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수시절63] 김봉수, 역대 A매치 골키퍼 최연소 데뷔의 주인공

김봉수(42)는 90년대 한국축구의 대표적인 골키퍼 중 한 명이었다.특히 고려대 1학년 시절이었던 1988년, 아시안컵 이란전에 출장하면서 김판근에 이어 역대 최연소 A매치 데뷔 2위이자 골키퍼로는 역대 1위를 기록했다. 또한 역대 아시안컵 최연소 출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96년 아시안컵에도 참가했던 그는 통산 A매치 14경기에 나서 11실점을 했으며, K리그에서도 92년 입단해 2000년에 은퇴할 때까지 총 109경기에 나서 159실점을 기록한 바 있다. 김봉수는 골키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세이빙, 캐칭 능력 외에도 경기를 읽는 눈과 운영 능력이 좋아 상대 공격수보다 한 발 앞선 플레이로 수비의 버팀목 역할을 해냈다. 현재 올림픽대표팀의 GK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선수 시절을 돌아본다.

역대 A매치 골키퍼 최연소 데뷔의 기록을 갖고 있는 김봉수 ⓒ이상헌

만능 스포츠맨, 최종 선택은 축구!

초등학교 시절 김봉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군산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경기도 구리로 올라와 형과 함께 생활했다. 양정초를 다니던 김봉수는 축구와 핸드볼, 육상, 배구부에서 모두 주장을 맡으며 운동 능력을 뽐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제가 여섯 살이었을 때 돌아가셨어요. 결국 형님이 계시는 구리로 올라와 양정초를 다녔죠. 제 1년 위로 황선홍 선배도 계셨었어요.(웃음) 당시 양정초는 운동부가 다섯 개였는데, 그 중 네 개 운동부에서 주장을 맡았죠."

"원래 축구를 했는데, 발도 빠르고 하니까 다른 부에서도 잠깐 와서 해달라고 했었어요. 그 중에서도 축구부가 메인이었는데, 경기도 대회에 나가면 서울의 학교 팀 감독님들도 보러 오시곤 했죠."

결국 김봉수는 면목초로 스카우트되었고, 원래 공격수였지만, 거기서 골키퍼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저보다 앞서 황선홍 선배도 숭곡초로 스카우트되었고, 저도 옮기게 됐죠. 양정초에서는 저를 안 보내려고 했는데, 면목초 감독님께서 집에까지 찾아오시는 등 열의를 보이셨어요. 구리에서 학교까지 교통비를 하라며 매달 8,300원씩 용돈도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면목초에서도 원래 공격수였는데, 골키퍼가 부상을 당했어요. 그런데 제가 핸드볼부에서는 골키퍼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임시로 골문을 지키게 됐는데, 그게 그대로 굳어져버린 겁니다.(웃음)"

1987년 U-16 월드컵에 참가할 당시의 대표팀 ⓒKFA

동대부중-수도전공고를 거치면서 최고의 골키퍼로 성장

면목초를 졸업하고 동대부중에 입학한 김봉수는 그 연령대에서 최고의 골키퍼로 발돋음했다. 당시만 해도 신장이 170cm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탁월한 순발력과 경기운영으로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3학년 시절 동대부중이 전국대회 5관왕을 차지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 시기에는 키가 상당히 작았지만, 그래도 경기를 모두 뛰었어요. 경기운영이나 승부차기에서 강했었죠. 그 때 우리가 6개 대회에 나가 5번 우승하고 1번 준우승을 차지했었어요. 1년에 1패 정도밖에 하지 않았던 무적 시기였습니다. 저도 3개 대회를 무실점으로 막았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당시에는 GK코치가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죠. 벽을 향해 킥도 시도하고, 튀어 나오는 볼을 막고, 저녁에도 남들 잘 때 조명 아래에서 세이빙 훈련을 하곤 했어요."

수도전공고에 입학한 후에는 '신의 축복'까지 내렸다. 무려 15cm가 크면서 골키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체구가 된 것. 승승장구하던 그는 3학년이었던 1987년에는 캐나다에서 열린 FIFA U-16 월드컵(1989년까지는 U-16, 그 이후 U-17 대회로 바뀌었음)에 참가해 국제 경험도 쌓았다.

당시 U-16 대표팀에는 노정윤, 신태용, 정광석, 서정원, 김병수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김봉수는 주전 골키퍼로 예선 세 경기 중 두 경기를 출장했고, 이탈리아와의 8강전에서도 골문을 지켰다.

U-16 대표팀은 코트디부아르와의 1차전에서 1-1 무승부, 에콰도르와의 2차전에서 0-1로 패하면서 불안한 모습이었지만, 미국을 4-2로 꺾고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다. 이탈리아와의 8강전에서는 0-2로 패하며 탈락했지만, 세계를 상대로 선전을 펼쳤다.

