 환수도 쉽지 않다. 김 전 회장이 "그게 실은 내 돈이다"라고 나서면 간단하지만 당사자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김 전 회장이 내야 하는 추징금은 정확히 17조8509억원이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마땅히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아 망신을 당한 재벌 총수는 또 있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최 전 회장은 IMF 후 회사가 망하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줄곧 세금을 체납하다가 국세청 '무한추적팀'에 의해 숨긴 재산이 들통났다. 최 전 회장이 2011년 자신 소유 미국 골프장 회원권 25만 달러를 아들에게 양도한 사실을 무한추적팀이 알아낸 것.
국세청은 또 최 전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법인 공산학원의 공금 10억원을 빼돌린 정황도 포착해 검찰해 수사 의뢰했다. 여기에다 2년 전 최 전 회장은 "해외로 재산을 빼돌린 일이 없다"며 출국금지처분 취소소송에서 승소한 적이 있어 할 말이 없게 됐다.
최 전 회장의 이혼 소식도 화제가 됐다. 최 전 회장은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배우 김혜정이었다. 육체파 배우와 재벌 총수와의 결합이 반드시 부적절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듯 둘은 한동안 알콩달콩 잘 살았다.
첫 부인과 헤어진 최 전 회장은 1976년 가수 배인순과 재혼했다. 이혼 사유에 대해 김혜정은 "말 못할 사연이 있었다"는 말만 남기고 전 남편을 깨끗이 보내줬다. 두 번째 결혼생활은 20년으로 오래 가긴 갔으나 미스코리아 출신 글래머 아나운서가 등장하면서 파국이 났다. 세 번째 부인 장은영과는 12년간 이어지다가 2010년 합의 이혼하면서 최 전 회장은 '독거 노인' 신세가 됐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으나 연락이 끊긴지 오래고 현재 그가 만나는 유일한 가족은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정도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몰락한 재벌총수 가운데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은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다. 올해 91세인 정 전 회장은 법정에 선 횟수나 각종 비리 혐의로 매스컴에 오르내린 기록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먼저 실형 선고 횟수를 살펴보면, 1997년 '한보 비리' 사태로 징역 15년을 선고받는 등 모두 5차례에 걸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정 전 회장은 15년형의 징역형을 비웃듯 2002년 12월31일 특별사면을 받고 출소한다. 이후 정 전 회장은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는데 이때 가장 골치거리이자 훼방꾼이 국세청이었다.
정 전 회장이 재기 수단으로 삼았던 유일한 밑천은 '땅'이었다. 한보사태로 회사는 부도가 났지만 그가 차명으로 보유한 금싸라기 땅들이 용인, 인천, 안산 등 수도권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던 것. 정 전 회장은 국세청이 차명 보유 사실을 알아채기 전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려 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그 사이 전열을 정비한 국세청은 4000건이 넘는 정 전 회장 관련 부동산 거래를 추적 끝에 마침내 덜미를 잡았다.
대표적인 적발 사례는 서울 송파구 장지동 357 일대 땅으로 시가 1000억원을 호가한다. 정 전 회장은 1999년 서울시에 수용됐던 이 땅을 환매와 동시에 제3자 소유권 이전을 통해 세금 추징을 피할 요량이었다. 정보를 입수한 국세청은 즉각 압류에 들어갔다. 국세청은 이밖에도 정 전 회장이 30년 동안 미등기 상태로 숨겨놓은 180억 원 상당의 부동산도 찾아 등기 촉탁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국세청과 쫓고 쫓기는 싸움을 벌이던 정 전 회장은 2007년 돌연 출국한다. 출국 사유는 신병 치료였으나 교비 횡령 혐의로 재판 중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도피성 출국이었다. 이후에도 정 전 회장에 대한 소식은 매년 끊이지 않는데 주로 횡령 배임에 관한 것이다. 비근한 사례가 정 전 회장의 도피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셋째 며느리 김모 씨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로 김씨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정 전 회장은 9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직 재기를 꿈꾸고 있다.
한보그룹 전 임원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정 전 회장은 건강에 별 문제가 없으며 아들 정보근씨 등 가족을 통해 국내 상황을 면밀히 체크하고 있다는 것. 또 이르쿠츠크 가스전 개발 사업을 위해 지난 96년 설립한 동아시아가스와 보광특수산업 등은 정 전 회장이 믿는 최후의 보루라고 전했다.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
앞서 살펴본 전직 총수들과 달리 '안빈낙도'의 삶을 자처하는 전직 총수도 있다.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 '봉고신화'의 주역이기도 한 김 전 회장은 프라이드, 세피아 등을 잇달아 생산해내며 기아차의 위상을 드높였다. IMF를 계기로 경영 일선을 떠난 그는 이후 15년 동안 철저히 은둔하며 지냈다.
서울 미아리 자택에서 노년을 맞고 있는 그는 어지간해선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 편이다. 기아차 재직 시절 김 전 회장의 측근이었던 한 인사는 "외환 위기로 안타깝게 현장을 떠났지만 김 전 회장은 아직도 국내 몇 안되는 자동차 전문가다. 이 때문에 외부 강연 요청도 들어오지만 일체 응하지 않고 있는 걸로 안다. 이제 바깥 활동을 좀 하셔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잘라 말씀하신다"고 전했다.
김 전 회장은 올해 81세다. 측근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건강한 편이라고 한다.
◆전현직 총수들, '특별사면'의 귀재
몰락한 재벌 총수들의 마지막 공통점은 하나같이 '특별사면의 귀재'라는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전직 총수 외에도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박영일 전 대농그룹 회장, 정몽훈 전 성우전자 회장,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 등 전 현직 재벌그룹 총수 대부분이 특별사면됐다.
국가 경제에 큰 해를 끼치고도 몇 년 못 가 사면복권 되는 현실은 국민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할 뿐 아니라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이들은 무슨 재주로 특별사면을 받았을까.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지낸 박범계 의원은 사면과 관련해 "로비 암시장이 있다"라고 폭로했다. 대통령 특별사면에 비리가 개입되어 있다면 검찰이 수사를 해서 의혹을 풀어야 마땅한데 그런 전례가 없어 이래저래 궁금하기만 하다.
이정규 기자 ikmens@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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