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명함 봐선 모르겠다.. '부장'인지 '사장'인지


필자는 얼마 전 '경영에서의 의사 결정과 숫자의 중요성'을 강의하던 중, 국내 한 방송국에서 방영한 프로그램을 학생들과 함께 보았다. 평균이란 것이 집단의 정보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대표값으로 많이 쓰이고 있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주제와는 관계없이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석유회사 셸(Shell) 전무이사의 연소득이 영국 황실의 필립(Phillip) 공보다 많다'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전무이사의 소득이 그렇게 많을 수 있나요?" "전무의 소득이 그 정도라면 사장은 도대체 얼마를 버는 건가요?" 호기심 많은 학생의 질문이 줄을 이었다. 실상은 번역의 오류가 낳은 해프닝이었다. 우리나라 기업에서는 전무(어떤 회사는 상무)라는 직위의 영어 표기로 흔히 '매니징 디렉터(Managing Direc tor)'를 사용한다. 그러나 영국에서 매니징 디렉터는 사장을 뜻한다. TV 프로그램에서 셸의 전무이사로 표현된 그는 셸의 사장이었다.
◇명함에 적힌 직위 오해해 실수
불현듯 비슷한 문제로 곤욕을 치렀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1980년대 후반, 국제화가 아직 미숙하던 시절이었다. 남유럽의 신규 거래처 두 명이 서울에 왔다. 명함을 보니 나이가 지긋한 사람은 '디렉터(Director)', 상대적으로 어려보이는 사람은 '제너럴 매니저(Gen eral Manager)'였다.
우리 식으로 번역하자면 한 명은 '이사'이고, 다른 한 명은 '부장'이다. 당시 필자가 몸담았던 삼성전자도 이사와 부장 명함에 영어로는 디렉터와 제너럴 매니저라고 표기했다. 외관상으로도 그렇고, 명함 상으로도 그렇고 당연히 디렉터를 더 대우해야 한다고 여겼다. 호텔에서 픽업하면서 그를 승용차의 상석(上席)에 모신 것은 물론이고, 회의를 진행할 때도 모든 신경과 관심을 그에게 쏟았다. 대화나 질문도 그가 주도했으니 우리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저녁 만찬에서도 우리의 주빈(主賓)은 그였고, 모든 대화가 그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너럴 매니저가 슬그머니 자리를 떴고, 디렉터가 황급히 따라나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디렉터로부터 전화가 왔다. 제너럴 매니저의 심기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큰일"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우리로서는 다소 이해 못 할 일이었다. 동료의 기분이 좋지 않아 걱정은 되겠지만, 큰일일 것까지야 있는가.
그런데, 정말 큰일이었다. 알고 보니 제너럴 매니저는 그 회사의 오너 사장이었다. 우리 회사와 달리 그 회사는 사장을 제너럴 매니저라고 칭했던 것이다. 사장이 영어가 불편해 이사인 디렉터가 대화의 창구 역할을 했을 뿐인데, 명함에서부터 단단히 오해한 우리가 큰 실수를 범한 것이다.
회의에서야 자신을 대신한 이사에게 이목이 집중돼도 이해했던 사장은, 만찬에서마저 자신이 관심 밖으로 밀려나자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 그날의 해프닝은 우리가 호텔로 찾아가서 문화에 따른 호칭의 차이를 설명하며 양해를 구한 끝에 겨우 마무리가 됐다.
◇영어식 직위 표기와 이해 중요
필자는 그때의 실수 이후 외국인의 영어 명함을 보고 직위와 역할이 정확히 무엇인지 헷갈리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서 확인한다. 뿐만 아니라 국내 명함의 영어 표기도 관심 있게 보는 습관이 생겼다.
문제는 국내 글로벌 기업들의 명함을 보면 기업에 따라 영어 표기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부장의 경우를 보면 제너럴 매니저(General Manager)라고 쓰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시니어 매니저(Senior Manager)나 디렉터(Di rector)라고 하는 기업도 있다.
이뿐이 아니다. 어느 회사 간부들을 만나 명함을 받았더니 한글 직위는 다 같은데 영어는 제각각이었다. 한 회사의 같은 직급인데도 영어 표기가 다른 것이다. 국제화가 우리 기업의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인데, 아직도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는 우리 기업들이 직위의 영어 표기에 관심이 부족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고로 미국의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인 GE를 보면, 그룹 회장을 'Chair man & CEO'라고 하고, 계열사 사장을 'President & CEO '라고 한다. 또 임원들은 'EVP(Executive Vice President) & CFO(재무 담당 부사장)', 'SVP(Senior Vice President) & CMO(마케팅 담당 임원)'처럼 직위와 직책을 섞어서 표기한다. GE에선 매니징 디렉터라는 타이틀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부장급 일반 관리자들도 제너럴 매니저라고 하지 않고 그냥 리더 또는 매니저라고 한다.
'디테일의 힘'의 저자인 중국의 경영 컨설턴트 왕중추(汪中求)는 '사소해 보이는 세심함이 개인과 기업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100-1=0'이라고 표현하며 1%만 어긋나도 전체 일을 망칠 수 있다고 했다. 글로벌 경영 활동에서 고객과의 효율적인 의사소통은 서로가 누군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의 타이틀을 정확히 이해하고,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줄 수 있는 디테일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연말연시에 국내 회사들이 임원의 승진 발표를 하고 있는데, 직위의 영어 표기 문제를 점검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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