"어렸을 때는 환경이 어려워서 잘 먹지 못했어요. 그런데 수도전공고로 가니까 등록금 전액 면제에 기숙사에서 음식도 잘 나오더군요. 그러면서 키가 15cm가 컸던 거예요. 사실 갑자기 이렇게 크면 신체 밸런스가 안 맞아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 전부터 필드 플레이어와 함께 뛰고 훈련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러다보니 하체도 단단했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좋았습니다. 거기에 당시 학교에 피지컬 코치도 계셔서 도움도 많이 받았죠."

"그 무렵에는 환경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무조건 축구로 성공하겠다는 마음 뿐이었어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축구를 했죠. 그런 의지가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청소년대표에 처음 선발되었을 때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되겠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었죠."

1988년 아시안컵에 참가할 당시의 김봉수 ⓒKFA

만 18세의 나이로 A매치에 데뷔하다!

세계무대에서 선전을 펼치고 돌아온 김봉수는 여러 대학의 영입 경쟁 속에서 고려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1학년이었던 1988년, 만 18세의 나이에 AFC 아시안컵을 준비하던 A대표팀에 뽑히는 기쁨을 맛봤다. 김봉수의 가능성을 높이 산 이회택 감독은 베테랑 조병득과 함께 그를 선택했다.

"사실 대표팀에 선발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었죠. 어느 날 신문에 나오고, 감독님도 뽑혔다고 하시길래 꿈인 줄 알았어요. 당시 대표팀에는 전부 대선배들이었죠. 같은 골키퍼였던 조병득 선배님은 저와 13살 차이가 났을 정도였고요. 다행히 1년 선배인 황선홍 선배가 같이 뽑혀서 둘이 서로 의지하고 지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선배들에게 함부로 말도 못 붙이고 조용히 지냈죠. 선배들에게는 아기 취급을 받았어요. 형이라고 불렀더니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그러시고...(웃음) 선홍 선배와 같이 빨래하고, 바람에 볼 넣고, 쉬는 시간에는 둘이 당구치고 그랬어요."

당시 대표팀 부동의 주전은 조병득이었고, 어린 김봉수는 그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12월 11일 이란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김봉수는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조병득은 경고 2회로 이란전에 출전할 수 없었고, 이미 4강행이 결정된 상황이긴 했지만, 김봉수에게는 소중한 기회였다.

18세 7일로 김판근(17세 244일)에 이어 역대 최연소 A매치 데뷔 2위이며, 역대 아시안컵 최연소 출장 기록이었다. 그리고 이날 경기에서 대표팀은 이란을 3-0으로 완파했고, 김봉수는 무실점으로 A매치 데뷔전을 마쳤다.

"조병득 선배님의 경고누적으로 기회가 온 것이었죠. 이회택 감독님이 이번에 못하면 다시 대표팀에 못 뽑힐 거라고 농담하셨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어려서 그런지 겁나기보다는 한번 도전해보자는 마음이 더 컸고, 실제로 몇 차례 선방을 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었죠."

"이 경기로 역대 A매치 출전 최연소 2위를 기록했는데, 나중에 아이에게 아빠가 이런 사람이었다고 말해줄 수 있어서 뿌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회에서 조병득 선배님과 함께 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킥이나 공중볼 잡을 때의 자세, 세이빙을 할 때 한 발로 뛰면서 강하게 미는 동작 등을 옆에서 지켜보며 배웠죠. 사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다보니 궁금한 것을 선배님께 꼬치꼬치 캐묻지 못하고, 눈으로만 배운 것이 아쉽긴 합니다.(웃음)"

안양 LG 시절의 김봉수 ⓒKFA 홍석균

K리그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

고려대를 졸업한 김봉수는 1992년에 LG(현 서울)를 통해 K리그에 데뷔했다. 당시 LG에는 베테랑 골키퍼 차상광이 있었으나 김봉수가 입단한 그 해에 포철(현 포항)로 이적했다. 기회를 잡은 김봉수는 14경기에 나서 13실점으로 0점대 방어율을 기록했고, 신인왕 이야기도 흘러나오는 등 각광을 받았다.

"원래는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상무에 갈 생각을 했었는데, 집안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K리그로 들어가게 됐죠. 운 좋게도 초반부터 기회를 잡았고, 다섯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만 한 골을 내주면서 인정을 받았어요. 언론에서도 신의손과 새로운 라이벌이라고 보도하고, 골키퍼 최초의 신인왕이 탄생할 것인가라고 기사가 뜨기도 했죠."

"당시에 저는 새로운 시도들을 해보려고 했어요. 제가 필드 플레이어도 해봤기 때문에 16m를 치고 나가서 연결해준다든지, 활동범위를 넓혀서 수비진의 부담을 줄여준다든지의 시도를 했었죠."

아쉬웠던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10대의 나이에 A대표팀에 자리 잡은 김봉수였기에 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의 활약도 기대가 컸다. 실제로 올림픽 아시아 예선까지만 해도 주전 골키퍼는 김봉수였다. 그는 골문을 든든히 지키며 올림픽 본선행 티켓을 획득하는데 공헌했다. 그러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경고를 받았고, 경고 누적으로 인해 올림픽 본선 1차전을 뛸 수 없게 됐다.

결국 올림픽 본선 모로코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는 신범철이 출장했고, 그 어느 포지션보다 안정감을 중시하는 자리이다 보니 특별한 실수 없이 모로코전을 무실점으로 막은 신범철이 나머지 파라과이, 스웨덴전에서도 골문을 지켰다. 벤치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김봉수로서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경고누적으로 올림픽 본선 첫 경기를 뛰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올림픽에서 저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골키퍼라는 자리는 한 경기를 못 뛰게 되면 계속 못 뛸 수 있거든요. 결국 그렇게 됐어요.(웃음) (신)범철이가 모로코전에서 잘해줬고, 그런 상황에서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범철이로 계속 밀고갈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할 당시의 김봉수 ⓒKFA

올림픽 이후의 슬럼프를 극복하다

올림픽 당시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팀을 위해 벤치에서 서포트에 열중했던 김봉수였지만, 역시 심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93시즌에 나타났다.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 그는 실수를 연발했고, 결국 후보로 밀리고 말았다. 이 시즌에 그는 단 7경기만 출장했다.

은퇴 시즌이었던 2000년에 3경기를 뛴 것을 제외하곤 매년 10경기 이상씩은 꾸준히 소화했던 그에게 93시즌은 악몽과 같았다. 그리고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있던 김봉수를 구원해준 것은 역시 가족이었다.

"올림픽을 갔다 와서 여러 가지로 힘들었어요. 심적으로 흔들리면서 실수가 나왔고, 그러다보니 자신감도 떨어졌죠. 여기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더해지면서 부담감도 커졌어요. 그 때 아내가 그러더군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축구를 하냐? 팬, 명예, 돈 때문이냐? 왜 이렇게 힘들어하냐? 당신이 인정받아야 하는 사람은 나와 아들이다. 우리에게 인정받으면 나머지는 다 따라온다. 다시 해보자'라고..."

"아내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다른 생각 없이 정말 열심히 훈련했어요. 팀 훈련이 끝나고도 개인훈련을 빠지지 않고 했죠. 아내도 아들과 함께 훈련장에 와서 책을 보면서 저를 지켜봐줬고요. 그렇게 1년을 보내니까 다시 주전 자리로 올라섰고, 대표팀에도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1996년 스웨덴과의 A매치에 나설 당시의 김봉수 ⓒKFA 홍석균

매 시즌 꾸준한 모습, 2000년에 현역 은퇴

부활한 김봉수는 이후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92년부터 99년까지 한 클럽에서만 뛰며 슬럼프였던 93시즌을 제외하곤 매년 10경기 이상을 소화했고,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려 96년 아시안컵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다면 K리그에서는 정규리그 준우승 1회, 컵 대회 준우승 3회만 기록하면서 우승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것이다. 또한 대표팀에서도 초기에는 조병득, 김풍주, 최인영 등에게,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김병지, 이운재 등의 존재로 인해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점도 마찬가지다.

"사실 아마추어 시절에는 우승을 정말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정작 프로에 와서는 한 번도 못했죠. 그나마 현역은 아니지만, 전남 GK코치 시절에 FA컵을 두 차례 우승했던 것이 위안이 됩니다.(웃음)"

"골키퍼는 한 순간만 방심해도 바로 밀려납니다. 한 팀에 한 명만이 경기에 뛰는 것이 허락되는 자리인 만큼 경쟁이 치열하죠. 그리고 워낙 안정을 중요시하는 포지션이라서 삐끗해서 밀려나면 다시 올라서기도 정말 힘들어요. 저도 대표팀에서는 (김)병지, 팀에서는 박철우 선배나 차상광 선배, 임종국 선배 등과 끊임없이 경쟁했던 것 같아요."

"1999년에는 중국으로 진출하는 것이 거의 결정됐었어요. 그런데 중국 팀의 일처리 과정이 너무 신뢰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돌아왔는데, 이미 팀에서는 임의탈퇴 상태였죠. 우여곡절 끝에 6개월 만에 복귀했고,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 않아서 개인 훈련을 엄청나게 했어요. 그러면서 복귀 3주 만에 다시 경기에 나설 수 있었죠. 그리고 2000년에 울산에서 선수로서의 마지막 해를 보냈습니다."

2000시즌에 새롭게 울산 유니폼을 입은 김봉수는 플레잉 코치로 뛰면서 지도자의 삶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결국 200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굴곡이 많았던 그이지만, 90년대를 대표하는 골키퍼 중 한 명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는 김봉수의 건투를 빈다.

"당시 플레잉 코치라는 것이 선수와 코칭스태프의 중간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정말 힘들더군요. 더군다나 저는 안양에서만 계속 선수 생활을 했었으니까요. 그 와중에 울산 고재욱 감독님이 7연패를 하시면서 물러나셨고, 저도 함께 사퇴했습니다. 단순히 선수였다면 남을 수도 있었겠지만, 플레잉 코치였기에 같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가 만 30세이니까 충분히 더 뛸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더 인내하고 노력하면서 2002 월드컵까지 한 번 더 경쟁을 해볼 걸' 이라는 후회도 들긴 해요.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부분들은 지도자로서 선수들을 지도할 때 도움이 되긴 하더군요. 제가 굴곡이 있었다보니 그 경험을 토대로 선수들에게 다양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거죠.(웃음)"

올림픽대표팀 GK코치로 활약하며 동메달 획득에도 일조했다. ⓒ이상헌

후배 골키퍼들을 위한 조언

"신체조건이 작다고 낙담하는 어린 골키퍼들을 여럿 봤어요. 그러나 신체조건이 전부가 아닙니다. 현재 대구FC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는 박준혁이 용인축구센터 시절 제자였는데, 이 친구도 골키퍼로서는 키가 작아요. 180cm밖에 안 됩니다. 고2 때 자기 키가 작다고 필드 플레이어를 하겠다는 것을 설득해서 골키퍼로 키워 지금은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죠."

"현대축구는 크로스가 빠르고 경기 속도도 엄청납니다. 물론 키가 크면 더 유리하겠지만, 더 빨리 경기 상황을 읽는 능력을 키운다면 기회가 올 거예요. 골키퍼는 180cm 중반 이상이 유리한건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180cm만 넘는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순발력과 함께 경기를 읽는 눈이 필요하죠. 수비진을 리딩할 수 있는 능력도 여기서 파생되는 것이고요."

"또한 요즘 골키퍼들은 발 기술도 잘 갖추고 있어야 하고요. 이런 부분들은 선수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신체조건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더 많은 땀을 흘리세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실 제 장점은 경기를 읽는 눈이 빠르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약점으로도 작용하더군요. 너무 빨리 예측하고 움직이다보니 상대가 그것을 역이용하면 속절없이 당하기도 했거든요. 골키퍼는 한 번의 실수도 크잖아요. 빠른 예측으로 좋은 장면도 많이 만들었지만, 반대로 한 두 번의 실수가 나오면 잘했던 부분들은 그냥 없어져버려요. 그래서 GK코치를 하면서 선수들에게도 너무 빠른 예측을 자제시키고,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지도하고 있죠."

인터뷰 중인 김봉수 ⓒ이상헌

골키퍼 김봉수가 꼽은 까다로웠던 공격수는?

그렇다면 골키퍼 김봉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공격수는 누가 있었을까?90년대의 수많은 공격수들 중에서 김봉수가 가장 까다롭게 생각하는 선수는 노상래와 데니스, 샤샤였다.

"노상래는 슈팅 타이밍이 정말 빨랐어요. 거기에 슈팅 파워까지 엄청나 막기 까다로웠죠. 데니스는 스피드를 살린 돌파에 이은 슈팅이 좋았고, 샤샤는 노련한데다가 킬러 감각이 있었죠. 세 선수 모두 공통적으로 슈팅 타이밍을 예측하기가 힘들었어요. 결국 공격수와 골키퍼의 대결은 슈팅 타이밍을 빼앗기느냐, 빼앗느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죠."

"수비에서의 호흡은 올림픽대표팀 시절부터 함께 했던 정광석과 좋았던 것 같아요. 영리하게 수비하는 친구였죠. 조민국 선배와도 호흡이 잘 맞았고요. 또 U-17 대표팀 시절부터 고려대, 올림픽대표팀, 안양에서 함께 뛰었던 서정원은 제가 볼을 잡으면 바로 전방으로 뛰었고, 거기에 맞춰 제가 킥을 정확하게 주곤 했어요. 그런 면에서 호흡이 잘 맞았던 친구죠.(웃음)"